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그가 함께 하심이라
-카베리 스토리
그 동안 별고 없이 은혜 가운데 잘 지내시는지요? 고국에서는 연일 메르스로 인하여 비상 상태처럼 느껴집니다. 속히 전염병이 종결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서남아IN국에 도착한 지난 4월 말부터 지금까지 날마다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하루라도 휴식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기회가 오질 않네요. 그러나 기도 덕분에 건강을 유지한 가운데 사역에 임하고 있답니다.
이번 달에는 한 자매의 이야기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간증 이야기는 서남아IN국 사회의 한 단면 또는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수의 특별한 사례라기보다는 많은 곳에서 현재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글은 서남아IN국의 가난문제, 남편의 학대, 서남아IN국 여성의 고달픈 삶, 남아선호사상, 주술행위 등등 이곳 서남아IN국에서 적지 않게 직면하는 사회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닐슨리서치가 21개국의 6500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서남아IN국 여성들이 세계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 여성의 45%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한 반면 서남아IN국 여성은 87%가 스트레스로 시달린다고 답했습니다.
청소년 시절의 머슴살이
“저는 13세에 집안의 가난으로 인하여 2년 동안 종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남의 가정 집에서 하인으로 살아야 했고, 오후에는 농지에서 온갖 노동일을 해야 했습니다. 저희 부모는 선불을 받고 저로 하여금 종살이를 하게 했습니다. 제가 2년 간의 노동을 마친 후에 부모는 주인으로부터 돈을 받아 큰 언니의 결혼 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언니의 결혼에 대해서는 저에게 일체 비밀로 했는데 그것은 제가 일을 계속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며칠 후 저는 주인에게 한두주 지난 후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집으로 보내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주인은 옷 한 벌만을 저에게 주고 저의 집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야 저는 큰 언니가 결혼을 했고, 둘째 언니도 결혼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 마을에서는 딸을 빨리 출가시키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부모는 둘째 언니의 결혼을 서둘렀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저희에게 언니 결혼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단지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저를 다시 일터로 보냈습니다. 저는 속상했고, 낙심했습니다. 다시 일하러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일하지 않으면 저희 집 식구는 모두 식량이 없이 지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가난했고 그래서 저는 일하러 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제가 집에서 유일한 수입원이었습니다. 저희 마을에서는 여자의 경우 사춘기가 되면 보살핌을 잘 받고 좋은 영양을 섭취하도록 돌보아 줍니다. 그리고 성년식을 거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는 아무도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친은 알코올중독자였고, 어머니는 낮은 보수를 받고 학교에서 일했습니다. 어머니는 번 돈을 장남만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오빠는 책임감이 부족하고 도벽이 있어 종종 훔치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보상을 요구하면 어머니는 보상을 해주곤 했습니다. 그는 가정에서 유일한 아들이었기에 어머니는 그를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그는 두 차례 남의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구덩이에 빠진 적이 있는데 어머니가 손해배상을 해주어야 했습니다. 저는 온갖 일을 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집의 아침과 점심을 준비했습니다. 온갖 집안일을 했고 9시에는 밖의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6시에 귀가한 후에도 가족을 위해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다른 집안일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밤 11시나 12시가 되어서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언니 결혼 자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두 언니들과 두 여동생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일하러 나가지도 않고 집안 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일하는 집 주인으로부터 선불을 받아 언니의 결혼을 도왔습니다. 저는 밤낮으로 일해야 했습니다. 제가 아파 쉬어야 할 때에는 어머니는 울면서 ‘네가 일하지 않으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먹고 살 수 있겠느냐?’ 말했습니다. 저는 여러모로 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오빠는 그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는다고 괴롭혔습니다. 오빠가 주선한 모든 결혼제의는 재혼이었습니다. 저는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빠는 사귀고 있는 애인이 있었는데 저희 마을 풍습에 의하면 제가 먼저 결혼한 후에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빠는 자기가 소개한 남자와 결혼하라고 압박했습니다. 그는 그 남자를 집 안으로 데리고 와서 2,3개월간 머무르게 하면서 저를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동의하지 않자 시비를 걸고 저의 옷과 소유물을 집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사람들은 저희 가족을 비방했습니다. 저희 가족은 매우 가난해서 이웃 사람들의 조롱감이 되었습니다. 부모는 저희를 결혼시킬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에 제가 언니들이 결혼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혼을 원치 않았습니다.
