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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질문의 방향을 바꾸어 찾아보는 삶과 사역의 해답 | 이성춘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21.12.28 17:4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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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본부장 칼럼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 찾아보는 삶과 사역의 해답

글·이성춘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기독교인들은  삶과 섬김을 자기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고 살아간다. 이것은 예수의 삶을 모방하여 실천하는 삶이며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인 것이다. 더글라스 멕코넬은 어린이를 위한 사역 현장의 경우를 보면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What would Jesus Do?)'라는 질문을 하였지만, 그 질문을 '예수님은 무엇을 했는가?(What Did Jesus Do?)'로 바꾸지 않는다면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어린이를 영접한 예수님의 모습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에는 예수님이 아무것도 해보지 않았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도 하다. '예수님은 무엇을 했는가'로 질문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은 초보자, 미숙한 분이 아니라 온전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중심, 기초가 되시며 우리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이심을 정확히 이해해야 함을 깨우쳐 주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의 여정, 발자취를 남겨주시고, 그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 단순하게 예수님의 삶의 여정, 그 길을 따라만 가도 우리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라는 질문

'예수님이 무엇을 하였는가?'라고 질문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 자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 질문에는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달리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사람의 평가는 그가 감당하는 사역의 특성과 그 내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서 '그 일을 왜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로 질문을 바꾸면 어떻게 될까? '무슨 일을 하는가?'에서 '왜 하느냐?'로 질문을 바꾸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셔서 순종함으로 감당하는 일이 된다. 또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가?'로 질문을 바꾸면, 그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서 감당한다고 대답을 하게 되는 것이다.(짐 그래함)


이렇게 질문을 바꾸면, 우리의 직업, 신분에 따른 사람의 차이, 차별, 우열을 가리려는 모습이 달라지게 된다. 이것은 로렌스 형제가 지적한 것처럼, 신앙 성장은 영적인 일을 하려는 지금의 일을 바꾸려는 것에 있지 않고 지금 하는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일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서로 비교되지 않는 귀중한 존재가 되며, 우리들의 사역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사역이 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라고 묻는 동시에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질문하며 사는 사람이 된다."(데이비드 플랫)  그래서 우리는 동일한 일을 하면서 나 자신을 위해 하던 일을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로 의식을 바꾸면서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이다.(로렌스 형제)

 

'하나님은 무엇을 하신 것인가?'라는 질문

갑작스럽게 불행한 일이 닥치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발생할 때가 많다. 이때, 나의 어려운 현장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것인가?' '하나님은 왜 나에게 고통을 허락하셨나?'라는 질문을 한다.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질 때, 우리의 환경에서 하나님의 역할과 하나님의 뜻에 의문을 던지고 항의하는 자세를 가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제럴드 L. 싯쳐)  우리의 질문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지고 나 자신이 대신 고민하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을 점검하고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이 옳은지, 정당한지를 따지지 말고, 하나님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앞서려고 하지 말고, 나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나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서 점검하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 내가 감당해야 할 인내의 때에, 그때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훈련을 받을 자세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울타리를 통과해서 온 것이다.(엘리자베스 엘리엇)

 

'사건중심으로 살것인가?'라는 질문

인생의 스토리를 정리하며, 지금까지의 삶 속에서 전환점을 이룬 사건들을 점찍고 삶의 굴곡을 곡선으로 그려보며 자기 점검의 시간을 갖는다. 이때 자신의 삶을 크고 중요한 사건, 상황이 모아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 개별적 사건이 아니라 인생의 여정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더브 베니스터는 신앙생활과 영적 성장에 관하여 은사주의는 사건 중심으로 이해하고, 복음주의는 사건이 아니라 여정으로 이해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나게 하신다. 하지만 사건 중심의 영성, 사건중심의 삶에 반사적으로 작용한다면, 계속되는 사건에만 의존하는 탓에 일평생 지속되는 영적 성장의 긍정적인 형성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극적인 영적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는 매일, 매년 계속되는 신앙의 여정을 충실히 걸어가는 법을 배워야 할 사람이 많다고 지적한다. 사건 중심의 반사작용에서 주님이 이끄신 여정으로의 반추작용을 하여 영적성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절된 사건, 많은 어려운 상황들을 변수로 보면서 일회적인 해답을 찾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여정으로 보고 상수,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요소, 근본적인 해답들을 찾아가야 한다. 이것은 인생을 사건, 상황이 발생한 단절된 현장으로 보고, 그에 대한 변수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연속적인 여정으로 보고, 상수 곧 하나님의 섭리, 손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사건중심으로 단절된 인생을 살아가고, 그것의 영향으로 중단되어지거나 포기되어지는 일이 없이, 여정으로 생각하여 다음단계로 이행해 가는 연속된 섭리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상황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단번에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의 인생은 오랜 시간과 어려움이 뒤따르는 과정, 즉 우리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기나긴 경험의 길을 거쳐가는 온전함을 향한 여정의 과정인 것이다. 영적 성장은 한 길을 걸으며 오래 오래 꾸준히 복종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인생을 사건 중심이 아니라 긴 여정으로 보고 주님께 이끌리며 살아야 한다.

