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권역 | 튀르키예  / Türkiye

터키 공화국/Republic of Turkey

정리 및 보고

신00, 이00 선교사(터키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1. 개관

1) 일반

  • 공식 명칭: 터키공화국(Republic of Turkey)
  • 위치: 아시아 서쪽
  • 인구: 약 82,017,514명(세계 18위, 2020.7)
  • 수도: 앙카라(가장 큰 도시는 이스탄불)
  • 면적: 783,562㎢ (세계 38위, 한반도의 3.5배)
  • 종교: 이슬람교 99.8%, 기타 종교 0.2%(개신교 및 유대교 등등)
  • 민족 구성: 터키인 70~75%, 쿠르드족 19%, 소수 민족 7~12%
  • 기후: 서부지역-지중해성 기후, 동부지역-대륙성 기후
  • 언어: 터키어(공용어), 쿠르드어, 아랍어
  • 화폐: 터키 리라(TL), 1 USD = 7.36 TL(2020년 8월 30일 기준)
  • 동포 현황: 2,951명(외교부, 2019년)


2) 지리와 기후
터키는 길이 1,600㎞, 폭 800㎞의 동서로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대륙의 97%가 아시아에, 3%가 유럽에 위치하고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서쪽 에게 해, 북쪽 흑해, 남쪽에는 지중해가 있고, 북서쪽으로 마르마라해와도 맞닿아 있다. 유럽 쪽으로는 그리스, 불가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아시아 쪽으로는 시리아, 이라크, 이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 총 8개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동서로 긴 지리적 특징으로 지역에 따라 다른 기후를 보여준다.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터키의 서, 남부 해안 지방은 여름에는 고온 건조하고 겨울에는 한랭 습윤한,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이다. 터키 중부와 동부 내륙은 계절 차가 큰 대륙성 기후가 나타나고, 일부 동부 산악 지방에서는 겨울 기온이 영하 30℃에서 40℃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3) 역사

  1. BC 7000년 이전에 정착민들이 자리 잡았던 아나톨리아는 BC 1900년경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히타이트인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들은 강성한 국가를 세우고 번성하다가 BC 1200년경에 무너졌다. 그 후 프리지아인과 리디아인에게 점령되었으나 동부지역은 토착왕조인 우라르투(아르메니아) 왕국 통치 아래 남아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이 BC 6세기에 이 지역을 차지했으며, 그 이후 그리스 헬레니즘 세력권 안에 들어갔다가 BC 1세기경에 로마에 넘어갔다. 아르메니아 왕국은 양대 세력인 로마 제국(뒤의 비잔틴 제국)과 동쪽의 파르티아 제국(뒤의 사산 제국) 사이의 완충국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삼으면서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
  2. 11세기에 투르크 유목민의 한 집단인 오구즈족이 동쪽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왔다. 12세기에는 오구즈족의 일파인 카이족이 아나톨리아의 동부와 중부를 차지하고, 카이족의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왕조를 세웠다. 그들이 영토를 확장하는 초기 단계에 오스만 일족이 투르크족의 가지스(ghazis:비잔틴 제국에 대항해 싸우는 이슬람교 전사들)를 지도했다.
  3. 13~14세기 오스만족은 마침내 서부 아나톨리아와 남동부 유럽의 비잔틴 영토를 차지하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발칸 국가들을 속국으로 삼았으며, 동부 아나톨리아의 투르크멘 공국을 점령했다. 15세기에는 더 나아가 발칸 속국들을 직접 통치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유프라테스강(동쪽)과 헝가리(서쪽)까지 영토를 넓혔다. 16세기 말경에는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해 발칸 제국과 중부 유럽의 헝가리,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4. 오스만 제국은 술탄 쉴레이만 1세(1494~1566)의 통치 이후로는 정치적·행정적·재정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1718년경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에서 투르크족을 축출했으며, 러시아는 1783년에 크리미아를 합병했다.
  5. 오스만 제국은 19세기에 발칸 제국 대부분과 이집트의 통치권을 잃었다. 19세기 말에는 소수 민족과 소수 종교분파에게 지방자치를 용인했던 밀레트(비이슬람 종교자치제)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여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1908년에 젊은 투르크인들이 혁명으로 제국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발칸 제국에서의 군대와 영토 상실로 인한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6. 제1차 세계대전 중 터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 가담했다. 전후 아라비아의 여러 속주와 일부 지역을 잃었지만 격렬한 시민전쟁과 그리스와의 전쟁 결과 1923년 로잔 조약으로 지금의 국경선이 생겼고, 케말 아타튀르크를 대통령으로 한 터키 공화국이 탄생했다. 술탄제와 칼리프제는 폐지되고 아타튀르크의 지도 아래 현대화가 시작되어 점차 현대 터키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4) 정치
①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인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 이름을 헌정 받을 만큼 터키인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로 터키의 모든 관공서를 비롯한 회사와 노점에도 아타튀르크의 사진이나 어록이 걸려있을 정도이다. 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여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해체될 위기에 놓인 오스만 제국을 구해낸 전쟁 영웅이자, 터키 공화국을 설립하고 근대화된 정책을 도입해 오늘날 터키의 기초를 놓은 뛰어난 정치가이다. 아타튀르크가 펼친 강력한 정교분리, 세속주의 정책들과 문자 개혁, 여성 참정권 인정 및 여성의 교육에 힘쓰는 등의 근대화 정책들은 터키를 이슬람권 나라들 중 가장 개방적인 나라로 만들었다.

