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와 대한독립” 우리나라의 개신교 선교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너무도 많다. 지난 시간 선교사 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성경이 번역되어 선교사를 기다린 민족,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설립 이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들을 지난 시간에 다루었다. 우리나라 의 독립에 대해 많은 견해가 있겠지만 그중 선교사와 대한독립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 보고자 한다. 일본의 식민지 역사 가운데 목숨을 걸고 활동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키워낸 선교사들의 헌신을 우린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 유관순을 ****키워낸 ****선교사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는 천안 병천 출신인 데 어릴 적부터 남달리 똑똑하여 사애리시(엘리스 해먼드 샤프-Alice H. Sharp, 1871~1972) 선교사에 눈에 띄었고 그녀와 남편 선교사 로버 트 샤프(Robert A. Sharp, 1872~1906)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영명학교( 로버트 샤프는 남학생을 위한 명설학당을, 앨리스 샤프는 여학생을 위한 명선학당을 열었 는데 훗날 영명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의 영명중·고등학교의 모체가 됨)에서 공 부하고 후에 사애리시 선교사가 처음 조선에 도착했을 때 한양 에서 스크랜턴 선교사를 도와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사역했었기에 그 인연으로 이화학당 보통 과 3학년에 장학생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그 후 유관순 열사는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의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총독부의 휴 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 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었으며 일제의 교도소에서 1920년 9월 28일에 17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했다.
한편, 유관순을 교육한 샤프 선교사는 1906년 사경회 인도 차 논산의 은진 지방으로 갔다가 돌 아오는 길에 퍼붓는 진눈깨비를 피하느라 한 집에 들어갔는데 거기는 마침 상여를 보관하는 ‘곳집’이었고 며칠 전 전염병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실어 나른 상여가 보관된 곳이 었기에 그걸 만진 샤프 선교사는 장티푸스에 걸려 그만 3월 15일, 3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공주에 들어온 지 이제 2년밖에 안 된 시기였다. 부인 사애리시 선교사는 큰 충격에 빠져 명선학당을 동료 스웨어러(Wilbur C. Swearer, 1871~1916) 선 교사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떠난다. 하지만 사애리시는 2년 뒤 “남편이 하던 일을 계속하겠다” 라며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곳곳을 다니며 전도하고 교회를 세운다. 그 일을 무려 30년이 넘도 록 지속되었다. 남편 샤프 선교사 사이에 자녀가 없었던 앨리스 샤프 선교사는 유관순을 만나 부모를 설득해 유관순을 양녀로 삼았다. 그리고 유관순은 11세 때인 1913년경에 공주 영명학 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2. 김규식을 ****키워 ****낸 ****언더우드 ****그리고 ****안창호 김규식은 일제강점기 때,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명의의 탄원서를 제출하 였고, 해방 이후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수립 안에 반대하며 통일 독립 촉성회를 결성한 독립 운동가이다. 6세에 고아가 되어 언더우드 선교사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였으며 훗날 새문안교 회 장로가 되고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한편, 언더우드가 세운 ‘예수교학당’은 ‘민노아학당’ 으로 이름을 바꾸고 민노아 선교사가(Miller, Frederick S 1866~1937)3대 학장으로 취임했는데 그 당시 10대였던 도산 안창호에게 세례를 주고 선 진학문을 가르쳤으며 결혼까지 주선하여 주례 후 유학의 길을 열어 주었다. 예수교학당 시절 언더우드는 집안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려 아버지는 귀양 가고 어머니는 돌아가셔 사실상 고아가 되어 굶주림에 벽지까지 뜯어 먹었던 김규식을 만나게 되고 예수교학 당에 입학한 김규식은 숙식을 제공받으며 기독교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도산 안창호도 “배우고 싶은 사람은 우리 학교로 오시오. 