 

환경의 역주행에서 신앙의 정주행으로?

바우리 공동체는 함께 하는 공동체, 고통당하는 공동체, 안전하게 항해하는 공동체이다. 우리 모두는 시간이 지나서, 큰 상황과 사건들을 통해서 지치고 연약해진 노후선, 폐선이 아니라 안전한 포구로 되돌아가 쉼과 회복을 얻고 만경창파로 다시 나아가는 배들이며, 그 배에서 노를 젓는 뱃사공들이다. 주님만이 우리의 선장이시고 선주이시다. 인생의 여정에서는 역주행이 있고, 정주행이 있다.  삶의 사건을 중심으로 보면 인생은 역주행이 많은 인생이 될 수 있지만,  사건을 넘어서, 상황을 넘어서 여정으로 보고, 전체를 보고 나아가면 삶의 정주행을 이루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생활의 현장에서는 많은 변화무쌍한 일들이 주어진다.  우리의 기대와 소망에 따른 좋은일이 아닌 어렵고 힘든 일들이 일어난다.  환경의 역주행인 것이다. 그런데  주변환경의 역주행 속에서도 말씀과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주행을 하는 모습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이런 모습은 환경을 이기고 주님과 더불어 승리하는 삶의 모습이다.

 

우리 가운데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일이 수행되어야 하는가?'하고 물을 뿐 아니라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도 던져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 선포에 이어 제자들은 예수님을 좇아 하나님나라의 일에 동참하라는 개인적인 부름을 받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돌이켜서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 공동체의 일원이 되라고 초대하는 일이 언제나 선교의 핵심이어야 한다.(레슬리 뉴비긴)


어떤 일이 필요한 일인지 수행되어야 하는지도 살피고 '그 일을 누가 할 것인가?' 질문하지만,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자원하면서 그 일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까?" 질문하고 다시 도전해야 한다. 그동안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돌볼 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지체들을 돌보는 마음도 가져야 한다. 함께 울고 웃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초보자가 아닌가?

선교지에서 종종 자신이 시도하고 시작하는 사역들이 이전에 아무도 하지 않았던 사역이라고 자부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 사역들은 특별하며 독창적이며 새롭게 시작되는 사역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먼저 행한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라 이미 여러 사람들이 행한 일들이다. 그는 처음 시작한 원천소유자, 특허를 내고 등록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는 초보자에서 경험자로, 노련한 자로 단련된다. 견습생이 아니라 숙련공이 되어간다. 정말 원숙한 경지에 이르고, 다양하고 두터운 인관관계, 네트워크를 형성해 간다. 그렇지만, 우리는 힘들고 지치면 언제나 현장을 떠나고 싶어한다. 초심자와 실패자와 같은 마음을 갖는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출발은 처음부터 초심자였고, 노숙자였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에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눅 9:58)  "나를 따르다가는 노숙자 신세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신 것이다.(데이비드 플랫) 


그리스도를 좇는 길은 안정된 주거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불편한 삶을 살아가며, 자기 권리포기를 실천해 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초심자라는 말을 듣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일생 동안 초심자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토마스 머튼)  그래서 우리는 '노숙자이며 초심자다"라는 마음을 갖고 언제나 주님께로 돌아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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