② 세속주의 정부와 이슬람 근본주의 군중과의 공존

아타튀르크의 강력한 카리스마 속에 세속주의 정책이 펼쳐졌지만 국민들의 99%가 무슬림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아타튀르크가 사망한 후 시간이 흘러가자 자연스럽게 이슬람의 정신이 정치,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슬람의 영향력이 강력해질 조짐을 보이자 아타튀르크의 정신, 케말리즘을 이어받은 직속 후계자인 군부가 세속주의 정책의 수호자로 등장한다. 군부는 1960년, 1971년, 1980년, 1997년까지 네 번의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교체시키며 케말리즘을 이어가도록 만들었다.

③ 레제프 타입 에르도안

2020년 현재 터키 공화국의 대통령인 레제프 타입 에르도안은 이스탄불 시장을 지내고 2001년 정의개발당을 창당한 뒤 2003년부터 2014년까지 총 3회 총리를 연임한다. 그 기간 중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7년 단임 간선제에서 5년 중임 직선제로 바꾸고, 2014년 첫 직선제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리고 2017년에는 의원 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바꾸는 개헌을 국민 투표를 통해 단행하고, 1년 앞당겨 시행한 2018년 대선에서 다시 당선되며 20여 년 동안 집권을 이어가게 된다. 이같이 점차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가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를 배격하며, 이슬람주의의 성향을 드러내는 정치적 행보를 걷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아타튀르크가 박물관으로 전환해 세계적인 관광지 중 한 곳이 된 아야 소피아 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되돌리는 일이었다.


이슬람화되어가는 나라에 맞서 어김없이 일어난 2016년의 쿠데타는 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 속에서 어렵지 않게 제압이 된다. 이로 인해 선포된 비상사태 기간 동안 사법, 교육, 언론 등등 여러 분야에서 수천 명이 체포되고 수만 명이 해고당한다. 비상사태가 해제된 뒤인 2020년에도 언론자유지수가 154위이고 수감언론인 수는 1위로, 언론에 대한 탄압과 심한 인터넷 검열은 여전히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말해준다.

 

5) 경제

1인당 GDP는 9,043불(세계 74위, World Bank, 2019)이고 경제 성장률은 2.6%(터키 통계청, 2018)이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의 평균 물가상승률이 8.58%(World Bank, 2017)로 최근까지도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이는 리라화 가치의 하락도 주요한 요인인데, 1달러 기준 2012년에 1.81리라에서 2020년 7.35리라까지 올라가며, 리라화의 가치가 급락하고 있다.


