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권역 | 에티오피아  / Ethiopia

에티오피아 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

 

이형기 이은애 선교사

 


 

 

에티오피아 국기는 3색 바탕에 가운데 둥근 청색과 원과 그 안에 별이 그려진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장 속의 청색은 평화를, 별은 다양성과 일치를, 노란색의 광선은 번영을 상징한다. 바탕의 초록색은 땅을, 노랑색은 평화와 희망, 빨강색은 힘을 상징한다 현재 국기는 1996년 확정되어 사용하고 있으며 그 이전에는 국기 가운데 동그란 문장대신 유다의 사자가 사용되었다. 또한 에티오피아 국기는 아프리카 다른 나라 국기의 모델이 되었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이 유럽의 식민지로 있던 무렵에는 국기가 없었고 2차대전 후 독립하면서 에티오피아 국기를 기초로 하여 국기를 만들었다. 초록, 노랑, 빨강의 3색을 범아프리카 색이라 부르기도 한다.

 

1. 국가 개요

국명: 에티오피아 연방 민주 공화국(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

인구: 96,633,458 (2014/세계 14위)

수도: 아디스 아베바(Addis Abeba)

면적: 1,104,300 sq km(한반도의 5.5배/세계 27위)

민족: 오로모(34.5%), 암하라(26.9%), 소말리(6.2%), 티그라이(6.1%), 시다마(4%), 구라게(2.5%), 웨라이타(2.3%), 하디야( 1.7%), 아파르(1.7%), 기타(14.1%)

기후: 고원지대는 고산기후로 연중 기온변화가 적음(평균 16℃~22℃), 저지대는 열대기후로 고온 다습하다. 우기와 건기의 길이(장단)는 지역에 따라 다르나, 대체로 4기로 분류한다. 온건기(Bega): 4월~5월, 대우기(Kiremt): 6월~9월, 냉건기(Meher): 10월~1월, 소우기(Belg):2월~3월에 해당한다. 연평균 강우량은 1,000~1,500㎜ 이나, 지역에 따라 편차가 극심하며, 대부분 강우량이 6~9월 우기에 집중된다.

언어: 86개 부족언어가 있음. 암하라어(국가공식언어) 29.3%, 오로모어(오로미야주 공식업무언어) 33.8 %, 소말리어(수말레주 공식업무언어) 6.2%, 티그라얀(티그레이주 공식업무언어) 5.9%, 시다모(4%), 월라이타(2.2%), 구라게그나(2%), 기타(16.6%), 영어(학교에서 가르치는 주 외국어)- 2007년 조사자료

종교: 에티오피아 정교회(43.5%), 이슬람(33.9%), 기독교(18.6%/순수 기독교는 10% 정도), 기타(4%)-2007년 조사 자료이며 현재 정교회 숫자는 줄어드는 반면 이슬람교는 그 수가 증가하여 40%~45%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위치: 아프리카 대륙 가장 동쪽 돌출부인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으로 에리트레아, 동쪽으로 지부티와 소말리아, 남쪽으로 케냐, 서쪽으로 수단에 접하고 있고 해안선은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다.

 

2. 에티오피아 역사

기원전 1000년,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 사이에서 낳은 아들 메넬리크 1세가 북에티오피아로 이주하여 황제가 된 것이 에티오피아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에는 발원한 도시의 이름을 따 악숨 제국으로 불렸다. 이후, 에티오피아 제국이 되었으며 1974년 쿠데타로 군주제가 폐지될 때까지 존재했다.

