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살지/엡5:22-33/벧전 3:7
티벳 엄 요 셉
-글을 시작하며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가정, 이 가정을 통해 우리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은 이 땅에 거룩함과 정결함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며 다스려 나감과 그리스도의 온전하심과 완전하심을 이 세대 가운데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있어 가정이란 단지 가족의 많고 적음과 집평수나 행복의 정도로만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구원의 선물이며, 우리 삶의 영적 온도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한 가정은 예배드리는 성전만큼 중요하고 구별된 공간인 것이지요.
그러나 이미 오염된 심령들 간의 만남이니 고통이 왜 없겠습니까마는 그 정도가 심해 가정은 물론 교회에까지도 심각한 영향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가정과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너무 잘 어울리는 가정과 교회, 세상과 교회가 식별 불가 상태가 된 오늘의 이 현상은 세속화된 장치에서 쏟아져 온갖 인기 위주의 삶의 방식과 프로그램, 외모와 감각에 따르고 호소하고 긍정적 사고를 비롯한 처세술과 자기 계발이 복음을 자리를 대체함으로 상대적으로 말씀이 고갈되어 가는 가정과 교회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순식간에 닥쳤다가, 걸어서 천천히 떠나는 것이 영적 어두움입니다. 온 줄도 모르게 이미 와 있는 것이 바로 영적 어두움. 알면서도 방임하는 사소한 불화가 가정을 불행하게 하듯이, 알면서도 방임하는 사소한 모순이 우리와 성령님 사이를 서먹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호4:1,4 “지식이 없어 백성이 망한다” ,호4:16 “(말씀이 없으니)나도 너를 버려” 이렇듯 자기 자신에게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인간의 방자함을 일으키고 가정의 파멸과 예배의 경박함, 신성모독으로 이끈다는 무서운 사실 앞에서 우리는 그 원인들을 살펴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가정과 교회를 새롭게 함으로 가정을 작은 천국의 모형으로, 교회를 주의 임재의 전으로, 만민의 기도의 처소로 회복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 현실
우리에게와 우리의 가정에 말씀이 없으니 원망과 다툼이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주인 노릇을 합니다. 한국인은 신혼 초부터 자기가 대접받기 위해서는 상대의 버릇을 고쳐야만하겠다고, 기선을 잡겠다며 기싸움을 시작합니다. 교인라고 교회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야 자기가 기를 펴고 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청년이 결혼을 하면 일년 간은 (아내만을 사랑하라고) 군입대를 면제시켜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 년 동안 살다 보면 아내와 남편 서로로 인해 자기 안에 감추어진 허물과 수치가 다 드러나고 자존심이 상하고 그런 다음에야 정말 내 의지로는 사랑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닫고 주님께 맡긴 다음에 비로소 서로를 사랑할 수 있기에 이런 제도가 생기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막3:14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밖으로 내 보내 일하게 하실 때 강조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먼저 너희가 나와 함께 머물며 교제와 임재 즉 동행을 체험한 다음 전도도 하고 귀신도 좇아 내는 일들을 하게 하시는 일의 순서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과의 임재도 주님을 사모함도 없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니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방자하고 무례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견에 옳은 대로 들은 대로 행합니다. 만나면 서로 좋아 애정을 표현하지만 영적으로는 서로가 교통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한번 감정이 상하면 상대방을 원수처럼 여깁니다. 시시콜콜 따지고 밝히고 또 비난을 퍼붓습니다. 상대를 무시하고도 자기는 예배에 참여한다고, 기도하러 간다고 태연히 집을 나섭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먼저다
많은 사람이 아가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오는 삶의 방식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교제와 사랑이 없는 자기 영혼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이야 말로 정신없고 바보 같으며, 이 보다 더한 자살행위가 있을까요?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내가 사람을 의지했더니 머리 들 일이 없었는데 주님을 의지했더니 주께서 내 머리를 들어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은 그가 왕으로 섬기던 사울로부터, 또 친구처럼 여기던 방백들로부터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어리석은 애정의 결과물인 그만 짝사랑한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당한 고통은 오늘날 자녀와의 관계에 있어 짝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로부터 당하는 고통과 흡사합니다. 사실 압살롬은 이방인의 줄기에서 나온 불의의 자식으로, 압살롬의 매혹적인 외모는 백성들과 왕에게 영향을 주었고 급기야 그가 짝사랑한 아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받아 도망친바 되었고, 심지어 아내로부터도 조롱을 받기도 한 자입니다.