인구의 18.4%가 농업에 종사하지만, 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6.8%에 불과하다. 대규모의 기업농보다 소규모로 경작하며 수확하는 소농 중심이고, 농업기술과 관개시설도 낙후되어 있어 농업 생산성이 낮기 때문이다. 국가수입의 가장 큰 부분은 관광업으로 2019년도에는 4,6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왔고, 22%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나라별 방문한 관광객 수 6위, UNWTO, 2019)  이와 같은 특성으로 인해, 2020년 세계적인 COVID19 유행은 터키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리라화 가치의 하락과 함께 IMF는 2020년 터키의 GDP 성장률을 -6.1%로 예상했다.

 

6) 종교
인구의 99% 이상이 무슬림이지만 터키는 국가 종교가 없는 세속 국가로, 터키의 헌법에서는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대다수는 수니파(80~85%)이고, 15% 정도는 샤머니즘과 이슬람교의 혼합적 성격을 띠 는 알레비파로 신비주의적 성향을 띄며 무아지경의 체험을 중요시여긴다. 정통 무슬림들에게는 이단시 되는 경향이 있다. 최상위 이슬람 종교 기관은 종무국으로, 하나피 법학파의 이론을 해석하고, 터키에 등록된 모스크 75,000여 곳 활동을 관할하며, 지역과 주의 이맘을 고용하는 일을 맡고 있다.


터키 내 개신교인은 15,000명 정도로 추정되며 170여 개의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대부분은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밀 같은 대도시에 위치하고 있고, 여전히 81개의 주 중, 절반 정도에는 단 하나의 교회 공동체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된다.


2. 현황 문제

1) 테러

이스탄불, 앙카라 등 대도시들도 예외 없이 대상으로 삼으며 온 나라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테러의 위협은 2015년에서 2016년, 2017년까지 이어지다 이슬람국가(ISIS)의 몰락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동부지방과 시리아 국경지방에는 테러들이 일어나 수십 명의 목숨을 빼앗고 있다. 그중 대부분은 쿠르드족의 분리독립을 외치는 무장단체 쿠르드 노동자당(PKK)이 주관하고 있다. 1978년 창설 이후 40년 넘게 무장 독립운동을 하며 4만 명 이상의 목숨을 빼앗았고, 최근 2020년 4월 8일 디야르바크르 주에서 일어난 쿠르드노동자당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테러도 5명이 목숨을 앗았다. 또한 터키군도 이들을 최대 안보 위협 세력으로 간주하며 계속되는 소탕 작전으로 2017년에만 1,800명을 사살했다고 발표하는 등 수천 명의 쿠르드족을 사살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슬람국가와의 전쟁에서 연합군의 핵심 역할을 담당한 YPG(시리아 거주 쿠르드족의 무장단체)가 터키에서는 PKK와 동일한 테러단체로 등록되어있어,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연합군 임무 수행 후 철수하자 터키군이 YPG를 공격하며 국제적 갈등으로 번질 뻔한일도 있었다. 결국 YGP는 시리아 정부와 손을 잡고 터키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국민은 단 하나의 터키인임을 규정하며 소수민족을 인정하지 않는 정책 속에서, 터키 동남부 시리아의 접경지대는, 여전히 터키군과 무장테러단체 간의 긴장으로 인해 터키인과 쿠르드족과의 갈등이 조성되고 있는 모양새다.

 

2) 지진

터키는 세계적으로 강진이 잦은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힌다. 20세기만 해도 진도 6이 넘는 강력한 지진이 11번이나 일어났는데, 1939년 12월 26일 에르진잔에서 발생한 규모 7.8의 '에르진잔 지진' 당시에는 3만 3천 명이 사망했으며, 1999년 이즈미트에서 발생한 규모 7.4의 대지진 당시에는 2만여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2011년 10월 23일 동부 에르시스의 진도 7.2 지진으로 약 9백여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고, 최근 2020년 1월 24일에도 동부 엘라지의 진도 6.8의 지진으로 38명이 사망하고 1,600명이 부상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지진 발생 장소가 북아나톨리아 단층을 따라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어서, 1999년 대지진이 발생한 이즈미트에서 서쪽으로 100㎞ 떨어진 이스탄불(인구 1,500만)에 2030년 안에 대지진이 강타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3. 터키 선교 동향