에티오피아 고원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문명 중 이집트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고유한 문자와 국가체제를 유지해 왔다. 19세기에는 이집트, 이탈리아의 침략까지 막아내어 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31년에는 입헌 군주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1936년, 이탈리아의 2차 공격에는 패배하여 황제가 망명을 하기도 하였다. 1941년, 영국의 도움으로 이탈리아군을 몰아내었으며 외국으로 망명 간 황제는 복위하여 에티오피아를 재건하는 데 힘썼다. 그 후, 1952년 에리트리아와 연방을 맺었고 1962년에는 자국 영토로 병합하였다. 한국 전쟁 때는 대한민국에 병력을 지원하여 123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냈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때는 육상선수 아베베 비킬라가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74년에는 멩기스투 소령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쿠데타로 황제가 폐위되고 제정도 폐지되었다. 군부는 에티오피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선포하였고 군부의 공포정치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2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교회가 문을 닫는 등 박해를 받았다. 1987년 국민투표에 의하여 군부의 기구인 에티오피아 임시 군사 평의회(EPMAC)가 폐지되었고 멩기스투는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러나 유혈구데타, 봉기, 기근, 난민문제로 점철된 정권은 결국 반란군연합체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자유전선(EPRDF)에 의해 무너졌다. 에티오피아 내전에 패배한 멩기스투는 1991년에 대통령 직을 사임하였다. 그 이후 에티오피아는 민주화되었다. 한편, 에티오피아의 영토였던 에리트리아는 1993년에 독립하였다. 하지만 사회주의 정권에 의해 피폐해진 경제를 다시 되살려야 하는 등의 많은 일이 남아 있다.

 

3. 에티오피아 정치

에티오피아는 9개 주와 2개 행정도시(수도 Addis Ababa 및 Dire Dawa)로 구성된 연방민주공화국이다. 의회는 양원제로 인민의회 및 연방의회로 구성되나 인민 의회가 실세다.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며 실질적 국정 권한은 행정부 수반인 총리가 갖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공산정권인 멩기스투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멜레스(Meles) 정부는 종족자치에 입각한 연방주의 및 내각책임제를 근간으로 하는 신헌법을 제정, 1994년 12월 8일 제헌의회에서 확정시켰다. 사법권은 연방 최고법원에 속한다. 인민의회는 2/3 찬성으로 필요지역에 연방 고등법원 또는 1심 법원 설치가 가능하다. 인민의회는 총리의 지명으로 연방 최고법원장 및 부 법원장을 임명할 수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첫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으로 1989년 멩기스투 사회주의 정권타도를 위해 싸웠던 3개 단체가 연합 결성, 현재는 4개 단체로 구성, 현 집권 여당으로 이를 견제할 만한 야당이 사실상 부재한 상태에서 일당지배 체제 유지하고 있다. 둘째, ‘통일민주연합(CUD)’, 셋째, ‘연합에티오피아 민주전선(UEDF)’, 그리고 ‘에티오피아연방 민주연합포럼(Medrek)’ 등이 있다.

