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권역 | 이집트  / Egypt

이집트  Arab Republic of Egypt

■ 정리 및 보고

조에스더 선교사

이집트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1. 개관

공식 국가명/이집트 아랍 공화국(Arab Republic of Egypt)
위치/아프리카의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나라로, 시나이반도를 통해 서아시아와 이어져 있다.
수도/카이로
면적/1,010,408 km²(29위) / 한반도의 약 5배
인구/101,478,581명(15위) *2021년 통계
정부형태/대통령 중심제(6년 중임제)
종교/국교는 이슬람교(약 90% 무슬림, 10% 콥트 정교회, 1% 개신교 등 기타)
언어/이집트 아랍어
민족구성/이집트인이 대다수, 소수의 베두인(시위족, 누비아족 등)
기후/고온 건조, 사막기후
화폐/이집트 파운드
환율/1EGP = 75.29원  *변동환율
GDP/일 인당 $3,600(100위 이하) *2020년 통계
시차/서울 -7시간/ GMT + 2시간
국가번호/+20

 

2. 국가 개요

성경 구약에 언급되는 ‘애굽’이라는 곳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이집트’이다. 아프리카 대륙에 자리하고 있지만, 이집트인 대부분은 본인들이 아프리카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슬람교와 아랍어를 사용하는 중동의 국가들과 연대 의식이 더 강해 중동지역의 아랍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또 나일강을 따라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서 과거 영광을 기억하며 제국의 자부심을 품고 사는 나라이다.

 

1) 인구

이집트는 1억 명이 넘는 인구로 북아프리카, 중동, 아랍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국가 경제가 좋지는 않지만, 이집트는 중동에서 중요한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잠재력을 가진 나라로 꼽힌다. 이집트 인구의 대부분은 나일강 유역에 모여 살고 있는데, 이는 사실상 나일 유역이 이집트 전역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국토 대부분은 척박한 사하라 사막에 속해있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대략 절반의 인구가 도심지에 몰려 살고 있으며, 특히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나일강 삼각지의 대도시들에 산다. 이집트는 27개의 주로 나누어져 있으며, 주들은 또다시 읍, 면과 같은 하위 행정구역들로 나뉜다.

 

2) 정치

고대 왕조시대를 지나, 로마제국, 비잔틴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후 영국의 치하에 놓였다가 1922년 독립을 하지만 여전히 영국의 통치는 받았다. 1952년 7월 22일 육군 대령 가말 압델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군주제는 종결된다. 1956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집권하면서 이집트는 공화국으로 선포하게 된다. ‘가말 압델 나세르’, ‘안와르 사다트’, ‘호스니 무바라크’, 이 3명으로 이어지는 군부 독재정치를 지나며 이집트는 사회, 경제, 인권, 교육 모든 부분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운동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이집트에서도 2011년 1월 25일, 무바라크의 폭정에 반발하여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2011년 2월 11일 이집트 시민들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 군사독재를 물러나게 하고 시민 혁명의 단기적인 목표를 성취하였다. 이후 이집트는 2012년 6월 민주적인 선거로 문민정부를 세워 무함마드 무르시가 대통령으로 집권했다. 무슬림형제단에 기반을 둔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은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을 입안하며 국민들의 기대와 신임을 잃어갔다. 무르시가 이끄는 이슬람주의 정권이 집권한 지 일 년이 지나면서 불만을 가진 다수의 시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정권 퇴출 시위를 했고 급기야는 첫 민선 대통령이 물러나고(2013년 7월) 다시 군사정권에 기반을 둔 압둘팟타흐 알시시가 대통령에 집권하게 되었다. 수많은 피를 흘린 시민혁명을 통해 이집트 국민들은 많은 기대와 요구를 가지고 의미 있는 변화들이 일어나길 바랐지만, 오히려 더 많은 실망감과 좌절을 느꼈고, 민주주의는 과거로 돌아가 버렸다. 2018년 알시시는 재임에 성공했고, 국가의 안정을 이루고 지속적 경제 발전과 사회적 정의를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3) 외교

군부가 이집트의 실권을 잡고 있어 상당수의 자원을 독점하고 정부 예산도 최우선으로 지원받고 있는 만큼, 이집트의 군대는 정치적, 실질적으로도 매우 강력하며 이집트의 정부보다도 권한이 강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미국은 정기적으로 이집트에 군사 원조를 보내고 있으며, 2015년 기준으로 무려 13억 달러나 원조해주었다. 이집트는 중동에서의 중재자로 활동한 적이 매우 많은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이다. 이집트는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들에게 지원을 하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하마스 정부와의 중재를 담당하기도 했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반미 시위도 종종 발생하나, 중동지역에서 친미 성향의 정부라 할 수 있겠다. 대한민국과는 1961년 영사급 관계를 수립하였다가 1995년 대사급 관계로 격상되었다. 북한과는 1963년 수교하였다.

