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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비움과 채움 –하나님의 다루심- | 김태현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19.10.30 17:5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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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본부장 칼럼
비움과 채움 –하나님의 다루심-
김태현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하나님은 고역으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모세 같은 걸출한 인물을 예비하셨다. 모세는 이집트의 궁중에서 왕자로 성장한 사람이다. 이집트의 최상급 법도와 문화적 소양을 지닌 자라고 보는데 이견이 없다. 나아가, 그는 자기 종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애국적 결기決起로 충만한 자였다. 결과는 부당한 이집트 관리와 시비가 붙어 그를 살해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 정의심의 잣대를 자기 동족에게도 들이댔지만, 그 동족은 강하게 반발했고 오히려 이집트인을 죽인 자라고 하면서 모세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거대한 명분의 민족구원이 실패로 돌아가자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여 거기서 낭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누구도 찾는 이 없고, 알아주지 않는 광야에서 평범한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양을 치는 목동의 삶을 40년이나 했다.

 

이제 나이 80세, 40년 전의 그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인생의 황혼기에서 인생무상을 느끼고 있었을 때이다.
 성경은 모세의 전환기적 삶의 변곡점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양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출 3:1  여기 표현에 주목하자. ‘광야의 서쪽 끝(a•ḥar)’이라는 지리적 표현이다. 광야에서도 마지막 끝자락이고 더는 갈 데 없는 인생의 절벽이 그 자리이다. 더는 물러설 수 없고, 나아갈 수 없는 그곳이 바로 광야의 서쪽 끝이 아니던가!

 

성경에서 방향이 주는 상징성은 확연하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도 동쪽으로 갔다. 가인도 동쪽으로 가서 자기의 성을 쌓았다. 바벨이 세워진 곳도 동쪽 시날 땅이었다. 롯도 동방 기름진 땅을 차지했다. 성경의 많은 사례가 동쪽은 세상과 부유함을 상징하는 방향으로 표현한다. 반면, 서쪽은 그야말로 끝이고, 절벽이고, 석양의 때이다. 인생의 석양과 비유하면 그 의미가 뚜렷하다. 서쪽은 인생이 마지막까지 간 곳이다. 갈 데까지 가서 더는 비켜설 수 없는 곳이 서쪽이다. 황혼기, 더 나아갈 곳이 없는 마지막 코너, 그곳이 서쪽이다. 한때 그 특출했던 모세가 이 서쪽까지 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갈 곳이 없다. 희망이 없다. 자기의 의지를 키울 희망이 없는 곳이다. 여기까지 하나님은 모세를 다루었다. 모세의 80세, 아브라함의 100세, 야곱의 130세가 모두 그들이 직면한 서쪽이다.
우리 인생의 막힘Dead End은 하나님의 손길이 시작되는 열림Opening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다루심 속에서 너무나 선명하다. 전혀 불가능한 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로 몰아넣고 하나님은 자기 일을 이루어 간다. 그 시각적인 표현이 떨기나무이다. 떨기나무는 관목으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나무다. 광야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그늘도, 열매도 줄 수 없다. 그래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나무다. 고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풍채도 없다.이사야 53:2-3  이 떨기나무는 모세 자신을 상징한다. 사람이 보기엔 쓸모없는 모습이다. 누가 봐도 다시 쓰임 받기는 불가능하다. 그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이다. 자기의 힘과 정의감으로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역을 하나님이 모세를 들어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취해야 할 행동이 나온다. 이전에 신고 다녔던 신발을 벗어 던져야 한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이전에 내가 주인이었던 삶과 이제 주님께 붙들려서 쓰이는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더는 옛 신발을 가지고 주님을 따를 수 없다. 이것이 구별되었다는 ‘거룩Qadesh’의 뜻이다.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모세를 훈련한 하나님의 훈련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 세상의 모든 훈련은 더하기 훈련이다. 즉 자기실현self-fulfillment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더하면 그만큼 나의 소유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를 다루신 하나님의 훈련은 철저히 빼기 훈련이었다. 하나님이 다루심은 인간적인 것을 철저히 비워버리고, 하나님 자신의 것으로 채우는 과정이다. 그의 왕자로서의 신분을 빼야 했고, 젊음과 자신의 정의감을 빼야 했다. 광야 서편 끝에서 모세가 대면한 하나님의 현존 앞은 그 어떤 것도 내세울 수 없는 벌거벗은 실존의 자리였다. 여기는 내 것이라고 할 어떤 소유도 남지 않았다. 그는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했다. 광야 서편에서 그는 출구 없음NO EXIT과 마주쳐야 했다. 좌우 상하가 꽉 막힌 상태라고 보면 된다.

 

철저한 자기 비움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종들을 위한 다루심이다. 우리는 선교사 경험에서 이런 훈련을 적잖게 경험하고 있다. 하나님의 훈련은 결코 우리의 자기 강화를 위한 채움이 아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이 무르익으면 익을수록, 나는 아무것도 아닌 자로 발견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내가 뭔가 된 사람이 아니다. 철저히 내가 빠지고 주님이 나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 이것은 세상의 훈련과 너무나 달라서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런 훈련은 세상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점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공통으로 고백하는 간증적 교집합이다. 서쪽까지 갔으면서도, 나는 이 만큼 채웠으니 이제는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면 정반대의 훈련을 받은 거다. 나는 할 수 없고,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다는 경험적 심층 고백이 나타나는 때가 바로 광야 서쪽이다.

 

그 후 모세는 민족구원의 대업을 놓고 하나님과 말을 주고받는다. ‘내가 누구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리까?’출 3: 11   이전에 그토록 패기에 넘쳐 민족 구원자로 자청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언사다. 옛날 그렇게 정의감과 혈기방장血氣方壯할 때도 안됐는데, 어떻게 지금 늙은 몸으로, 그리고 자신의 결기가 다 빠진 상태에서 가능하겠느냐는 상식적인 질문이다. 자기의 모든 게 다 빠진 사람으로서 당연한 물음이다. 그러나 성경에 면면히 흐르는 교훈은 주를 위한 지원병volunteer이 아니라, 주님이 다루셔서 사용하시는 징집병draftee의 의미를 말씀의 행간에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 15: 10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언정 저는 목숨까지 내놓고 주를 따르겠다는 베드로와 동료 제자들도 정작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떠나버린 예가 지원병으로는 쓰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결국, 하나님의 채움오순절 성령 충만 후, 제자들은 목숨을 내놓고 복음의 사역자로 나선 게 아닌가! 바울이라는 인물도 자신이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로 자원한 게 아니고,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시발점으로, 철저한 하나님의 다루심의 과정을 통해 나타난 열매다. 이런 하나님의 다루심을 경험한 자들의 일관된 고백은 나의 나 됨은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으로 되었다고 주저 없이 간증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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