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권역 | 쿠바  / Cuba

쿠바 공화국

Republic of CUBA

정리 및 보고 임00 선교사 (쿠바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평안을 기도드립니다. 코스타리카에 거주지를 정하고 쿠바에서 사역하는 임00 선교사입니다.
6~7년 전, 쿠바에 대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눈에 띄는 자료가 거의 없었고, 또 쿠바 현지에서 현지인들은 대부분 지성인층에서조차 역사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학교 교육의 부재, 인터넷 부재 등으로 역사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문득 선교 초기에 우연히 쿠바 출판사를 방문했을 때 선물로 받았던 쿠바 교재가 생각이 나서 요약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몇 년 전 바우리에서 쿠바에 대해 요청하셨을 때에는 이 작업을 틈틈이 진행 중이었으며, 이때만 해도 인터넷 또한 극히 제한적인 자료들뿐이었습니다. 최근 바우리로부터 다시 연락을 받고 놀라웠던 것은 구글의 자료였습니다. 약 5천 명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자료들을 삽입하여 만든 현재까지의 자료가 놀라울 정도였어요.

 

그런데 제가 정리한 내용과 어떤 부분에서는 다르고 관점의 차이도 느껴져서 적어도 오리지널 쿠바 교재로 공부했고, 또 21년간 쿠바를 섬기며 지켜봐 왔던 저의 것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음을 밝힙니다. 300페이지 이상의 자료를 4~5페이지로 만드느라 좀 시간이 걸렸고, 큰 골격 중심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임00-


들어가는 문

쿠바는 지리적으로 북아메리카에 포함되지만, 역사적으로는 남아메리카로 분류되며, 면적 110,860km2에, 인구 11,210,064(수도 인구 220만 포함)명이 스페인어를 사용하며 살고 있는 섬나라다.

 

쿠바의 역사는 스페인 식민통치와 함께 시작되어, 이후 미국의 간접 통치 및 양국으로부터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이념에 근거한 사회주의 체제로의 전환이 큰 맥락을 이룬다. 그러므로 현재의 쿠바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역사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쿠바의 역사는 쿠바 정부의  반식민지와 반미적 관점이 강하게 기록되었으며, 최근 대부분의 인터넷 글들 또한 이를 토대로 한 점과 일부 오류 등으로 이 글에서는 본인이 연구한 자료와 21년간 쿠바를 관찰하고 섬겨온 관점으로 쿠바의 역사를 정리한다. 또한 카스트로 혁명 이후 약 60여 년 동안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정치, 경제, 종교와 문화는 큰 변화가 없으며, 이미 기도 서신을 통해서 소개했으므로 간략하게 언급할 것이다.
 

1. 고대 쿠바 문명과 원주민

아메리카의 고대 문명은 멕시코 유까탄 중심의 마야문명, 멕시코 전반에 퍼져 있는 아즈텍 문명과 페루 중심의 잉카문명이 큰 배경을 이룬다. 쿠바의 원주민은 B.C 4.000여 년 경부터 마자리와 레비사 강, 협곡에서 거주하였던 라스 안띠쟈스 사람들로서 15세기에 스페인에 의한 식민통치가 시작되기 전까지 쿠바에 거주하였으며, 주로 채집, 수렵과 어업에 종사하였다. 그 후 AD 700년경, 베네수엘라의 농업가들과 옹기장이들이 쿠바에 들어와 원주민들과 함께  숲에서 생활하며, 15세기까지 생산력의 근원이 된 옹기와 담배, 사탕수수(16C 이후)와 면화, 과일과 채소 등을 재배하였고 현재까지 쿠바 전반에 거주하고 있다. 

 

2. 스페인 식민통치 시대

제네바 출생, 스페인 해군 대장 크리스토발 꼴론은 동양과의 무역을 위해 서쪽으로 항해하던 중, 1492년 8월 3일, 산살바도르 섬을 거점으로 삼은 후, 1492년 10월 28일 쿠바에 도착한다. 원주민들이 쿠바 혹은 바이띠끼리라고 부르던 섬을 스페인의 후아나 왕자의 명예를 위해 후아나로 명명하였고, 12월에 원주민들이 아이티라 부르던 곳에 도착하여 그곳을 에스파뇰라로 호칭한 후, 중남미 식민통치의 거점지로 삼는다. 꼴론은 1494년~1499년 에스빠뇰라에 성곽을 건립하며 1506년 5월 20일 바자도(Ballado)에서 사망한다.

 

스페인이 에스파뇰라에 파견한 세바스띠안 데 오깜뽀는 1509년 9개월간의 쿠바 탐사 후, 스페인으로 돌아가 니꼴라스(Nicolas de Obando)를 에스빠뇰라(La Española)에 파견하며, 쿠바를 포함하여 아메리카 전역에서 금 채굴을 시도하지만, 금이 거의 없던 쿠바는 스페인으로 향하는 금 보관의 거점이 된다.