이런 값비싼 대가를 치러고 나서야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사람을 의지하니 그가 나를 버렸지만 내가 주를 의지하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사모하며 내게 나아오는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붙여주시는구나, 내가 사람을 의지할 때 사랑이 될 줄로 알았는데 주님을 의지하니 그제야 사람과 사랑이 되는구나? 지금까지 나는 내 의지와 욕심을 따라 온 자였구나?” 하고 그동안 잘못된 믿음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모하면 아내도 남편도 사랑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셔야 부부 사랑에 성공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인된 부부여!
“나 같은 아내가, 나 같은 신랑이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은 나보다 귀한 그 사람을 구별시켜 내게 주셨다”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 시대에 거룩한 사랑을 우리를 통해 이 시대에 나타낼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아내가 여러분의 남편이 까닭 없이 미워질 때 당신이나 나나 그리스도 앞에서 굴복되어야 할 죄인임을 깨달으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 인간의 마음으로는 인간의 사랑으로는 내 아내를 내 남편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그래서 십자가 앞에 나아가도록 도우시는 손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벧전 3:7을 보면 “아내는 남편보다 더 연약한 그릇이며 아내와 남편은 지식을 따라 동거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어서 작은 것에도 쉽게 삐지고 들뜨고 등을 돌리고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 말씀은 서로의 연약함을 무기로 삼지 말라는 뜻입니다. 상대가 잘해주면 교회 가고 봉사도 하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을 의탁치 않으셨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들은 결국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그릇, 죄인들이었기에 그렇습니다.
-상대를 용납하라
비참하리만큼 불완전한 우리의 지식과 자각만으로 자기와 이웃의 죄악됨을 헤아리는 척도로 삼으려 한다면, 이는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또 ‘되어질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혼돈이 오면 남에게는 ‘되어질’ 완전한 기준을 적용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한’ 기준을 적용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갈등과 다툼, 깨어짐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 용납하는 행위는 우리가 상대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용납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더 긴밀히 연합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보게 되기 때문이요, 다른 사람을 은혜롭게 어루만지는 이 일이 바로 하나님을 만지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지식(주의 법)이 없으며 망한다
그러면,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벧전 3:7) 함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지음은 말씀에 의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 가정의 기준은 내 감정도, 내 약한 이성도 아니고 말씀이 먼저다라는 것입니다. 서로의 존재는 상대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돕는 몽학선생이 되어야지 나의 오염된 이성이 상대를 다스리도록 맡겨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내가 남편보다 교회 프로그램이나 훈련에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 받은 지식이 많은 편입니다. 그러나 가정을 세우고 남편을 세우는 일에는 거의 적용을 하지 못합니다. 그 말씀이 역사하도록 자신을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살리고 화평케 하는 일보다 오히려 상대를 제압하는 무기로 사용되고 있어 불화가 심화되어 마침내 갈라서고 맙니다. 아내와 남편의 영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영의 이혼상태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할 기회를 차단하고 비참의 지경으로 떨어지고 말지요. 그러면서도 주의 일을 한다고 길을 나선다면 결국 마귀를 돕는 조력자가 되어 성령님을 훼방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셈입니다.
내 안에 말씀이 없이 이성을 따라 성질이 충만한 채 서로를 그리고 이웃을 품으려 한다면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의 곁에 있는 그 사람이 바로 마귀가 되게 하셔서 여러분을 깨닫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식(주의 법)을 높인 자들
다윗은 “매끄러운 돌”처럼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수단에 대해서는 “된다(yes)”, 사울의 “군복” 처럼 인간이 제공하는 수단에 대해서는 “안 된다(no)”로 대해야 합니다. 그는 여호와의 종이 되는 것이 유다의 왕이 되는 것보다 더 귀하게 여겼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를 높이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십자가에 처참히 못박았던 이 세상에 많은 위로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를 양육하느라 성경보다 이미 마음 한 구석에 우상으로 자리잡은 인터넷을 더 신뢰하는 젊은 세대를 바라보면 처방된 지침을 무시하고 자기 방식대로 약을 처방하며 치료하기를 시도하는 무지한 환자 같아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남편과 아내, 자녀는 말로서는 변화되지 않는 피조물, 따라서 그를 위해 기도하기를 멈추면 말로 깨우치려 시도합니다. 그러면 둘 다 몸은 지쳐버리고 영은 고갈되지요.
-열매는 반드시 맺힌다
“……마음에 기뻐하며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시리라”(전 11:9).