최근 정치정세를 보면 1991년 7월 반군세력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이 공산주의 정권인 멩기스투 정권을 붕괴시키고 집권, 친서방적인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i)가 과도정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최대 종족인 오모로족 및 암하라족 일부가 중심이 된 반정부 단체가 불참한 가운데 실시된 총선에서(95. 5. 7) 멜레스(Meles) 과도정부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EPRDF’가 압승, 95년 8월 22일 에티오피아 연방민주공화국 출범, 멜레스(Meles) 과도정부 대통령이 총리로 취임했다. 1998년 5월~2000년 6월 간 에리트리아와 전쟁을 겪은 후 2000년 12월 평화협정에 서명하였으나 에리트리아측과 국경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2000년 12월 총선을 통하여 멜레스(Meles) 총리가 재집권한다. 2001년 4월 학내 민주화 요구에서 시발된 학생시위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발전한 바 있으며, 멜레스(Meles) 수상에 반대하는 전임 네가소(Negasso) 대통령의 사임(2001. 6), 알마즈 메코(Almaz Meko) 연방의회(상원) 의장의 미국 망명(2001. 8) 등의 일련의 정치불안 사태가 발생하였다. 2001년 10월 기르마(Girma) 대통령이 취임하고 대규모 정부조직 개편 및 개각을 단행하여 멜레스(Meles) 총리의 안정적인 권력기반을 재확인, 국내적으로 민주주의 및 경제발전에 주력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이라크전 관련 대미 영공 통과 및 기지 사용권 제공 등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과의 협조체제를 공고히 추진했으며 아울러 대외원조에 힘입어 당면한 가뭄 등 재난극복 및 빈곤 퇴치에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집권 중심세력은 소수종족인 티그레이족으로 이에 저항하는 오로모 해방전선(OLF)과 야당 및 학생 등의 반정부 활동, 만성적 기근 및 경제체제 개혁 실패 등으로 정국 불안이 심화되었는데 특히 2003년 가뭄으로 인한 흉작으로 약 1,500만 명이 기아상태에 놓였으며, 국제사회의 식량원조로 겨우 연명하였다. 2003년 12월 서부 국경지역인 감벨라(Gambela) 지역에서 토지와 거주권 문제를 둘러싼 종족간의 갈등으로 수백 명이 사망하는 유혈충돌 사태가 발생, 정부군과 경찰에 의해 질서가 회복되었으나 아직도 종족간 반목과 갈등이 심하여 폭동 재발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2004년 1월에는 아디스아바바 및 오로모를 중심으로 대규모 학생시위가 발생하는 등 종족간 분쟁 및 민주화 요구 움직임이 지속, 2005년 제3차 총선 이후 야당측의 부정 투ㆍ개표 주장으로 야당 및 대학생 등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수도에서 40명이 사망하고 100여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2010년 5월 제4차 총선을 위한 선거 운동 시기부터 주요 야당 후보들이 살해당하고 폭탄 테러가 일어나는 등 긴장된 분위기였으나 투표당일은 매우 평온했으며 투표 참여율도 매우 높아 EU 및 AU 참관인단의 평이 긍정적인 편이었다. 이번 총선을 계기로, 현 총리는 총리직을 사퇴할 의사가 있다고 밝힌 바 있으나 현재로서 야당이 정치적으로 매우 약하고 여당내에서도 현 멜레스(Meles Zenawi) 총리를 교체할 인물이 없다는 것이 다수 평가이며, 당내에서 금번 총선에서 재차 승리할 경우 매년 각료급 인사들을 신세대(young blood)로 교체하고 2015년 마지막으로 총리를 교체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2010년 10월 멜레스 총리로 취임함으로써 4선 임기가 개시되었으나 2012년 9월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하일레마리암(Hailemariam)에 의해 총리직이 승계되었다.

현 정국 불안요인들을 보면 OLF(오로모 해방전선) 등은 에리트리아 분리 독립 허용, 종족에 근거한 지방 분권주의 채택 및 소수 종족인 티그레이족에의 권력 집중 등에 반발, 대정부 무력 투쟁이 전개 중이다. 현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표출, 2005년 제3차 총선에서 수도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야당이 선전하고, 특히 수도에서 야당이 압승하였다. 2011년 1일 아디스 아바바, 지방 도시에서 발생한 반정부 시위과정에서 경찰 등 보안국의 발포로 5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하였으며, 1만 명 이상의 야당인사 및 시위 혐의자가 체포되었다. 2008년 2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국경지역의 분쟁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교착 상태이며 현재까지의 모든 외교적 노력은 실패한 상태이며 정국불안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4. 에티오피와 경제

