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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선교는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 김태현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18.04.25 18: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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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본부장 칼럼
선교는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김태현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한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승자독식의 원리이다. 이 법칙에서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따라서 인간을 비롯한 생물들이 그 자손을 강한 자로 키우려는 본능은 자신의 종족을 보존하려는 원초적 본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뭐래도, 세상은 힘의 논리가 우세하다. 그래서 누구나 힘을 기르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것은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다.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거나,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은 모두 같은 원리이다. 인간사회의 엄연한 주권국가라 할지라도 강국이 약소국가를 종속 관계로 만들어 버린 역사는 흔하다. 평화(Pax Romana, Pax Americana) 뒤에는 언제나 힘이 그 지배원리로 작동한다. 여전히 지금도 우승열패(優勝勝敗)와 강자독식(强者獨食)을 당연한 인간사로 합리화하는 프로파간다가 힘 있는 자들의 짬짜미를 통해서 버젓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근본문제를 신성한 영역에서 다룬다는 종교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이러한 힘의 지렛대를 이용하여 자신들이 신봉하는 종교의 통치력을 확장하는데 심혈을 쏟아왔다. 이런 현상은 역사이면서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지구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과 전쟁은 거의 종교와 연관을 맺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쟁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그럴싸한 사상과 이념이라는 외피를 뒤집어보면 거기에는 종교가 똬리를 틀고 있다.
종교가 인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살펴보면 끔찍하다. 과거 십자군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유라시아의 질서를 교란시켰던 종교는 기독교였다. 오늘의 모슬렘들은 역사의 강자 위치에서 폭력을 행사했던 기독교를 상기하면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대항하고 있다. 시온이즘을 믿고 있는 유대주의자들과 모슬렘권과의 대결은 중동의 패권을 놓고 일전을 불사하면서까지 세계질서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도 종교적 차이로 인한 대립과 충돌이 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을 믿는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 100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다. 2000년 이후 일어난 모든 내전의 43%가 종교 때문에 일어났다고 한다. 수 세기에 걸친 기독교도들이 유대인을 증오하면서 낳은 결과가 대학살(Holocaust)이다. 불교국가인 미얀마 정부군은 로힝자(Rohingya, 로힝야) 족을 학살, 성폭행, 방화 등의 만행을 저질러 로힝자 족은 50만 명 이상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방글라데시로 도피한 상태다. 유엔은 '인종청소의 교과서'라고 지칭했다. 미얀마 로힝야 부족 갈등의 근저는 종교에 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가 이렇게 자기들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있다.


인간 문제의 해법을 제 나름대로 제시하는 종교들이 왜 이렇게 진흙탕 싸움을 하는 걸까? 좀 인용하기는 주저되는 면이 있지만, 종교에 대한 현대인의 사고를 대변해주는 존 래넌의 노랫말 "상상해 보라, 종교 없는 세상을"의 가사는 이렇다.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도, 런던 폭탄테러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화약음모사건(1605년 영국 가톨릭교도가 계획한 제임스 1세 암살미수 사건)도, 인도 분할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대량학살도, 유대인을 '예수 살인자'라고 박해하는 것도, 북아일랜드 '분쟁'도, 명예살인도…." 요컨대 종교가 없다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고 인간이 얼마나 행복해지겠느냐는 뜻이다. 로마의 시인,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B.C. 99-55)의 오래된 격언, 즉 "종교는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데 그것이 너무나 위력적이다"는 여전히 현대인의 생각 속에도 각인되어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제는 도대체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종교는 인류 앞에 길(The Way)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종교가 인류에게 많은 고통을 초래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그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운전 도중에 전화 통화를 하다가 사고가 났다고 해서 자동차 회사를 탓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깔끔한 정리를 해 준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 되지만 오직 나의 신으로 된다고 선언한다.(슥 4: 6) 우리가 바라는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이다. 세상 나라는 군사력을 동원해서 정복할 수 있어도 힘으로 하나님 나라는 세울 수 없다. 과거 유럽의 제국의 팽창주의자들이 기독교 제국의 위임을 받은 대리인을 자처하며 세계를 식민지화하였다. 그러나 역사 가운데 기독교를 힘으로 세우려는 어떤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문명의 서구화가 곧 기독교는 아니었다. 결국, 과거 기독교 서구열강의 세력확장은 기독교가 문화화되는데 이바지했을 뿐이다. 그 결과 하나님 백성들의 거룩성과는 판이하게 부패의 냄새는 심했고, 기독교는 급속하게 문화화되어 갔던 것이다. 거룩한 백성, 새사람, 하늘에 속한 자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오늘도 이러한 힘의 법칙이 교묘하게 포장되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뭔가 크고 웅장한 것에 기대어 "복음의 제국화"를 꿈꾸는 선교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선교역사가 '하나님 통치'를 위한 선교가 아니라, 기독교 왕국'(Christendom)을 위한 선교를 수행해왔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섬김이 그 성질이지만 '기독교 왕국'은 힘을 통한 '섬김받음'을 강제하고 확장하는 역사였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을 주어서 남을 살리는 성질이다. 소자(小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곳은 하나님 나라밖에는 없다. 우리의 선교는 이제 더는 역사적 실험에서 실패로 판명된 '기독교 왕국'의 망상을 내려놓고 '하나님나라'의 진정한 의미의 통치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군대를 통해서가 아니고 유월절을 통해서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사탄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더니 이제는 끝장이구나"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비밀이 있었다. 사도들은 그 비밀을 전파한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불덩어리를 내려 사탄을 정복했다고 전파한 것이 아니었다. 군대를 동원해서 세상을 정복했다는 기록도 하지 않았다. 전혀 사람들이 생각할 수도 없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을 전파한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비밀이다. 세상은 힘으로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세상에서는 그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선교도 그런 힘의 지렛대로 쟁취할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나라는 사자나 독수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어린양으로 세워진다. 십자가에 달린 어린양만이 인류가 그렇게 갈망했던 세계가 된다. 결코, 힘으로 세워지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려 죽고 산 분만이 그분의 나라를 세울 수 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우리가 외치고 있는 복음의 절대적인 차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만이 인류의 답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다.

 

국제 본부장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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