1) 선교 현황

KWMA의 조사에 따르면 터키는 2017년까지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 10위에 있을 정도로 선교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곳이었고, 현재도 500명 넘는 선교사가 T국으로 파송 받아있고, 한국뿐만 아닌 유럽 및 미국, 호주 등지에서도 활발히 파송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에 반해 폭발적인 성장이나 가시적인 부흥이 보이지는 않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꾸준한 선교 활동의 결과로 대도시들 위주로 교회가 세워지고, 세워진 현지 교회가 타지역에 지교회를 세우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현지 지도자들도 세워지며, 그들을 중심으로 ‘터키교회연합회’를 만들어 서로의 소식과 기도 제목들을 교류하는 등 연합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터키어로 방송되는 기독교 TV 채널도 여러 채널이 존재하고, 인터넷 사이트나 유튜브, 핸드폰 어플 등을 통해 새로운 찬양과 말씀이 공유되는 등 여러 미디어를 이용한 활동들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SNS를 이용한 선교도 이루어지고 있다.

 

2) 당면 과제 및 전망

에르도안 대통령의 친이슬람 정책 중 하나로 외국 선교사들이 ‘국가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라는 명목하에 계속해서 본국으로 송환되고 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관광 거주증을 계속 연장하는 방법으로 거주하기 때문에 추방당할 때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리더쉽이 이양되기 전에 강제적으로 빠져나가다 보니 남겨진 교회에서 새로운 리더쉽이 세워지는 과정에 여러 갈등들이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외국인 선교사의 지도에만 익숙해져 있던 교회들에 현지인 지도자를 세우게 만드는 동기부여가 되고 있고, 실제로 많은 터키 교회들이 선교사가 추방당하기 전이라 할지라도 현지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 더욱 힘쓰게 되었다. 이 위기를 통해 터키 교회가 ‘받는 자’를 넘어 ‘흘려보내는 자’로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에르도안의 친이슬람 정치 행보는 부정부패로 재산을 쌓으며 권력을 잡아간다는 이미지와 맞물리며 세속주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 터키의 청년들에게 이슬람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심어주고 있다. 현지 크리스천 중 청년 비중이 높은 것은, 현지 수준의 언어 능력을 가지고, 현지 문화에 익숙한 선교 2세대들(MK)의 선교 현장 투입과 함께, 터키 선교의 미래를 밝게 해주는 요소이다.


터키의 동서 간의 간극은 지리적 차이보다 문화적 차이가 더 크다. 서쪽 에게해 연안의 지역들은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도 서구화된 모습을 많이 보이고 세속주의의 색채를 많이 띠는 것에 반해, 동쪽 내륙지방은 종교적 색채를 많이 띠며, 근본주의 이슬람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곳도 있다. 이에 따라 터키 선교 전략은 ‘터키’라는 나라를 상대로 세우기보다는 그 지역의 특색에 맞게 입체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비록 8천만 명 중 만 명에 불가한 비율이지만, 터키 내에 ‘현지인들로 이루어진 역동적인 교회’가 곳곳에 존재하는 것은 수많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온 세계에서 드려진 기도의 아름다운 결과물이고, 터키 선교의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교회에서 양육된 터키 청년들이 복음과 사랑으로 자국 땅 구석구석 누비는 날이 오기를 소망해본다.

 

4. 기도 제목

  1. 사도바울의 섬김으로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은 이 땅에 다시 한번 부흥의 불길이 타오를 수 있도록
  2. 외국 선교사들과 현지인들이 아름답게 연합하며, 더욱 많은 현지 지도자들이 세워질 수 있도록
  3. 선교사들이 추방당해 혼란 속에 있는 교회들이 더욱 하나님만 바라며 견고해질 수 있도록
  4. 동부 지역과 흑해 연안을 비롯해서 아직도 교회 공동체가 하나도 세워지지 않은 절반 가까운 지역에도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5. 여전히 거짓으로 강력하게 터키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이슬람의 영향력이 진리의 빛 되신 예수님의 복음 앞에 무너지고 진리가 세워질 수 있도록
  6. 시간이 흐를수록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리는 현 정권과 대통령이 공의의 하나님을 깨달아 사랑과 정의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도록
  7. 전체 인구의 0.1%도 미치지 못하지만 이 땅에 심겨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어두움 속에 빛이 비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