에티오피아 고원은 풍화된 현무암 토양으로 농경에 적합하여 고대부터 데후, 멘세데 등의 농작물이 재배되어왔다. 그러나 고원이 깊은 협곡으로 분단되어 있어 유통경제는 발달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농민이 자급자족적인 농업을 영위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중요한 것은 고원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야생(일부는 재배)의 커피이다. 남부는 커피의 원산지로 커피의 맛과 향기가 뛰어나다. 이곳에서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하여 반출된 커피가 모카항(港)에서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기 때문에 커피의 원산지가 아라비아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고원 하부의 사막에 가까운 지역에서 대량으로 방목되는 소ㆍ양의 가죽도 주요 수출품이며, 최근에는 육류도 수출하고 있다. 땅(土)의 대부분이 현무암과 습곡작용을 받지 않은 중생대의 두꺼운 층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광물자원은 풍부하지 못하다. 식량자급을 위해 1995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하였다. 에티오피아는 Sub-Sahara 아프리카 국가 중 두 번째 인구대국이며 1인당 국민소득 500불에 미치지 못하는 세계 최빈국(LDCS)의 하나로 오랜 내전 및 만성적인 가뭄, 높은 인구증가율(3.3%) 등으로 경제가 전반적으로 어려운 실정이다. 1991년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Meles 정부는 1992년 신경제정책을 채택, 공기업사유화, 적극적인 해외투자유치 노력 등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고 서방과 경제협력을 강화하여 오고 있으나, 농업중심 개발정책, 토지 국유화 유지, 금융, 유통체제 낙후와 인적자원 및 인프라 개발 미비로 경제성장이 기대보다 미흡한 상태이다. GDP 성장률은 2005년 8.7%, 2006년 10.9%, 2007년 11.1%, 2008년 11.6%, 2009년 6.8%를 달성하였으나, 물가상승률은 2005년 11.6%, 2006년 13.6%, 2007년 17.2%, 2008년 44.0%, 2009년 11%로 비교적 높은바, 최근에는 유가인상으로 물가상승이 더욱 가중되는 추세이다. 에리트리아와의 국경분쟁이 2000년 12월 평화협정 체결과 함께 일단락된 이후 원조 공여국들은 에티오피아에 대한 원조를 점차 증대하고 있는 추세로, 2001년 공적개발원조(ODA)가 약11억불에 달하였으나 매년 대폭 증가하여 2005년에는 20억 달러, 2008년에는 33억 달러에 달하는 등 외국 및 국제기구의 원조가 증가 추세이다. 그러나, 2010년 통계로 약 93억불 정도의 무역량에서 수입액이 75.2억불을 차지할 정도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아직도 신용장 개설, 통관 등 수출입 절차가 복잡하고 외환 거래가 어려워 무역금융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커피, 원피 등 1차 산품이 주요 수출품이며, 공산품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경제구조로 인해 만성적인 대폭 무역적자를 보이고 있다. 금, 동, 아연 등 광물자원이 비교적 풍부하고, 천연가스전도 2곳(매장량 4조 입방피트)이 발견되었으며, 석유매장 가능 지역도 5곳(오가덴, 아바이강, 메켈레, 감벨라, 남부 지구대)이나 되어 에티오피아 자원개발에 대한 외국업체의 관심이 높다. 최대 금광산인 네가 뎀비(Lega Dembi) 광산에 대한 20년간의 채굴권이 사우디 회사에 낙찰되었고 수단 접경의 오가덴 지역 천연가스 탐사가 말리이시아계 Petoronas 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중동계 회사인 SIL사가 Calub과 Hillala가스전 탐사에 15억불 규모의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광산동력부와 네덜란드 석유탐사회사 PEXCO는 2005년 10월 소말리주 오가덴 지역에서 향후 25년간 석유탐사 및 개발에 합의하였다. 산업별 비중(2009년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농업 45%, 공업 13%, 서비스업 42%를 차지하고 있다. 수도인 아디스 아바바를 보면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건축 경기가 활발하여 많은 빌딩들이 들어서고 있다. 주요 도로들은 철도건설과 도로확장 등으로 파헤쳐져 있으며 최근 5년 동안 1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인다고 한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3번째로 큰 따나 호수가 있다. 이 호수에서 시작하여 수단을 통과하여 이집트 나일강으로 흐르는데 이 호수가 실질적인 청나일의 발원지이다. 현 정부는 물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수력발전을 일으킬 큰 댐을 건설하고 있는 중이다. 댐 건설 비용은 미화로 약 47억불이며 댐이 완공되면 5,250MW의 전력을 생산할 예정이다. 이 댐 이름은 “흐다세이”이다. 그러나 지나친 해외 의존도는 오히려 자력 경제 발전을 저해하고 있으며 기술 개발 및 인재 양성에 발목을 잡고 있다.

