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 - 존 로스, 이수정
글·최규 선교사
한국의 선교 역사를 돌아보면 이 땅 위에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너무도 많다. 이 작은 땅에 2,956명이나 되는 많은 선교사를 보내주신 것도 그렇고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번역되어 들어온 것, 한국 최초의 교회가 선교사에 의한 것이 아닌 한국인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 등등. 그중 성경 번역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존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는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의 선교사였는데 연합 장로교회는 1862년부터 중국선교를 개시했고, 1871년부터는 산둥반도를 선교지로 삼았다. 이듬해인 1873년 존 로스는 윌리암슨 선교사로부터 토마스 목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한 소식을 듣고 감동하여 조선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조선은 서양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스는 조선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청국과 조선국의 국경이자 양국 사이의 합법적인 교역이 이루어지던 고려문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한국 상인들과 접촉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로스는 그의 처남 매킨타이어를 통해 서상륜이라는 인삼 보부상인을 만나고 그로부터 한국정세 및 한국인 발음법 등을 배웠다. 서상륜은 원래 양반으로 태어나 한문 공부도 많이 했고 중국어도 잘해 중국을 다니며 장사를 했는데 어느 날 장티푸스에 걸려 온몸이 불덩이 같은 고열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매게 되었고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지극한 병간호와 헌터(Joseph M. Hunter) 선교사에게 치료를 받고 마침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심양에서 존 로스 선교사를 도와 한국 성경 번역에 동참하여 1882년 최초의 한국어 번역 성경인 누가복음을 완성하게 된다. 그렇게 성경 번역을 도운 서상륜은 또 하나의 사명을 갖고 자신이 번역한 복음서를 안고 압록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1883년 5월 16일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소래 마을에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세우게 된다. 이후 초대 담임목사인 맥켄지 선교사의 눈물 어린 순직의 소식을 지면에 담지 못함이 아쉽다. 존 로스 선교사는 ‘최초 한글 성경’을 번역했고, 성경 번역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 성경으로 복음을 전했으며, 해외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기 전 이미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수월하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다.
이제 일본으로 건너가 보자. 일본에서는 1882년 임오군란 때 반란군에 의해 생명이 위태로운 명성왕후를 피난시킴으로 그 공을 인정받아 일본의 발달한 농업기술을 배우기 위해 신사유람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들어온 이수정이라는 조선인이 있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이미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츠다센이라는 박사를 만나 복음을 듣게 되고 신약성경도 선물로 받았는데 츠다센은 이수정에게 ‘공자의 말씀이 집안을 비추는 등불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을 비추는 빛이다’라는 말에 감동하여 개종을 결심하게 된다.
1883년 4월 29일 부활절에는 야스가와 목사와 조지 낙스(George W. Knox) 선교사의 입회하에 세례를 받았고, 이는 일본에서 거행된 조선인 최초의 세례였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간 지 7개월 만이며, 그때 그의 나이 40세였는데 비록 이수정의 세례가 이국땅에서 행해진 일이기는 했지만, 아직 조선 정부가 기독교 수용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고, 또한 그가 정부의 고급 관료였다는 사회적 정치적 신분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걸었던 것과 진배없었다. 훗날 그는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당시 기독교를 적대시하던 집권 세력에 의해 순교하게 된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이수정은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성경을 번역하라’는 하나님의 음성과 루미스 선교사의 제안으로 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그가 보기에 천주교가 조선 선교에서 실패한 것은 성경이 없는 선교를 시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이수정은 무엇보다도 성경을 조선 민족에게 주고자 했으며, 그것은 그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했다.
이수정의 성경 번역은 소위 현토성경의 형태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한문 성경에 토를 다는, 이른바 한한 성경으로 당시 한국의 식자층에 인기가 있던 방법이었다. 1883년 5월에 시작된 현토성경은 그해 6월 말까지 신약 전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수정은 현토성경이 끝난 6월 말부터 마가복음을 택하여 한글 성경 번역에 들어갔다. 이는 이듬해 4월에 완역되었고, 드디어 1885년 2월 요코하마에서 1천 부가 발행되었다.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의 출판은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에 도착하는 때를 맞춘 것이었다. 이는 조선에 선교사가 없는 것을 애석해하며 낙스 선교사에게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편지를 써줄 것을 애원하였고 응답이 없자 그가 직접 편지를 썼으면 이 편지는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라는 잡지에 실려 미국 전역에 배포가 되었는데 이 글을 읽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그는 ‘조선의 마게도냐인’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요코하마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일행은 이수정으로부터 2개월간 한국어를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4월 5일 부활절,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수정의 성경 번역이 그들을 비롯해 이후에 오는 내한 선교사들이 더 빠르고 쉽게 선교 활동을 벌일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 준 셈이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는 두 곳의 길목, 청과 일본에서 이미 성경을 번역해 놓고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세계 선교 역사에 유일한 민족, 그것은 조선의 선교 역사였고 이는 오직 조선을 사랑하여 이방인의 빛으로, 열방을 구원하기 위한 제사장적 나라로 사용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