 

1510년 말~1511년 스페인, 디에고 벨라스께스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데려와 스페인의 투자와 통제하에 쿠바의 항구와 도시건축을 시작하여 약 100년에 걸쳐 쿠바 전역에는 마을과 도시가 형성된다. 이때 원주민에 대한 폭압으로 인디언들은  숲이나 인접국으로 도주하며 남은 자들은 스페인 노예로 살아간다. 스페인은 쿠바에 1503년부터 서바나 상공회(1790년까지 유지됨)를 설립하여 동·식물·노동 도구와 의식주에 필요한 물자들을 가져와 무역의 길을 열었는데, 특히 꼴론은 스페인으로부터 사탕수수를 가져와 사탕수수 농업을 시작하고, 벨라스께스는 멧돼지와 소 등을 도입하여 쿠바의 목축과 사탕수수 산업의 토대를 놓았다. 스페인은 16세기 말(1595년~1605년 사이), 제당 공장 설립으로 사탕수수 재배를 위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으며, 약 4,000명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쿠바에 들여오는데, 이것은 쿠바에서 흑인 역사의 시작이 된다.

 

스페인은 가톨릭 신앙을 식민지국의 국교로 삼아 신앙교육과 문화적 개화를 추구하였는데, 특히 위탁기관인 엔꼬미엔다를 통해 원주민 아이들을 교육하여, 스페인 가정의 고급 노예나  대리자로 보냈다. 반면  폭력과 억압, 성폭력 등 비인간적 만행이 자행되어 인디언들의 저항운동을 불러일으켰지만, 까사스 바르돌로메 같은 신부는 엔꼬미엔다의 악행에 대한 고발과 처우개선을 위한 제안으로 사령관들과 충돌하면서 인권을 보호했다. 스페인의 까를로스 3세(1759~1788년)는 계몽적 전제주의 정치를 식민지국에 시도하여 탁월한 관리들과 군사령부를 쿠바에 파견하여, 1723년 인쇄술의 도입, 1764년 첫 신문 발행, 1782년 극장, 성당, 우체국 설립과 경제연합과 라 아바나의 농·상공회의소, 프라도 건축 및 도로 확장 등을 통해 쿠바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3. 쿠바의 저항과 독립운동 

1810~1825년, 라틴 아메리카에서 독립전쟁의 영향으로 1812년 쿠바는 식민지로부터 독립과 흑인 노예들의 자유를 향한 운동이 시작된다. 특히 1820년에 휄릭스 바레라 교수는 미국 망명 중, 쿠바 신문에 청소년들의 의식 고취를 통해 학생운동의 확장에 힘썼고, 호세 안토니오 사꼬 중심의 지적인 개혁주의자들은 1829년부터 잡지를 발간하여 관세와 노예제도 철폐를 주장하며, 스페인 식민제도와 악랄함에 대한 분석, 백성을 신장시킨 문학과 신문 작업등의 혁신적인 모습으로 쿠바 국가 형성에 기여한다.

 

19세기 중반에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는 세계 설탕 가격 하락과 미국의 구매 급감으로 쿠바의 끄리죠(스페인 중심의 백인 후손, 대 농장주, 공장주 등)와 부유층이 파산하였고, 그들은 자치권과 상업적 자유, 노예제도의 점차적인 폐지를 요구했으나, 스페인은 세금과 관세를 더 높이고, 프란시스코 레르순디를 파견하여 언론, 출판과 결사의 자유를 금지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을 박탈한다. 1867년 7월 변호사 까를로스 마누엘 데 쎼스데스를 중심으로 10년 전쟁의 서막이 열리고 해방 운동은 전 동부지역으로 확장되며 1868년 10월 데마하구하의 선언문이 선포된다. 이것은 프랑스혁명의 근간이었던 자유, 평등, 박애의 원리에 영향을 받았으며, 노예제도 폐지, 언론, 출판 및 결사의 자유와 권리, 선거제도 도입, 자유무역, 부당한 세금 징수 폐지 등을 담은 것이었다.