 

5. 에티오피아 사회, 문화

사회구조를 보면 에티오피아는 민족적으로 보아 수적으로는 셈계(系)가 가장 많으나, 최상층을 이루고 있는 것은 셈계(系)와 햄계(系)의 혼합민족이다. 최하층은 흑인으로 극소수이다. 대부분의 에티오피아인(人)은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인종의 박물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종족간의 이해 대립 요소가 내재되어 있어 사회 불안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사회환경은 과거 20년간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왔는데 과반수의 인구가 빈곤 상태에 있으며 만성적인 식량부족 현실을 겪고 있는 상태이다. 정부는 이러한 열악한 사회환경을 개선시키기 위해 신경제 및 개발정책을 수립 중이며 국제기구 및 외국의 지원, 협력 하에 HIV/AIDS 및 말라리아 등 질병퇴치를 위해 적극 노력 중에 있으며 최근에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다른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달력 체계이다. 서양 달력인 고레고리안 달력과 다른 달력 체계도 정확하지 않다 하여 에티오피아 고유의 달력을 만들었고 현재도 사용 중이다. 따라서 지금 에티오피아 달력으로 2006년(서양 달력에 7년 뒤진다) 이며, 서양 달력의 아홉 번째 되는 달(9월)이 새해 첫 달이다 또 1년에는 13달이 있고 한 달에 30일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달 13월째 달은 5일(6일)밖에 없다. 또한 시간체계가 달라서 한국보다 6시간이 늦다. 개인 집이나 관공서 거의 모든 곳에서 자신들의 고유 시간 체계를 사용한다. 에티오피아인들의 주식은 ‘인제라’이며 고원지대에서만 자라는‘테프’라는 곡물로 만든다. 보리와 밀 등이 자라며 채소와 과일도 생산된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메넬리크 1세를 자신들의 시조라고 여긴다. 3000년이라는 역사 속에 솔로몬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다. 또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피식민지 경험이 없고 유일하게 문자를 가진 나라이다. 모세의 법궤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 또한 큰 자부심이다.

에티오피아인들은 한국인들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명절이나 각종 절기 때 흰색 옷을 입는 것, 어른을 공경하는 것과 윗사람에 대한 존칭어가 발달된 것, 그리고 아기를 등에 업고 키우는 것이나 짐을 머리에 이고 나르는 것, 아이들의 놀이 문화 속에서 볼 수 있는 땅따먹기, 구슬치기, 굴렁쇠 굴리기, 고무줄놀이, 자치기, 비석치기, 공기치기 등이 아주 비슷하다. 1950년 한국전쟁에 에티오피아군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면서부터 한국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1936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점령했을 당시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그 이듬해 제네바 연설에서 “한 나라가 침략을 당하면 다른 나라가 도와주어야 한다”라고 연설했다. 자신의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선뜻 도와주는 나라가 없었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던 황제는 한국이 북한으로부터 어려움에 처한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유엔의 요청을 받아들여 황실 근위병 중에서 1,200명, 1개 대대 병력 규모의 전투부대를 한국전에 파병하게 된다. 에티오피아는 현생 인류의 시조 “루시”가 발견된 나라라고 화석을 증거로 주장하고 있으며 많은 에티오피안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또 자랑스러워 한다.