먹고 자고 공부를 거저 할 수 있소”라는 밀러 선교사의 말에 이끌려 민노아학당에서 3년간 신식문물을 공부했고 기독 교인이 되고 독립운동가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안창호가 25세가 되던 190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드루선교사를(A. D. Drew 1859~1926)만나게 되는데 드루선교사는 군산에서 7년간 사역했던 의료 선교사이다. 도산 안창 호 선생이 미주에서 활발하게 해외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었던 기저에는 드루 선교사의 도움 이 있었기 때문이고 드루 선교사 없이 독립운동가요 민족지도자인 도산 안창호를 생각할 수 없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루 선교사는 그만큼 안창호 선생이 미주에서 독립운동가로 성장해 가는데 있어 든든한 기초 석이 되었고, 안창호의 후원자이자 지지자로서 그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3. 독립운동가의 ****산실 ‘상동교회’ 그리고 **‘**윌리엄 스크랜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를 길러낸 선교사들은 많이 있지만 마지막으로 소개할 선교사는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이다.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는 54세에 이화여대의 전신 이화학당을 새운 장본인으로 남편을 잃고 54세의 나이에 예일대학교와 뉴욕의대를 나온 외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와 같이 조선에 들어온 것이다. 스크랜턴은 일찍이 엘리트 양반 중심의 정동 지역을 벗어나 가난한 서민들이 몰려 사는 남대문 쪽으로 방향을 돌려 상동교회를 설립했고, 서대문 애오개 시약소를 마련해 아현교회를 시작했고, 동대문 부인 진료소에도 기도처를 마련해 동대문 교회의 시작이 이루어졌다. 상동교회가 일제 강점기에 전덕기 목사를 비롯해 이준, 이승만, 이회영, 이동녕, 박용만, 주시경, 김구 등 독립운동가들의 산실이 된 것이다. 1910년 말부터 시작된 ‘105인 사건’은 일제가 애국지사들을 한꺼번에 제거할 목적으로 날조한 대규모 항일 민족 탄압 사건이며 최대 기독교 박해 사건이었다. 기소자 123명 중 무려 92명이 기독교인이고 그들의 대부분은 신민회 회원이었다. 신민회는 상동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1907년 4월 안창호가 주도하여 결성한 기독교 항일 비밀 결사 단체인 것이다. 상동교회는 1900년대 항일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을 위한 공간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이화여자대학을 세운 스크랜턴 여사와 그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의 조선으로의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한편, 윌리엄 스크랜턴은 사역 중에 노골적인 친일 행적을 보인 감리교 감독이었던 해리스와 충돌하였다. 본인과 그의 어머니가 조선의 선교사로 들어오게 하는 도움을 주었던 해리스였지만 그의 친일 행적만큼은 감당하기 힘들어했다. 계속되는 갈등과 불화 가운데 결국 스크랜턴은 1907년 미국 선교본부에 사임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그 뒤 그의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1909년 어머니의 장례 후에도 병원 사업을 하면서 조선에 남기를 원했지만, 그마저도 사업이 수월치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결국 그는 1917년 일본 고베로 갔다. 그곳에서 미국 영사관 고문 의사로 일하면서 외국인 국제병원 의사로 봉사 하였지만 교통사고를 당하였고 투병 중에 폐렴으로 1922년 3월에 소천하였다. 그는 일본 고베 외국인 묘지에 쓸쓸히 묻히게 되었고 그의 묘가 발견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현재 한국감리교단에서 양화진으로 이장을 진행 중이라고 들었는데 이 일이 잘 되기를 기도해 본다. 본인의 나라 독립이 아닌 선교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었던 수많은 선교사의 헌신과 그 수고를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이 땅의 독립뿐만이 아니라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근대화도 선교를 빼놓고는 우리를 얘기할 수 없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고백했던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 대한민국은 수많은 선교사에게, 그들을 파송하며 기도한 나라들에게 빚을 진 것이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겸손하게 복음의 빚을 갚으며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이 민족이 되길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