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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2017년 바우리 권역별 수련회를 앞두고 | 김태현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17.02.17 18: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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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바우리 권역별 수련회를 앞두고

김태현 선교사

 

바우리 수련회와 오병이어의 기적을 대칭으로 놓고 다음과 같은 칼럼을 써본다.

 

벳세다 빈들(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작금(昨今)의 국내외 현실은 금방이라도 뭔가 일어날 것 같은 폭풍전야와 같다. 우선, 정치, 경제, 사회의 시계(視界)가 잿빛이다.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을 주장하며 대권을 거머쥔 트럼프 현상은 오늘의 세계 정치지형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저기 다가올 낯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저항이 넘친다. 화해와 공존보다는 대결과 경쟁의 구도로 국제적 작동방식(algorithm)이 흘러가는 느낌이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경제 지표가 이전 외환위기보다 더 위험수위라고 경고한다. 대선 정국을 맞이하여 한국의 키를 누가 잡을 것인가를 놓고 치열한 각축전이다. 국민은 이 '헬조선'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 아우성이다. 한국교회는 어떤가? 최근 종교여론조사에서 기독교 인구가 늘었다는 고무적인 발표(2005년 대비 2015년 인구주택 총조사 전수조사 결과에 따른 종교인구 분석은 18.2% → 19.7%로 개신교가 최대 종교로 등장)에도 불구하고, 교회 출석 체감 현실은 감소세라고 한다. 체감온도는 여전히 싸늘하다는 것이다. 정상 체열이 아닌 자에게 나타나는 각종 성인병 증상들이 한국교회 여기저기 부상한다. 세속주의를 향한 광범위한 문화적 이동현상이 곳곳에 감지된다. 한 때, 교회 성장과 함께 일어났던 선교 비등점(沸騰點)도 그 열이 점점 식어간다. 벳세다 빈들에 앉아있는 장정들처럼 시장기를 느끼지만, 어디를 보아도 이 많은 사람을 위한 민생고를 풀어줄 한방이 금방 나올 것 같지 않다.

 

영민(英敏)한 빌립(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식솔은 많고 거둘 돈은 턱없이 부족할 때, 아니 부족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할 때, 빌립과 같이 명민한 자는 그 문제 해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까? 민첩한 계산은 산적한 문제와 그 해결 사이의 괴리를 진단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그 계산으로 밥이 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불가능과 무능력을 심화시켜 공동체를 좌절케 할 뿐이다.

나는 본부사역 이전까지는 팔로워(Follower)로 나를 자리매김하는 데 편했다. 수련회가 기다려지고 그 혜택을 누리는 자였다. 어렵다는 말을 듣고 기도는 하였지만, 그게 엄밀한 의미에서 내 어깨 위에 놓인 짐은 아니었다. 비교적 대가를 치르지 않고 2년마다 때가 되면 수련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본부사역의 키를 쥐고 보니 '강 건너 불이 내 발등의 불'이 된 것이다. 이제 나는 선도자(First Mover)로 나의 위치를 전환(Shift)해야 한다. 즐기고 누리는 자에게 멍석을 깔아주는 책임 있는 위치로 변한 것이다.

나는 내게 지워진 짐을 가볍게 하려고 한 수단을 생각해 냈다. 그 수단이 일전에 시행한 '설문조사'였다. 민주적 '다수의 원칙'을 의중에 두고 좀 더 느슨한 형태의 수련회를 계획했다. '2년마다 하기보다는 4년마다 하는 게 재원 마련이 더 용이하지 않겠는가'라는 영민한 계산이 깔렸었다.(물론 이면에는 더 근본적인 변화의 갈망이 있었지만, 이 글의 흐름이 아니므로 생략함) 그리고 결과는 내 의도대로 그렇게 하자(매 4년)는 응답이 더 많았다. 나는 내심 흐뭇했다. 2년마다 수련회를 하는 것보다는 덜 시달릴 것이라는 계산을 하면서. 나의 수준은 오천 명의 장정을 빈들에 놓고 계산해 낸 빌립의 수준, 그것이었다.

 

축사와 분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조더히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었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하였으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믿음의 세계가 '오병이어 기적'이다. 예수님은 먹을 것이 없어 군중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상식 대신에 사람들을 빈들에 앉게 하셨고, 빈약한 먹거리가 떨어질까 염려하여 인색하게 나눠준게 아니고 배부를 만큼 주셨으며, 결과는 장정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 남는 풍성함이 있었다.

설문지를 통해 도출한 다수의겸을 가지고 4년마다 수련회를 개최하려고 야심차게 밀고 나가려는 나의 영민한 계산에 제동이 걸렸다. 비록 소수의견이라도 배려하려는 이동휘 목사님의 깊은 뜻이 빌립 같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다수원칙이란, 민주적 합리성을 가지고 반대 관점에 있는 민중의 입을 막아 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정치적인 동력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소자(少者) 하나라도 잃지 않고 안고 가고자 하는 어버이 마음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런 어버이 같은 마음이 4년이란 다수적 민주적인 입장에서 기존 2년, 어버이의 입장으로 환원된 배경이다. 가지고 있는 재원이 충분치 않아 계산해서 돌려보내고자 하는 본부장과 계산 없이 무리를 빈들 잔디에 앉게 하여 먹이고자 하는 이동휘 대표이사님과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났다. 어떤 경우도 제사를 뒷전으로 하고 잿밥에 우리의 눈을 돌려 우리의 본질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강한 믿음선교의 의지로 와 닿았다. 바우리는 이런 양식을 먹고 지금까지 지내왔고, 선교완정을 이룰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안드레의 손에 들려진 하찮은 오병이어

(여기 한 아이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지만,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유시장의 원리는 수요와 공급에 의한 법칙으로 유통된다. 수요는 열 개 인데 공급이 한 두 개뿐이라면 다분히 힘의 균형에 따른 불공정거래가 판을 칠 게 분명하다. 배고픈 장정 오천 명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물고기 2마리와 보리 떡 5개는 문자 그대로 어쭙잖은 어린아이 끼니에 불과하다. 안드레가 그 소량의 음식을 어린이에게서 찾아 예수님 앞에 갖다 놓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깊다. 우리 가운데 누가 이런 하찮은 거라도 어린아이(가장 보잘것없고, 기대할 수 없는 자)에게서 먹을 것을 가져다 드릴 것인가? 비록 이 많은 군중을 먹이기에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신반의를 하면서도 작은 믿음의 행동이 필요할 때다. 적은 거라고 멸시하지 말자. 그 적은 것이 분배될 때 그 많은 군중을 먹였다. 소자(교회, 개인)들이 내놓은 오병이어는 반드시 예수님의 손에 들려져서 축사를 받고 떼어질 것이다. 그 분배된 떡은 아무리 많은 군중도 먹일 수 있다는 산 증거다. 그것도 겨우 채우는 정도가 아니라, 쓰고 남을 정도의 풍성함이다. 이를 위해 작은 헌금이라도 자기의 것을 바칠 때 오병이어의 기적은 오늘에도 재생되고 확대된다. 우리 함께 이번 수련회를 기대해보자. 오직 제사에 마음을 쏟으면 잿밥은 따라온다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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