 

6. 에티오피아 종교

에티오피아는 역사적 뿌리가 깊은 기독교 국가로 국민의 45%가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들이다.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비 칼케돈 계열 기독교 교회 즉,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동방 정교회의 일파이며, 멩기스투 대통령 치하에는 교회가 문을 닫고 사제들이 체포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에티오피아 정교회 이외의 기독교 교파로는 성공회와 개신교(KHC 등의 복음주의적인 교단이 대부분)가 있다. 그 외의 종교로는 이슬람교(35%)가 존재하며 기타 샤머니즘 성격의 토착 신앙도 존재한다. 현재 양 종교의 비율은 거의 반반에 해당하여 일반적으로는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도가 많은 것이 통설이나 통계 자료에 따라서는 이슬람교 신도가 기독교 신도보다 많다는 주장도 있다. 연방헌법 11조는 정교 분리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The Ethiopian Orthodox Tewahedo Church)는 1959년까지 콥트 정교회의 일부였으나 지금은 독립된 교파를 형성하고 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한 기독교 교파로 에티오피아에 4,000 ~ 4,500만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으며 규모면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비 칼케돈(AD451년 칼케톤에서 모인 제 4차 종교회의에서 결정한 ‘그리스도의 성질’에 대해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의 두 구별의 성질을 하나의 인격체 안에 지니고 있다’라는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음) 교회이다. 에티오피아에는 4세기 티레에서 온 두 형제, 즉 훗날 초대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주교가 된 성 프루멘티우스와 아이데시우스에 의해서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이들은 악숨(에티오피아 북부에 있던 강력한 왕국)의 왕 에자나의 신임을 얻어 복음을 전하도록 허락 받았다. 5세기 말경에는 단성론(그리스도가 하나의 성질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이론: Monophysitism)자들로 보이는 시리아 출신 수사 9명이 에티오피아에 수도원제도를 도입하고 성서를 게에즈어(고대 에티오피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장려했다고 한다.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들이 단성론 교리를 단죄한 뒤에도 계속 이 교리를 지지한 이집트 콥트교회를 따랐다. 7세기, 아랍 이슬람교도들의 정복으로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이웃 기독교 교회들과의 교류가 거의 끊어졌다. 그 뒤 여러 세기에 걸쳐 혼합된 여러 신조(Creed)들을 받아들였으나 예루살렘에 있는 에티오피아 수사들을 통해 바깥 기독교 세계와의 접촉을 유지했다. 12세기 이래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아부나’(아랍어로 ‘우리 아버지’ 라는 뜻)로 불리는 에티오피아 주교를 임명해 왔는데, 이집트인(人) 콥트 교회 수사만이 에티오피아 주교가 되었다. 에티오피아 주교는 에티오피아의 강력한 수도원 공동체의 원주민‘이트샤게’(대수도원장)와 대립했다. 때때로 이집트 콥트 교회의 지배를 떨쳐버리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다가 1929년에 비로소 이집트 수사를‘아부나’로 임명하는 동시에 4명의 에티오피아 수사를 보좌주교로 임명한다는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1950년에 마침내 에티오피아 원주민인 바실을 아부나에 임명했고 1959년에는 자치권을 지닌 에티오피아 총대주교구를 세웠다. 에티오피아 북부와 중부 고지대에 사는 암하라족(族)과 티그레족은 대대로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주요 신봉자들이었으며 교회의 신앙 형식들과 신조들은 암하라족의 문화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어왔다. 암하라족이 에티오피아 왕권을 장악한 시기에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국교로 선포되었고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정권의 바람벽이 되어 주었다.