결혼과 남편의 학대
“그런데 오빠의 괴롭힘과 사람들의 조롱 때문에 저는 마지못해 결혼하기로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술주정뱅이였습니다. 저는 결혼하기 전날에도 일하러 갔다가 저녁에 귀가했습니다. 전통 혼례식에 따라 간소하게 혼례를 치렀습니다. 희 가정은 가난하여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지 못하고 사원에서 치렀습니다. 결혼 후 남편은 저는 구타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술을 마신 후 저를 학대하고 구박했습니다. 저는 일당을 받으며 일했습니다. 오두막집에서 살았습니다. 1년 2개월이 지나 산고가 찾아왔는데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밤새도록 진통이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6시가 되어 이웃 사람이 오토릭샤를(세 바퀴로 달리는 주요 대중교통수단) 불러 병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사내아이를 출산한 후 산후조리를 할 수 없었습니다. 6개월이나 8개월 동안 산후조리를 하는 것이 관례인데 제 스스로 아기를 씻기도 아기 옷을 직접 빨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온갖 집안일을 다 했습니다. 어머니와 언니, 여동생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남편도 곁에 없었고 다른 도회지로 일하러 가서는 두세달에 한 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사귀고 있다고 의심했습니다. 가계를 위해 돈을 요구하면 멍이 들도록 구타를 하곤 했습니다. 다음 15일 동안은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와 결혼했을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여성들과 지냈습니다. 아들이 4세가 되었을 때 남편에게 일을 그만두고 아들만 돌보고 집에 머무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담배와 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공급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동의했습니다. 저는 돈벌이를 찾아 나섰고 남편을 집에 붙들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저희 마을의 여자들과 놀아나기 시작했고, 이웃 여자와 좋아지는 것이 탄로가 났을 때 저는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제가 그 여자와 싸웠는데 남편이 저를 심히 구타했습니다. 한번은 면도칼로 저의 혀를 자르려고 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저를 심히 밀어 제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적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문과 창문을 닫고 저의 몸에 석유를 부은 후에 불을 지르려고 성냥을 찾았습니다. 의식에서 깨어나 성냥을 찾고 있는 남편을 보았고 몸에 부은 석유 냄새를 맡았습니다. 남편을 밀치고 문을 열고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아무도 저를 도와주려고 나서지 못했는데 그것은 남편의 폭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경찰서에 가서 남편의 학대에 대하여 신고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목매달아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무 소리가 없는 것을 수상히 여기고 들어와 저를 발견하고 구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절망한 나머지 어느 날 어들과 같이 독약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토해버렸고 죽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는 남편이 강제로 약을 먹였는데 그때도 토해서 살았습니다. 남편은 여러 번 저를 죽이려고 시도했습니다. 남편의 첩은 남편은 데리고 살고자 저를 대상으로 주술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주술행위가 주는 고통
어머니는 돈이 필요하면 찾아오지만 제가 어려울 때는 정작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조차 다른 사람의 주술행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부친이 소유한 토지에 탐이 난 친척들이 어머니가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주술행위를 했습니다. 저는 아픈 어머니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남편 몰래 부엌에 감추어 두었던 돈이 있어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켜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사흘 후에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병원에서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야 했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의사들이 구급차를 마련해주어 반값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지 친지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빚은 갚으라고 요구하는 채권자들이 나타나서 갚기 전에는 시신을 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마을에서 돈을 빌렸다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채권자들에게 사정을 하여 그들의 빚을 갚기로 약속하고 장례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한 달 후에 그들이 찾아와 압박을 가했습니다. 저의 부친과 형제자매는 ‘우리는 그 빚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면서 잡아뗐습니다. 오빠는 빚을 피하기 위해서 빚문서를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그러나 채권자들은 완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빚을 배로 요구했습니다. 모두 8만 루피(약 150만원)에 해당했는데 저 홀로 할부로 갚아나갔습니다. 어머니가 죽은 후 일년도 안 되어 남동생과 올케도 주술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저 역시 주술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고 남편으로 인해 시달렸습니다. 저는 저의 마을과 남편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을 사람이 제가 도시로 이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저와 아들은 작은 월세 집을 얻었고 공장에서 도우미로 일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저에게는 희망이 없어졌고 낙담했습니다. 주술행위로 온 몸에 열이 오르고 통증과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복음이 주는 자유와 평강
“때때로 저의 수명이 다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시점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 저에게 복음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교회로 서남아IN국했습니다. 교회에서 참석자 모두가 저를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종종 통증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 완전히 회복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불면증으로 시달렸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주신 평강 가운데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제가 직장을 잃어 지금은 저희 목회자의 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매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술의 악한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저와 저의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카베리(Kaveri) 자매

▲목회자의 집에 머물고 있는 카베리 자매와 아들
* 체탄 목회자가 카베리 자매의 간증을 두 시간 정도 녹음한 후에 영어로 기록하였고 그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였습니다. 현재 카베리 자매는 직장을 잃은 후에 담임 목회자인 체탄의 가정 집에서 임시로 아들과 함께 머무르고 있습니다. 자매의 아들은 현재 11세로 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중입니다. 체탄 목회자가 카베리 자매 가정의 필요를 채우고 있는 중입니다. 이들 모자(母子)를 위한 생활비와 거처를 위해서, 그리고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체탄 목회자 가정에는 모친과 자녀도 같은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2015년 6월
곽요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