가정에서부터 교회, 삶의 현장에서 수없이 쏟아 부은 입술과 행위의 열매! 그리고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어려운 일들! 언젠가 내가 뿌려 놓았던 말의 씨앗이 자라지 않았나? 하고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면 우리는 그 미움의 영을 받게 될 것이고 만일 우리가 누구를 축복하면 하나님은 내가 축복하는 자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나에게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서로의 성숙을 채우라
엡5:29에서 부부간의 영적 성숙을 위해 모든 것을 “보양하고 돌보아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보양함”은 서로가 특히 아내가 인격을 비롯해 주의 성품으로 잘 자라기까지 따뜻하게 감싸고 돌보아 주는 그런 의미입니다 . 하나님 나라에서는 혼자 거룩하게 깨끗하게 살려는 것을 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산 자들입니다. 꼴보기 싫은 자들을 피하는 것과 미운 남편과 같이 사느니 헤어지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면 결국 악하고 게으런 자가 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한 달란트 받은 자들과 같습니다. 자기만 돌아보니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서로 힘을 돋우는 주는 것은 거룩한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은 더 큰 믿음인 것입니다.
-상대의 고통을 헤아리라
마8:10 이하의 백부장 비유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백부장이 말로써 한 믿음의 고백을 중요시하면서도 진작 그가 아끼는 하인의 고통을 자기가 당한 것처럼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주님께 아뢰는 믿음은 강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백부장의 신분이지만 하찮은 종의 고통에 동참한 자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내 종이 아파 괴로워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나이다” 우리 주님은 종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인양 괴로워하는 그의 마음을 아시고 그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백부장 안에 주님의 마음이 있음을 귀하게 보셨지요.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아내와 남편 그리고 여러분의 이웃의 고통을 헤아리며 그가 받을 저주를 돌이키려 상한 심령으로 주께 나아가는 자인지 살펴야 합니다. 남편이 그렇게도 미운가요. 그러면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그분 앞에 서십시오. 그러고는 남편에 대한 원망을 다 쏟아 내시기 바랍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마무리 하십시오. “주님 남편이 미운게 한 두 가지가 아닌데 그렇지만 그를 품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더 믿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러면 주께서 당신 안에 주님의 마음이 있음을 보시고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서 희락의 옷을 입혀주실” 주님으로 인해 남편과 주님을 축복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게 가정에서 맛보는 부활의 권능이지요. 남편의 영도 살고 내 영도 살고. 할렐루야!
-정답 바이러스를 삭제하라
자칭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바이러스는 ‘정답’ 바이러스. 이 바이러스에 노출되면 자기보다 수준이 낮은 자에게서 더 이상 배우려 하거나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고 가르치려고 집착합니다. 이렇듯 서로 사랑으로 용납하는 대신, 다른 사람을 나의 모습(내 안의 정답)대로 재창조하려 시도하는 성향은 ‘내 안의 정답 복제’ 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무시’요 인격의 ‘침해’입니다. 부부 간에도 공동체 간에도 자기 중심에 사로잡혀 단순한 차이점을 잘못된 점, 열등한 것으로 인식하여 바로잡으려 하는 것 때문에 고통과 갈등이 딸게 됩니다.
-가정은 거룩과 정결의 훈련장
이 땅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처참할 정도로 낮은 수준의 삶을 가정에서부터 살아가고 있고, 실천적 거룩에 마땅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간이 갈수록 더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참하리만큼 미미한 거룩에 만족해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전혀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지요. 하나님과 동행하지도 않으면서 하루 종일 훈련과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에 머물면서 이를 믿음으로, 은혜로 치부해버립니다. 주의 신부로서 거룩과 정결로 단장치 않는 이런 게으런 자는 밭에 씨를 뿌려놓고 추수 때까지 전혀 밭을 돌보지 않는 않으면서 한 해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농부와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자녀(교회 구성원)에게 십자가를 리더쉽 보다 더 강조하라
성경은 리더쉽보다 종의 모습을 더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가정은 물론이고 사역자의 가정 또한 ‘내 아이는 특별하다’는 의식이 강합니다. 물론 주의 모든 자녀가 모두 특별하겠지만 문제는 그 지나침에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거짓말과 무시, 다툼과 시기, 탐심은 물론 동료를 왕따시켜 놓고도 도무지 회개도 사과도 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도록 어려서부터 십자가를 지도록 하기 위해 채찍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 자녀가 버릇없는 아이로 자라면서도 여전히 그 부모는 특별하다고 여기긴다면, 이런 부모의 이격과 인격과 믿음 아래 자란 자녀에게 특별함이란 곧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그리스도를 흉내내는 이방인 같은 특별함(?)일 것입니다.