1975년 에티오피아가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군인들에 의해 왕정을 폐지하고 사회주의 제도를 도입하자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해체되었고 총대주교는 추방당했으며 정교회가 소유해온 많은 토지는 몰수당했다. 정교회는 이슬람교를 비롯하여 그 나라에 있는 이웃 종교들과 동일한 위치로 전락했으며 혁명정부하에서 그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불투명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 교회는 특히 농촌지역에 광범위한 성직자 조직을 갖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 성직자들은 하느님을 경험하는 성사와 전례를 집전하는 사제들과 부제들, 그리고 성직 임명은 받지 않았지만 교회의식과 연관된 음악과 춤을 담당하고 점성가, 필사자, 마술사, 점술가 역할을 맡았으며, 정교회의 교훈을 배우는 ‘데브테라’로 구성되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하느님, 성인, 천사에 관한 기독교의 개념을 선한 영과 악한 영, 하급 귀신들에 관한 비그리스도교의 신앙과 뒤섞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독특한 문화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구약성경에 의존된 예식들로 안식일 준수, 금식행위, 고대할례의식, 성결의식 등이다. 둘째, 초대교회와는 전혀 다른 예배와 신앙의 형태들로 마리아 숭배, 천사 숭배, 성인(Saints)숭배, 성십자가 숭배, 마리아의 기적을 기록한 책을 읽는 예식, 천사와 신앙의 영웅들이 행한 기적을 믿는 신앙예식 등이다. 셋째로, 다른 정교회와는 전혀 다른 에티오피아 자체로 발전되어 온 기독교 전통문화들로 달력, 종교 페스티발(그리스도와 관련 없는 예식들로 아주 중시)과 음악과 무용 등이다.

이슬람교는 600년대부터 파급되기 시작하였는데, 현재는 총 인구의 35%-40% 이상이 이슬람교 신도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주로 동부와 남동부에 살고 있다. 중심 도시는 하러르이다. 1974년에 일어난 공산 혁명으로 정교회는 해체되고 세력이 약해졌으나 이슬람교는 오히려 세력을 넓혀 갔다. 주로 오로모, 오모트, 다나킬, 소말리족들이 믿는다.

1634년 시작된 개신교 선교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와의 불필요한 논쟁과 경쟁을 피하기 위해 정교회 내에서 사역하며 성경중심의 영적 부흥을 목표로 두었고 아울러 정교회도들이 아닌 개신교 신자들을 위한 교회 개척 및 설립을 위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정교회 내에서 성경공부를 통해 영적인 갱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고대어로 된 성경을 암하라 부족어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전략을 토대로 CMS(Church Missionary Society)등 선교단체는 정교회 내에서의 부흥을 통해 남부의 오로모 부족을 개종하고 주변 모슬렘들과 이교도들을 복음화 할 목적으로 진행했다. 1891년 동일한 선교 방향과 목적으로 SEM(Lutheran Swedish Evangelical)선교사들은 초기 선교 활동에 있어 독자적인 개신교 설립을 금하고 정교회 안에서의 선교 활동을 펼쳤지만 개신교 신앙을 가진 정교인들과 정교회인 들의 세례와 성찬식, 개인구원에 대한 신학적 차이와 갈등, 정교회 사제들의 개신교 신앙을 가진 이들에 대한 차별과 핍박, 사제들이 갖는 선교사들에 대한 경쟁심 등으로 인해 결국 독립하게 되며 후에 “에티오피아 메카니 예수스”라는 이 나라 개신교 선교단체에서 세워진 2번째로 큰 교단으로 발전한다. 처음부터 정교회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정교회 지역이 아닌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SIM(Sudan Interior Mission)은 남부 월레이타 지역에서 선교를 시작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선포하며 개종자들의 삶과 행위에 대한 철저한 변화를 요구하며 선교활동을 진행하였다. 이렇게 세워진 교회들이 후에 에티오피아에서 제일 큰 개신교 교단인 ‘깔레 헤이워트 교단’(생명의 말씀 교단)으로 성장한다. 1942년, 에티오피아 정부는 선교활동 영역을 정하게 되는데 대부분 북부 지역에 위치해 있는 정교회 지역을 ‘Closed Area’로, 남부와 남서부 지역을 ‘Open Area’로 정하여 정교회 지역이 아닌 남부와 남서부에서만 선교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혼합주의와 전통종교가 우세했고, 악령 세력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 찬 부족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이 되었고 자유와 해방을 주었다. 또한 정치적 사회적 차별을 받았던 남부와 남서부 부족들에게 자긍심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어 개신교의 부흥으로 연결되었다. 1950년부터 개신 교회의 부흥은 정교회와 정교회인들에게 위협으로 간주되어, 정교회는 정부관료들과 합세하여 선교활동을 방해하고 심지어 전도자들과 개신교 지도자들을 감옥에 투옥시키는 강한 저항을 받게 되며 이러한 핍박은 지금까지도 일어나고 있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을 “에티오피아 정교회 전통에 대한 침략” 또는 “양도둑(Sheep stealing)”등으로 불리며 부정적 이미지와 비난과 저항을 받게 되었다. 에티오피아 정부는 국가 질서 유지와 테러로부터 자유를 위해 그 어떤 전도활동도 하지 못하도록 법률로 재정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다. 유치원부터 시작된 모든 학교에서 공공 기관과 단체의 모임에서 종교적인 발언을 할 수 없게 규제하고 있다. 많은 기독교 선교 단체에서 세운 학교에서조차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법률로 규제하고 있다.

