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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받은 것(gift)과 이룬 것(achievement) | 김태현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17.09.05 18: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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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본부장 칼럼

받은 것(gift)과 이룬 것(achievement)

김태현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수련회와 연관된 칼럼을 세 번에 걸쳐 써왔다. 이제 수련회를 마무리하면서 떠오르는 단어가 '선물'이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선물이다. 내가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앞으로도 바우리의 운명은 주님의 선물에 달려있다. 내가 만든 것을 가지고 사는게 아니고, 주신 선물을 누리고 사는게 인생이라고 본다.

 

누구나 두 개의 소유가 있다. 하나는 선물로 받은 것(gift)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땀 흘려 노력해서 이룬 것(achievement)이다. 선물로 받은 것은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밖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이 선물이 조금이라도 나의 대가로 주어졌다면 선물이 아니고 나의 노력의 산물이 된다. 약삭빠른 인간들의 판에서는 때론 선물도 뇌물의 성격을 띤다. 뭔가 대가를 바라고 주는 행위일 때 그렇다. 어쨌든 우리의 소유개념에 따라서 우리의 언어 심리적 표현과 태도를 낳는다.

선물은 받은 자의 마음의 표현이 감사로 도출(導出)된다. 반면에 내가 이룬 것은 일시 만족을 얻을 수 있으나 그 기한은 한시적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상대적 평가를 통해 값이 매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낡아지는 것은 피할 수 없으리라. 시간과 함께 내가 이룬 것은 비교를 통한 자랑과 불만을 수반하고 만다. 비교된 것은 항상 우열이 있기 마련이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느 날 내가 이룬 것이 남들과 비교하여 열등한 것으로 드러날 때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반대로 내가 이룬 것이 남의 것보다 클 때는 으쓱하는 자랑의 색조를 띠게 된다. 그래서 자랑과 굴욕감, 이 두 성질은 내가 이룬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내재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마치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사디즘(Sadism)과 마조히즘(Masochism)이 어떤 대상에 따라 상반적으로 표출되는 심리기능과도 같다. 상대가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면 우쭐대고, 대상이 자기보다 크다고 판단하면 금세 굴종으로 자기를 보신(保身)한다. 이러한 태도는 내가 이룬 것을 내세우고 사는 자들의 사회적 내재심리기능의 전형적 행태이다.

 

우리가 받고 누리는 구원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구원이 한치라도 나의 공로로 이루어졌다면 구원 자체가 자랑이 된다. 구원을 얻지 못한 자를 향하여 자긍할 이유가 된다. 구원에 나의 노력이 섞여 있다면 곧 내가 이룬 것(만든 것)이 된다. 바울은 말한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받은 것)이라. 이는 너희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 2:7-8). 구원이 나의 노력으로 되었다면 나의 자랑이 된다. 내가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이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로 되었다면 내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오직 그 구원을 주신 분께만 공로와 감사가 돌아갈 뿐이다. 바울은 또 다른 서신에서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우며 자랑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준엄한 책망을 한다. "너희가 왜 그렇게 뽐내느냐? 너희가 무슨 통뼈라고 너희를 스스로 내세우느냐? 너희가 소유한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도대체 뭐가 있단 말이냐?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모두 받은 것(gift)이라면 어찌 너희 스스로 이룬 것(achievement)처럼 자랑하느냐?(고전 4:7, 개인 번역) 내가 이룬 것은 반드시 자랑을 수반한다. 다만 다양한 문화적인 장박 뒤에 일시적으로 포장할 수 있고, 위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 자랑(내가 만든 것)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강한 욕망으로 인간관계를 혼탁하게 만든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선물, 은혜)을 소유한 자는 반드시 그분만 자랑할 수 밖에 없다. 자기의 공로가 그 속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노력으로 만든 것은 집착으로 이어지고 그 집착으로 흐르는 강은 성취자의 자랑이 넘실거리면서 교만과 강포의 강을 이룬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성취와 성공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든지, 역으로 다른 사람의 자랑과 자긍에 자신을 예속시켜 대리만족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는 성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의 소유개념 : 받은 것인가? 이룬것인가?

온유란 주님 앞에 서 있다는 히브리적인 의미를 내포한다고 한다. 전능자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라. 어디 감히 내가 이룬 것이라고 주장할 게 있겠는가? 그분 앞에 서있는 나는, 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그분이 주신 것만 남는다. 번제단을 보라. 나의 모든 것은 다 불타 없어지고 재만 남는다. 거기서 제사장은 오직 주님 것(피)만 가지고 섬김의 장소(성소)를 거쳐 하나님의 임재의 깊은 지성소로 들어간다. 어느 것도 내가 이룬 것은 그곳에 있을 수 없다.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만 주님께 드린다. 섬김의 장소인 성소에서나 그분의 유일한 임재의 장소인 지성소에서는 내가 만든 어떤 것도 거부한다. 이것이 우리의 섬김이고 예배의 최종이다.

언뜻 보아 자신의 각고의 노력이 보일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주의 은혜를 걸러내면 우리의 모든 소유는 속 빈 강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그분의 은혜요 선물이라고 기꺼이 표현한다. 그리고 그 분으로 온 것은 그 분께 드림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사역 현장에서 일에 매여 너무 기진맥진하는 분도 많다. 그럴 때일수록 내가 만드는 것을 지양하고, 주님께서 주신 것에 초점을 맞추고, 오직 그분의 것만 우리의 선교 제단에 드려보자. 그분 것만이 온전히 그분의 우주적 교회 속에서 숙성하고 충만하게 확장될 것이다.

우리네 사역보고도 내가 만든 것보다는 주님이 주신 것을 나누고 보고한다면 더욱 온전한 섬김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내가 만든 것은 이웃에게 알레르기 적 거부반응을 일으키지만, 주님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살리는 생명 주는 영으로 서로에게 친화적이고 부작용이 없다.

내가 이룬 것에 관한 결정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의 객관적인 문제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한 나의 깊은 심증에 담고 있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심증에 있는 것은 언어를 통해 밖으로 표현하고 그 표현을 통해 사회성이 형성된다. 한가지 결과를 놓고도 저주와 축복을 표현할 수 있다. 저주를 표현하면 그 저주는 사회적 관계로 침투된다. 축복을 표현하면 그 축복은 역시 사회적 관계로 퍼진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보고가 저주를 실어 나르는 자다.

 

우주 비행사들이 만들어낸 단어가 있다. "The overview effect"이다. 같은 사건이지만 저 아래서 보는 것과 우주 비행사들이 저 높이 우주에 올라가서 보는 것은 천양지차(天壤之差)다. 큰 그림을 보고 나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위에서 볼 때는 주신 것이고 아래서 볼 때는 내가 이룬 것으로 표현 된다. 이런 Overview effect를 우리 소유개념에 적용하면 어떨까? 우리의 사역보고에서 내가 이룬 모든 자랑을 그치고(보통은 자신의 신앙적인 용어로 외피를 두르고 표현하지만) 겸손과 온유로 오직 주님 것만 나타낼 수 있다면 이러한 심증 표현은 우리의 총체적인 예배로 이어져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리라. 우리의 식탁의 잔치를 더 풍성해져 우리의 나라(Kingdom)는 생육과 번성으로 융성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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