1871년 안또니오 마세오와 막시모 고메스를 중심으로 해방군은 동부의 스페인 군대를 격파하였으나, 1873년 이그나시오 아그라몬떼의 전사와 1874년 2월 24일 해방운동의 선구자 쎄스빼데스의 스페인에 의한 죽음으로 해방군은 일시적으로 방향을 잃게 된다. 한편 막시모 고메스는 1874~1876년 동부에서의 승전에 이어 서부로의 전진을 시도하지만, 스페인 마르띠네스 깜뽀스군대에 의해 실패하여 해방군대의 꿈은 좌절되고, 1878년 2월 8일 7인의 중앙위원회가 구성되며 10일 스페인 마르띠네스 깜뽀스와 싸홍(Zajòn) 협약에 서명을 하여 10년 해방전쟁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1895년 9월 3일 호세마르티와 막시모 고메스는 몬테크리스티 성명서를 발표하여 쿠바 전역과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연대 가운데 스페인을 대항하였다. 1895년 9월 동부 히마구아주에서 공화국을 설립, 승인 후,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며 내각을 구성하고, 호세 마르티, 고메스, 안토니오 마세오를 중심으로 한 해방군은 10월 22일 동부  바라구아(Baraguà)에서 시작하여 1896년 1월 22일 서부 만뚜아(Mantua)에서 완결 시켜, 불과 90일 만에 27개 전투로 쿠바 전역에서 승전을 울리는데 그 중심에 호세 마르티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동부 산띠아고 성채에는 스페인 군대가 남아 있었다.

 

4. 미국의 신식민주의와 저항 운동 그리고 공산당 창당 

1898년 1월 쿠바에 정박 중이던 미국  메인호의 폭발로 4월 21일 스페인-미국 전쟁이 시작되며, 미국은 쿠바의 독립운동가 깔리스또 가르시아를 지지하여 마지막 스페인 요새인 동부에서 승리하여 1898년 12월 10일 국제법에 근거한 파리협약을 미국과 맺은 후 스페인은 쿠바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미국과 쿠바는 1899년 훠레이커 수정안을 체결하여  쿠바에 주둔해 있던 미국 투자자들의 소유권을 영구적으로 보장하며, 미국 투자자들은 쿠바 농장을 매입하고 각 도시의 중심부에 과일, 설탕 회사, 담배공장, 정유소, 전기, 은행 등을 세우며  쿠바의 철과 동, 마그네슘과 납 등 218개의 미네랄 채굴권을 얻는다.

 

1901년 미국과 쿠바는 유명한 플랫 수정 조약을 맺는데, 8개의 플랫 수정조항 중, 3, 6, 7, 8번은 점차적으로 쿠바의 주권보다 미국 투자자들에게 독점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이후 플랫 수정 조약에 근거하여 상업적 호혜주의의 협약(1902년 12월), 항구를 위한 임차 협약, 석탄과 항만의 기초 임차에 대한 협약(1903년 2월) 등을 통하여  쿠바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투자와 소유권, 보호를 합법화하였다. 그 결과 1905년 미국 재산가 29명의 생산물은 쿠바 사탕수수 수확의 21%를 차지했고, 1902~1903년경 미국은 쿠바 담배 수출의 90%와 미네랄 수출의 약 80%를 독점하였으며, 또한 도로 건설을 비롯, 해방 군대를 위한 명분으로 들여온 차관은 원금의 2배 이상의 이자로 1994년까지 지불하게 된다.

 

다른 한편 미군정 하의  쿠바 정부는 어용 정부로서 부정선거를 통해 집권을 하였다. 특히 마차도(Gerardo machado) 정권은 1926~1927년에 국가 총생산력의 62%를 미국 기업들에 양도하고 자신의 정권에 저항하는 부르주아 대표자들과 노동자 지도자들을 유배, 투옥, 살해하거나, 저항하는 공산당을 불법화했으며, 대학을 폐교하고 반정부 인사와 학생 등을 무차별하게 살해했다. 1908년 흑인들은 유색인종 단체를 조직하여, 인종차별금지, 무상의 교육, 8시간 노동시간 준수와 노동의 국유화 등의 요구로 저항하였는데, 미국은 미국인들의 재산과 생명보호 목적으로 해안에 미군을 정박시켰으며, 쿠바 대통령은 3,000명의 흑인과 혼혈인들의 대량 학살을 행하였다. 이것은 최초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었던 담배 노동자들의 저항운동으로 이어졌으며 다양한 부분의 노동자들과 부르쥬아들은 대통령과 미국 기업을 대항하게 된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 멕시코 혁명은 1922년 말 쿠바 대학생 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1923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념과 조직에 영향을 받은 Baliño 중심의 아바나 공산주의 단체는 소비에트 연방(Uniòn Soviètica)과 연대책임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유포(보급)에 근거한 노동조합 운동의 조직과 반미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이들은 2일 동안 진행된 쿠바 공산당 대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방향을 정하며 중앙위원을 선출하고, 1933년 공산당과 노동조합 연맹이 쿠바에서 출범한다. 변호사였던 메쟈(Mella)의 노력이 토대가 되었다.