 

중보기도 요청

1. 1990년 공산주의 몰락 이후 교회는 성장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현시점을 복음전도와 제자훈련, 교회개척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에티오피아 교회들이 선교에 비전을 갖도록 기도하자.

86개 이상의 소수 종족들이 한 나라를 이루며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에티오피아 전역의 모든 종족을 복음화 하는데 교회들이 서로 협력하도록 기도하자.

교회 지도자들의 훈련을 위해 기도하자. 신학교 교육, 복음주의 신학대학 등을 통해 말씀으로 새롭게 무장되도록. 1987년 결성된 복음주의 교회 연합과 교회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성숙한 선교사들이 충원 되어지도록 기도하자. 미전도 종족에 대한 개척전도, 성경번역, 전문기술과 구제사역이 절실히 필요하다.

2. 반면 에티오피아 국교였던 정교회는 1990년 이후 정교분리를 선포하면서 일반 종교로 전락해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신흥 복음주의 교회로 사람들이 몰리자 이에 대한 위협감을 느끼고 점점 박해를 가하고 있다. 소수이지만 복음주의자들이 정교회 내에서 성장하고 있다. 정교회가 형식이 아닌 복음으로 거듭나고 새 생명과 부흥을 경험하도록 기도하자.

3. 회교도의 전진을 막아내도록 기도하자. 회교도는 마르크스주의 아래서 그들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들은 뇌물을 쓰거나 회교 사원 건축 계획으로 기독교 지역을 침투함으로써 에티오피아의 회교화를 시작하였다. 많은 회교 사원이 교회가 철폐될 때 건축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정령숭배와 정교회에서 개종한 사람들과 더불어 회교도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강한 기도운동으로 회교도 종족 가운데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하도록 기도하자. 지금까지 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은 겨우 몇백 명이다.

4. 에리트리아와의 긴장과 갈등이 해소되도록 기도하자. 남부의 맹렬한 전쟁을 피해 온 수단 난민, 에리트리아 난민이 북부지방에 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이 소망이 되도록 기도하자.

5. 청년들은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 선전에 길들여졌으며 그들에게 삶의 목적과 소망이 필요하다. 선교단체의 청년사역과 십대 사역의 확장을 위해 그리고 19개 단과대학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자. 사역자의 부족이 문제이다.

6. 문서사역이 활성화 되도록 기도하자. 집중적인 문맹퇴치운동으로 새로운 독자들이 많이 생겼으나 읽을 문서가 부족하다. 서적과 잡지의 인쇄, 보급에 부과된 제한 사항이 철폐되었으나 문서 보급을 위한 수입과 업무적인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