십자가 질 줄 모르는 리더에게 주께서 힘을 실어주시고 성령님께서 감화와 감동을 부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전히 모든 혹은 대부분 젊은이들이 지도자로 훈련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단체나 조직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누를 끼치는 불의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통계를 보더라도 조직 전체에 10-20%에게만 리더쉽의 은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날 뿐, 모두가 지도자가 되어 졸업할 것이라는 공공연한 주장들은.....언듯 보면 ‘전군(全軍)의 간부화’ 같은 이전 이 나라의 국방부 구호 같기도 합니다. 오직 하나남만이 이 리더쉽의 은사를 주십니다(롬12:6; 고전12:4-6). 그러나 자기 계발에 따른 지도자 훈련 과정을 통해 리더의 자격은 받았지만 리더십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과 자기를 따르지 않는 무리로 인해 갈등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리더가 아니더라도 자기 자리에서 말씀과 성령님의 감동을 따라 덕을 끼친다면 그에게 우리 주께서 기쁨의 기름을 부으시고 공통체 모두가 이로 인해 화평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먼저 종이되라
주님이 나를 보고 상대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나와 상대를 볼 줄 안다는 것은 곧 종의 태도를 취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주의 마음에 민감하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에 두시건 상관없이 예수님처럼 살도록 우리를 바꾸십니다. 다른 사람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우리의 열정이 사실은 그분의 목적을 거스르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각보다 훨씬 월등하십니다. 일터와 사역터에서 섬기느라 지쳤다하더라도 가정에 돌아와 섬김의 수건을 다시 드는 대신 예복을 입으려 시도하지 맙시다..
-먼저 된 자가 회개하라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의 저주(호9:14)가 임하였는가? 인간이 생명을 낳는 특권은 백성들이 창조주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나 성도 1000여 만을 자랑하는 한국이 전세계적으로 저출산국의 선두에 서있는 부끄러운 현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국 BBC방송이 발행하는 과학기술 전문 월간지 '포커스' 2월호는 세계 35개국을 대상으로 단테의 < 신곡 > 에 나오는 정욕·탐식·탐욕·나태·분노·시기·교만 등 7대 죄악을 많이 저지르는 국가 순위를 매겨 이같이 발표했는데, 잡지에 따르면 한국은 포르노 산업에 대한 국민 1인당 연간 지출액이 경제 수준 대비 가장 높아 '정욕' 부문 1위로 선정됐었다고 합이다. 아이는 “no”, 정욕은 “ok” . 나이 50을 넘은 중년 중에는 이런 젊은 세대를 향해 이기적이라고 종말이라고 손가락을 내밀지 모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정부의 일에 충성-한 자녀만 낳기, 두 자녀 낳기…-) “나의 길과 나의 용사의 많음을 의뢰”한 굽은 길을 따름으로 포로가 되고만 비참에서 오는 결과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말씀을 품지도 높이지 못한 채 잘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느라 제대로 된 사랑의 방식을 따라 살지 못한 지난 날의 열매인 셈이니 정작 회개해야 할 이는 필자와 같은 50대 중반을 넘어선 이들과 60대에 이른 먼저 된 이들입니다.
-깨어있는 자가 먼저 죽어야 모두가 산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시체와의 접촉을 통해 자신을 부정케 하기까지 의도적으로 자신을 더럽히면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감(왕상 17:21; 왕하 4:34-35)으로써 상대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화목케 된 사건은 그 어떤 동물 제사로도 불가능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금송아지 사건 이후의 모세도 자신의 목숨을 맡기고 중보자의 자리에 선 사실, 죽은 유두고의 몸에 밀착시킨 바울 또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인한 생명과 평안을 삶으로 대신 그려주고 있습니다. 상대(남편, 아내, 동료)를 위해 죽지 못하는 문제는 우리의 버리지 못하는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이야 누구나 있지만 버리지 못하는 자기 안의 잘못된 “정답 바이러스”가 생명과 평안을 망쳐놓습니다. 상대를 살리려 자존심을 버리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을 찾는다면 머지 앉아 우상숭배의 자리에 선 자신을 발견케 될 것입니다.
-가정이 다시 일어나야 교회가 살지
마렝고의 전장에서 나폴레옹이 오후 4시에 했던 유명한 말을 기억합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이길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다”. 나아만은 자신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를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치료를 받았습니다. 가정과 교회의 참된 치료는 믿음 안에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 모두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믿음을 지키기가 힘든 시대다’ 하고 쉬 낙심하거나 포기하려는 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믿음을 심어주시는 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가 비록 뱀에서 용이 활동하는 시대이긴 하지만 우리 주님은 뱀도 용도 다 훼파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방패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마귀를 만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