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본부  /  Headquarter
[본부장칼럼]교차로에 선 우리들 | 이성춘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21.04.20 17:49:23
17290

국제본부장 칼럼

교차로에 선 우리들

글·이성춘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경제 대국과 선교 대국의 길목에서

선교는 부유한 국가가 되었을 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어려울 때 시작하는 것이다. 미국은 국민소득 1천불 때부터 선교를 시작했다고 한다.  전주안디옥교회는 1983년에 설립과 동시에 선교를 시작했고 그때 대한민국 국민소득은 2,150불(세계 평균 2,431)이었다. 바울선교회가 시작된 1986년도에는 국민소득이 2,820불(세계 평균 2,827)이었다. 바울선교회가 35년 된 지금은 국민소득 31,755불 시대가 되었다.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지만, 선교하면서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한국은 선교대국이 되고 경제대국이 되었다. 선교가 재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선교하는 국가는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된다는 사실이 확증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선교대국이며 경제대국인 유럽지역에서 일어나는 경향을 극복하는 일이다. 잘 살아지면 기독교 신앙을 소홀히 하고 선교의 참여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선교하는 국가가 경제대국이 되고 고비용의 선교시대에 이를 때에,  선교에 대한 열의가 약해지는 경향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선교의 저비용과 고비용의 갈림길에서
선교사의 생활비와 선교비는 계속 상향 조정되었고, 한국인 선교사의 생활은 서구의 선교사의 생활수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비슷한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이제 한국 선교사들도 고비용선교를 감당하는 선교사들이 되었고, 현지의 경제생활 수준에 비해 월등히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 선교현장에서는 초고비용의 서구선교사보다 고비용의 한국 선교사가 증가하고 있다. 또 한국선교사보다 저비용인 다른 비서구 선교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스콧 모르(Scott A. Moreau)는 서구교회들이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선교사를 선교지로 파송할 책무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책무를 피하게 될 때, 선교의 약화만 아니라 신앙의 상실로 이어진다고 한다. 선교는 가난하든 부유하든,  저비용 선교든, 고비용 선교든 모든 기독교인이 언제나 감당할 책무인 것이다. 한국교회도 경제대국이 되어가면서 선교사 한 가정을 위한 재정이 초고비용으로 되어간다. 그리고 유럽국가처럼 한국교회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식고 있으며, 선교의 자원인 사람과 재정도 줄어들고 있다.

 

바울선교회는 현지인 선교사 파송을 하고 있으며 현지인 선교사 숫자는 100여 명에 육박하고 있다. 앞으로 이들의 숫자는 더 늘어나야 한다. 그렇지만 국내에서의 선교사 발굴과 파송과 지원이 약화되는 것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더 기도하고 힘을 내어 국내에서의 선교사 동원과 파송을 지속해 가야한다. 우리는 서구 기독교라고 지칭되었던 곳이 선교지가 되는 것과 같은 과정의 길목을 차단해야  한다.

 

선교지의 가난함과 파송국가의 부유함의 길목에서
고비용 환경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지만, 저비용에 익숙해지는 선교사의 현지화와 현지인과의 동일시는 초대교회부터 이어진 포기할 수 없는 끊임없는 도전이다. 사도적 검소함과 절제, 자기부정은 조나단 봉크(Jonaathan J. Bonk)가 언급한 위대한 포기(great renunciation)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거주하며 사역을 하고 있는 선교지는 여전히 국민소득이 2천 불도 채 되지 않는 나라들이 대부분이다. 그곳 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하루하루 일할 것을 찾는다. 우리가 처음 선교하기 시작할 때의 모습도 그들과 같았다. 그런데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선교사들은 부유한 고국의 생활 수준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선교지의 가난한 삶과 파송국의 부유한 삶의 이중적인 삶의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선교사의 마음과 생활이 가난하고 어려운 현지인들과 발맞추기보다 부유하고 잘 사는 고국의 경제 수준에 맞추어져 있다면 되돌아볼 일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성육신의 일들은 구원의 내용이자 선교의 모델인 것을 여전히 배우고 숙지하지만, 선교사의 뜨거운 헌신은 점점 약해지고 안정된 삶에 안주하는 자세에 익숙해지지 않을까 조심스러워진다.

 

46년과 3일 만의 상황과 하루와 40년의 관계의 길목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 의식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유대인 지도자들과 대면해 ‘46년 동안 건축해 가는 예루살렘 성전 건축 현장에서 눈에 보이는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다시 세우실 성전’을 언급하시며 주목하라고 하셨다. 46년과 3일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상황과 새로운 의미의 건축, 새로운 의미의 삶과 세상이 언급된 것이다. 외적인 건물을 세울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건물과 비전을 세울 것인가?


출애굽 하는 것은 하룻밤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그 문화와 삶의 방식을 버리는 일은 40년이 걸렸다. 하루와 40년의 관계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꺼내는 데에 하룻밤이 걸렸다. 하지만 애굽을 이스라엘로부터 꺼내는 데는 40년이 걸렸다.”(존 오트버그, John Ortberg)  선교사가 선교지에 도착하는 것은 비행기로 하루나 이틀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선교사가 현지화되고 현지인과의 동일화가 이루지는 시간은 40년이 걸려도 충분하지 않은 것을 본다. 바울선교회도 한국형 선교단체에서 이제 현지 중심적이고 국제적인 선교단체로 성숙되어지고 있다. 이제 충분하다고 여기기 쉽지만, 여전히 타문화 속에 살아가면서 현지화되고 동일화되는 과정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우회하는 길과 직선거리의 길목에서
빠르고 서두르는 우리 시대에 리처드 모우(Richard Mouw)는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빠르시다는 일반적인 표제 아래 신학적 교정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우회도로로 인도하시고 성급하게 이동하지 않게 하시며, 결코 서두르지 않게 하신다. 하지만 전주에서 만경으로 본부를 이전하는 지금, 우리는 우리를 직선도로로 인도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실존적으로 대면하고 있다. 하나님은 바울선교회를 만경으로 인도하시면서 당신의 서두름과 긴급한 마음을 보여주신다. 주님께서는 만경에서 새로운 바울선교회를 쓰시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바울선교회의 이전이 채 1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만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70년의 희년까지 앞으로 35년 동안 주님의 쓰시기에 편한 바우리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가? 바울 선교사의 사도적 모델을 세우는 것이다. 수도사적 선교 영성, 성육신적 청빈한 삶의 영위, 행정의 국제화, 사역의 전략화, 사역자의 성품 형성과 현지 교회 지도력 개발, 현지 교회 동원, 현지인 선교사 훈련, 바우리 마을 형성 등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추천 소스보기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