 

4) 경제

이집트 경제는 크게 농업, 원유업, 천연가스 생산, 관광업, 언론업 등에 치중되어 있다. 그 외에도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유럽 등에서 최소 300만 명에 달하는 이집트인들이 해외에서 일하고 있다. 이집트의 농경지는 대체로 나일 하곡·델타·오아시스 등지에 있다. 경지 총면적은 국토의 2.3%에 불과하며, 주민의 49%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 농토에서 연간 2~3 모작으로 각종 작물을 생산한다. 단위 면적당 생산력이 매우 높으며, 경제 작물로는 면화 재배가 중심이고, 식량 작물로는 옥수수, 밀, 보리, 쌀, 콩, 과실, 사탕수수 등이 재배되고, 기타 오아시스의 관개 농업지대에서 대추야자, 기름야자 등을 생산한다.

 

2016년 중반까지 심각한 외화 부족으로 이집트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집트는 공식적으로 IMF 협정을 모색했다. 2016년 11월 11일 국제통화기금(IMF)은 이집트에 3년간 120억 달러 규모를 대출하기로 서명했다. 이로 인해 고정환율에서 변동환율로 바뀌며 이집트 파운드의 하락, 세금 상승, 국가 보조금 삭감, 물가 상승 등 어려움이 동반되어 경제적 혼란이 있었다.

 

2016년 2월 대통령 압둘팟타흐 알시시는 ‘이집트 비전 2030’을 공개하고 경제, 사회, 환경을 다양한 차원에서 발전시키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현재 새 행정 수도 건설을 위해 해외자본, 민간투자 등을 통해 경제 활성화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빈부격차, 실업률 등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 이집트의 발전과 변화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3. 성경과 이집트 역사의 관계

이집트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국가로 약 5,000여 년 전부터 나일강가에서 문명이 태동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30세기에 이르자 고대 이집트 문명은 문자, 농업, 도시화, 종교, 정부 등 모든 분야에서 동시대 타 지역에 비해 압도적인 발전을 이룩하며 풍요로운 시대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와 대 스핑크스가 세워졌으며, 멤피스, 테베, 카르나크, 왕들의 계곡과 같은 위대한 유산들을 남겼다. 이집트의 5천 년 역사를 다 설명할 수는 없으니, 간략한 사건 위주로 성경과 이집트 역사와의 연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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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콥트 정교회와 이슬람화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모든 자연의 움직임과 원리에 신들의 힘이 작용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는 여러 신을 숭배하는 다신교였다. AD65년경, 예수의 제자였던 사도 마가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첫 복음을 전파했고 이교도였던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다. 사도 마가는 이집트 교회의 첫 대주교가 되었다. 1세기경 이집트 전체에 복음이 전파되고 당시 이집트인들이 사용하던 언어인 콥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다. 현재도 콥트어 성경 사본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콥트어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언어로 이집트가 이슬람화되면서 아랍어를 사용하게 되어 콥트어는 사라지고 현재는 종교 언어로만 존재한다.]


이집트에 기독교가 부흥하던 AD451년 경, 이집트 기독교는 예수님의 신성만 인정한다는 단성론자로 누명을 쓰고 서방교회와 단절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 교구가 커지자, 초대교회의 교구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알렉산드리아 교구를 이단시했다는 이유가 있다. 그렇게 이집트 교회는 다른 초대교회들과 단절된 채 451년의 칼케톤 공의회 이후 콥트 정교회로 독자적으로 유지되어 지금까지 신앙을 지켜오고 있다.


[이집트의 어원이 그리스어 ‘아이굽토스’이고 이것이 영어로 전해져 ‘콥트’가 되었다. 따라서 당시 고대 이집트를 콥트라 불렀고 이집트교회가 콥트 정교회라 명칭하게 되었다.] 

기독교 국가였던 이집트가 어떻게 현재 이슬람 국가가 되었을까? 7세기경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가 발생했고, AD640년 아랍군대가 이집트를 침략해왔다. 당시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목의 전쟁이었지만, 이집트를 이슬람화 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아랍군대는 로마제국에 승리하고, 이집트인들에게 이슬람교로 개종을 강요했다. 개종을 하거나, 종교를 지키려면 세금을 내야 했다. 당시 이집트인 대다수가 가난했기에 세금을 낼 수가 없어 개종을 하거나, 핍박을 피해 외곽이나 산속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고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야 했다. 현재 이집트 인구의 약 90%가 이슬람교이고, 약 10%가 기독교이다. 그 10% 기독교인 중에 95%는 콥트교회이고, 소수의 개신교회와 천주교 등이 공존하고 있다.


