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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나의 크로노스와 하나님의 카이로스 사이에서 | 김태현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16.11.01 19: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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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본부장 칼럼
나의 크로노스와 하나님의 카이로스 사이에서
김태현 선교사
(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올해도 마지막 두 달을 남겨두고 있다. 바울선교회 회지(11, 12월호) 칼럼을 준비하면서 실감한 사실이다. 올해 초 시작이라는 찰나(刹那)가 벌써 우리의 기억이 되다니, 세월의 여류(如流)를 절감한다. 기실(其實), 우리가 만든 연대적(chronological) 시간이 우리를 구속(拘束)할 뿐인데도, 살아가는 동안 시간의 흐름에 대하여 민감하게 된다. 우리의 경험에서 기억되는 시간은 언제나 순간(Momentum)에서 어느새 과거로 밀려나고 만다. 우리 인생은 시간이라는 씨줄과 공간이라는 날줄이 만나는 지점에서 존재한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늙음을 경험하기도 하고 인생의 낭비를 후회하기도 한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만물은 자신의 정해진 운명의 시간이 지나면 모루 시들어버린다. 우리의 자각(自覺)과는 관계없이 우리의 시간은 한 순간에 저만치 가버린다.

 

그리스어에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는 ‘크로노스(χρόνος)’와 ‘카이로스(Καιρός)’가 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이면, ‘크로노스’는 시간의 경과나 과정을 나타내는 수평적(horizontal) 혹은 직선적인(linear) 시간의 개념을 지닌 말이다. 즉, 크로노스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객관적인 시간,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을 말한다. 반면, ‘카이로스’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때나, 기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나타내는 수직적(vertical)인 의미를 지닌 말이다. 즉, 하나님이 개입하는 결정적이며 질적인 시간,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시간, 현재적 영원한 시간(eternal now or time in eternity)을 ‘카이로스’라고 부른다(Wikipedia 참조). 그러므로 크로노스는 우리(나)의 시공간적 시간으로,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경륜적 시간으로 이해하면서 이번 칼럼을 연다.

 

나의 크로노스는 내 앞에 놓인 현실이다. 그리고 그 크로노스는 자기의 신앙적 인식의 폭에 따라 그 표현의 윤곽이 그려진다. 같은 환경에서도 ‘빌어먹을 세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살만한 세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반면에 카이로스적 시간은 나의 인식이나 의지에 상관없이 전적으로 위에 계신 분의 뜻을 반영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예를 들면, 잘 믿는 행복한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애를 낳고 보니 이 젊은 부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심한 중증 장애아다. 이게 이 부부에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신실한 부부가 경험하고 있는 크로노스이다. 그렇지만, 신앙 좋은 이 부부도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왜? 왜? 왜? 하필 우리냐(Why me?)”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도저히 이 부부는 그들의 크로노스적 시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하늘(카이로스 영역)로 끌어올려 나온 답은 현재 직면한 현실(크로노스 영역)과는 아주 달랐다. 그 답은 이렇다. “ 내가 그 아이를 보낼 집을 두루 찾다가 보낼 데가 없더라. 그래서 신실한 종인 너희에게 보냈다.” 이게 카이로스 영역이다. 주님의 나라가 임한 영역(realm)이다.

 

인간사의 모든 사건에서 우리는 이 두 이야기를 발견하고 말할 수 있다.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 따라 우리의 해석과 그 결과로 오는 누림은 천국과 지옥이다. 사람을 이렇게 보면 영광스럽고, 저렇게 보면 비참하다. 선교사가 이 나이가 되도록 집도 절도 없이 떠돌이 생활한다고 생각하면 순간 처량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쩌다 자녀들을 데리고 고국을 방문할 때면 문뜩 시험에 들 때가 있다. 식솔(食率)들을 데리고 마땅히 거할 곳이 없다. 결국, 좌불안석(坐不安席)하다가 선교지로 돌아온 경험을 우리네 판에서는 흔히 경험하는 일이다. 우리의 믿음의 강도에 따라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사이를 선택적으로 왕래할 때가 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의 현실(크로노스)은 녹록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하나를 선택할 문제가 아니고 퍼즐을 맞추듯 두 세계를 조합하여 하나의 다른 신성한 세계(카이로스)로 참여하는 것이다. 한편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세상에서 여전히 선교지에서 일할 수 있고, 먹을 것이 있으며, 사랑할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 얼마나 행복한가! 믿음은 생각을 불러일으켜서 언어로 표출한다. 이때 불행을 표현할 수도, 행복을 표현할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크로노스적 시간을 가지고 얼마나 풍성하게 하늘의 카이로스로 해석하고 엮어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질이 결정되고 하늘의 뜻을 수행하도록 이끈다. 시편 찬양의 내용은 모두가 어둡고 희미한 땅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늘의 뜻을 표현하는 감사와 찬양들이다. 땅을 바라보고 땅의 이야기들을 표현할 때는 현실에서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나를 에워싸지만, 그것을 하늘로 끌고 올라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때 묻은 세탁물을 세탁할 때 비로소 하늘의 표현들이 쏟아지게 된다. 땅에 살지만, 하늘의 사람으로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라고 반문하셨는데, ‘믿어지지 않던 하늘의 일’이 믿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아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올해도 우리의 크로노스적 시간은 여전히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고, 이내 흘러간다. 우리 역사의 선상에 있는 유수(流水)와 같은 크로노스를 하나님의 카이로스적 질로 바꾸어 삶의 윤택한 고백이 선교적 삶으로 표현되기를 간절히 갈망한다. 그리하여 땅에 살지만, 하늘의 사람으로, 육신을 입고 있지만, 영의 사람으로, 세상에 살지만, 천국 백성으로, 신성한 언어를 통한 카이로스적 섭리가 우리의 선교적 실행에서 감사와 찬양이 쉴 새 없이 표현되기를 기원한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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