 

5. 쿠바 혁명과 카스트로 정권 그리고 현재

1940년 선거에서 쿠바 공산당의 힘으로 바띠스따가 대통령이 되며, 1944년 라몬 그라우, 1948년 까를로서 프리오 소까리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러나 1952년 3월 선거 이전 여론에서 재선을 노린 바띠스타는 3위에 머무르자 선거 조작과 부정으로 정권을 재창출하며 1959년 혁명군에 의해 도미니카로 도주한다. 한편 1952년 선거에 후보로 나왔던 카스트로는, 1953년 산띠아고데 쿠바의 몬까다 요새를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투옥되며, 1956년 동생 라울 카스트로를 포함한 82명의 혁명 세력과, 이후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연합으로 산타클라라를 중심으로 동부와 서부로 군대를 나누어 진군하여 1958년  바띠스타 정권을 무너트리고, 1959년 1월 1일 혁명정부를 출범시킨다.

 

그 후 카스트로의 7.26 혁명 단체와 사회주의 인민당을 중심으로 통합 혁명조직(IRO)이 출범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토대로 1961년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한다. 이때 카스트로는 토지개혁, 산업 국유화, 사유 재산 금지, 곧 개인 소유의 2채 이상, 상가 2개 이상, 땅 7 핵타르 이상 등  모든 소유를 국유화한다. 또한 그는 주요 성당과 교회의 문을 닫고, 선교사들을 축출하며 모든 종교의 유입을 허용하였지만 카돌릭과 개신교인들에게는 목수와 농부 외에 직업을 허락하지 않는 간접 핍박과 함께 저항하는 가톨릭과 기독교인 수십만 명을 미국으로 추방한다. 1961년 체제 전환으로 단절된 미국과의 관계는 1962년 미사일 위기 이후 완전히 닫혔으며, 1989년 구소련의 붕괴로 원조가 끊어지고 정부독점의 시장경제는 국가 경쟁력 상실과 함께 온 국민을 고질적 가난으로 인도하였으며, 언론, 출판, 집회, 종교(기독교)의 자유를 막는다. 1959년부터 2021년 현재까지 억압과 가난에 지친 쿠바인들은 평균 하루 3명씩 목숨을 걸고 미국을 향하고 있다.

 

카스트로는 1991년 12월에 쿠바 헌법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1993년부터 쿠바인들의 미국 달러 소유와, 자영업의 제한적 허락 및 1996년부터 외국 회사의 사업 투자가 허용되었으나, 사회주의 체제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미국은 1996년 플랫 조약을 강화시키는 헬름스-버튼 법을 통하여, 미국 투자자들로부터 쿠바 정부가 몰수한 건물이나 재산권을 이용하는 외국 회사는 국제법에 따라 고도의 세금을 지불하도록 하여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였다. 미국 투자자들과 오랜 세월 가난에 지친 쿠바 대다수의 국민들은 자본주의 체제로의 변화를 요구하지만, 쿠바는 장기 독재를 유지해 주는 사회주의 체제를 고집하고 있다. 2008년 카스트로는 동생, 라울에게 정권을 넘겼으며, 라울은 2018년에 미겔 디아스까날에게 권력을 승계하며 2021년 현재 국가원수로 국가평의회 의장(입법)과 국무위원회 의장(행정)을 겸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체제 유지로 인한 국가적 고질적 가난은 지속되고 있다.  

 

나오는 문

쿠바의 역사를 스페인 식민통치와 미국의 간접 통치 그리고 혁명정권하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원주민과 아프리카 흑인, 스페인과 미국의 종교와 문화 예술  또한 쿠바의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이룬다. 종교의 예를 들면 쿠바에는 스페인 식민시기에 국가종교가 된 가톨릭 교회, 아프리카 흑인들과 함께 들어온 산떼리아(샤머니즘)과 미군정 시기에 전파된 개신교가 큰 줄기로 공존한다. 미국의 간접 통치 기간에 미국 선교사들은 교단별로 지역을 분배하여 약 10개의 신학교를 전국에 세워 복음화를 이루어 왔으나 혁명정권 이후 모든 종교를 허용하지만, 선교사들의 축출과 카톨릭, 개신교의 박해와 무신론의 교육으로 기독교는 극 감소하여 개신교는 0.4~0.5%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 이후 박해가 부분적으로 완화되고 선교사들의 왕복과 지원을 통해 버려지거나 흩어진 신학교와 교회들이 현지인들 중심으로 회복되어 2021년 현재 개신교는 15%가 되었다. 21년간 본인과 한국 선교 또한 이 역사의 한 점으로 있으나 아직도 체제의 변화가 없는 쿠바는 여전히 미지의 나라이며 복음이 선포되어야 할 ‘땅끝’이다.(행 1:8)

 

기도 제목

  1. 쿠바가 자유민주 공화국이 되고 복음의 자유가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2. 신학교 직원들과 학생들, 쿠바의 모든 교회의 안전과 영육 강건함을 위하여 
  3. 인터넷, 유튜브 스페인어권 구독자가 증가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통로가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