5. 이집트 개신교 선교 역사

이집트의 개신교 선교 역사는 2명의 모라비안 사역자들과 함께 시작된다. 그중에 윌리암 하우커 박사는 1750년 이집트에서 선교를 시작하였으며, 1768년 요한 헨리던커가 그의 선교사역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잦은 병마와 다수의 악조건으로 1782년 이들의 선교사역은 막을 내리고 40년 이상 개신교 선교 역사의 공백기를 맞아야 했다. 1825년 영국 성공회는 소년들을 위한 기숙사 학교를 시작하고, 1834년에 교회를 세우고, 1840년에는 콥트교회의 허락을 받아 카이로에 6개의 성공회 교회를 세웠다. 성공회 선교사들은 아랍어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전력했다. 한편 장로교회 선교사가 시리아로 가던 중에 카이로에 잠시 들려 이집트 선교사역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내용을 미장로 교회에 보고하자, 1853년 총회가 그 제안을 수용하여 1854년에 토마스 맥킹 목사를 파송했다. 1865년에는 요한 혹 목사 부부가 이집트의 아슈트에 첫 복음 전도자로 부임받아 청소년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것은 현재 대학으로 발전했다. 1871 년 아슈트에 교회가 세워지고, 이집트인 장로와 집사가 세워졌다. 그 후 다른 여러 교회가 1870년부터 1880년에 성장하기 시작하였으나 콥트교회는 이들의 성장과 활동을 계속 반대했다. 1878년 장로교회는 공식적으로 정부에 등록되고 1880년에 11개 교회 6명의 전임 목회자가 노예 폐지에 대한 캠페인으로 이집트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44년에는 33개 교회와 19명의 사역자로 성장하였고, 1900년에는 수단에 단기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1929년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 이후 거의 모든 선교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집트 총회에서 교회와 모든 선교 활동을 관리하게 되었다. 카이로 압바시야에 있는 개신교 신학교는 역사가 거의 1세기(1868년) 이상 되었으며, 비록 규모는 작지만 목회자와 평신도들을 위한 성서와 신학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이집트에는 개신교의 여러 교단의 교회가 세워져 있다.


6. 개신교 선교의 방향

(1) 이집트에 콥트교회가 있는데 왜 선교를 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인구의 대다수가 이슬람교이고,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이슬람에서 기독교로의 개종은 금기시된다. 여전히 가족과 지역 공동체로부터의 명예살인이 있고, 종교 난민이 발생하는 곳이다. 또, 오랜 시간 콥트교회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아왔다. 콥트교인들을 향한 테러는 끊이지 않고, 많은 희생의 피를 흘렸다. 이런 상황으로 콥트교회는 전도와 선교의 개념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본인들의 신앙을 지키기에도 어려운 시간을 지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콥트교회는 개신교회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2011년 아랍의 봄 시위가 발생하자, 시민들을 돕고 나라를 위한 기도 모임이 개신교회를 중심으로 콥트교회와 함께 가지며, 이집트 교회들이 하나 됨을 이뤄가고 있다. 따라서, 개신교회는 콥트교인들이 복음으로 준비되어 전도와 선교의 방향으로 일어나도록 도와야 한다. 이집트의 콥트교회는 선교의 대상이자 아랍 무슬림 선교의 동역자라 볼 수 있다.

 

(2) 이집트 인구의 대다수가 무슬림이고 복음을 정확히 들어볼 기회가 거의 없다. 이슬람 사회는 공동체가 중요시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을 떠나 혼자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며, 그래서 대면 전도가 쉽지 않는 사회적 환경이다. 스마트 폰이 보급되고, 각종 소셜 미디어가 활용되면서, 공동체에서 개인적인 영역이 생기고 있다. 따라서, 표현할 수 없었던 종교에 대한 의문들을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개인들이 직접 찾아볼 수 있는 상황이 열린 것이다. 아랍어로 된 기독교 방송 채널이 운영되고, 각종 SNS를 통해 무슬림들과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미디어는 아랍 무슬림 선교의 중요한 통로로 사용되고 있다. 아랍어로 제작된 콘텐츠는 아랍어를 공용으로 사용하는 22개국에서 공유할 수 있다. 따라서 다양한 기독교 콘텐츠 제작이 필요한 상황인데, 이집트가 영상 제작의 적합한 환경으로 여겨져 이집트에서 미디어 사역이 활발하게 이뤄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
 
2021년 알시시 대통령은 연설에서 “종교에 대해 질문하고, 진리를 찾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전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고, 뭔가 다른 분위기의 연설문이라며, 이집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겠냐는 희망을 품고 있다. 이런 변화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기도 제목

  1. 이집트의 자연과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형상으로 회복되도록
  2. 무슬림들이 진정한 구원자가 누구인지 의문을 품고 진리를 찾아가도록
  3. 이집트 경제와 치안이 안정화되도록
  4. 이집트의 교회가 사명을 깨닫고 아랍 복음화를 위해 쓰임 받도록
  5. 미디어 사역에 필요한 현지, 한국인 동역자들을 붙여주시길
  6. 현지에 꼭 필요한 미디어 사역을 이뤄가도록
  7. 이집트에 있는 선교사님들의 안전과 건강을 지켜주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