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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Cambodia)

by PAUL posted Sep 0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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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 소개

캄보디아(CAMBODIA)

정리 및 보고 전준찬 차형연 선교사(캄보디아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1. 국가개요

  • 국명 : 캄보디아 왕국(Kingdom of Cambodia)
  • 위치 : 인도차이나 반도 서남부(베트남, 라오스, 태국과 접경)
  • 면적 : 반도의 약 80%, 남한의 약 1.8배, 베트남의 절반, 동서 580km, 남북 450km
  • 기후 : 고온다습한 열대몬순 기후, 20~40℃ 기온분포. 4~5월이 가장 덥고, 1월 가장 시원. 12~5월은 건기, 6~11월은 우기
  • 수도 : 프놈펜
  • 인구 : 약 15,957,223(2015)
  • 주요도시 : 프놈펜(173만명), 시하누크빌(깜뽕싸옴, 27만명), 바탐봉(100만명)
  • 화폐 : iel(리엘). 미국 달러 통용
  • 민족 : 크메르 90%, 베트남 5%, 중국 1%, 짬족 4% 등 30여 인종
  • 언어 : 메르어 지식층 및 비즈니스계를 중심으로 불어 및 영어통용, 젊은 층을 중심으로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공부에 열중, 중국인 중심으로 중국어 통용
  • 종교 : 불교, 입헌군주제, 자유민주주의
  • 입법부 : 양원제(임기 6년의 상원 61석, 임기 5년의 하원 123석)

 

2. 정치 사회 동향

 

1) 캄보디아 약사

①선사시대 및 초기 역사
 기원전 4200년경부터 선사시대의 신석기 토기 유물이 발견되고 있으며, 중국 동남쪽에서 인도차이나 반도로 이주해 온 것이라 추정된다. 메콩강 일대에서 수렵 채집 및 벼농사를 하면서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②후난(Funan) 왕국 및 첸라왕국 86-860년
 인도로부터 종교와 정치제도를 들여와 1세기경 캄보디아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후난 왕국이 건립됐다. 3세기 초 왕국의 전성기를 맞아 남쪽으로는 말레이시아, 서쪽으로는 미얀마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며 중상주의 정책을 펼쳐 인도 등의 주변국들과의 무역이 성행했다. 후난왕국으로부터 독립해 세워진 첸라 왕국은 점차 영토를 확장시켜 7세기에는 후난 왕국을 완전히 정복했으며, 이후 8세기에는 육첸라(land Chenla)와 수첸라(water Chenla)로 양분됐다.
 

③ 앙코르 왕국 802~1431년
 크메르 문명의 황금기라 불리는 앙코르 왕국은 9~13세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캄보디아라는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다. 캄보디아의 대표적 유적 앙코르왓(Angkor Wat)이나 앙코르 톰(Angkor Thom)도 앙코르 왕국의 건축물이며, 강력한 정권 하에서 문화적 독창성에 있어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14세기부터 점차 몰락해 1431년 태국에 정복당했다.

 

④ 캄보디아의 암흑기 1431~1863년
 15~19세기는 계속적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영토가 축소돼 캄보디아의 암흑기라 할 수 있다.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잦은 침략과 정복을 당했으며,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잦은 외침을 겪었다.

 

⑤ 프랑스 식민지배기 1863~1953년
 1863년 노르돔 왕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다는 조약에 서명하고 단계적으로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 1941년 프랑스 식민정부에 의해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가 왕으로 즉위하였다.

 

⑥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과 내전 1970~1975
 1954년 프랑스의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한 이후, 보수·우익·급진세력이 각각 나누어져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보이다 1966년 우익성향의 론 놀(Lon Nol)이 총선에서 승리하였다. 론 놀 수상은 왕정에 대항해 1970년 쿠데타를 일으켜 우익정부를 수립하고,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으로 국명을 개칭했다. 집권 이후에도 끊임없이 세 개의 세력이 내전을 벌이다 미군의 베트남 철수 후 론 놀은 지지세력을 잃게 되었다.

 

⑦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1975~1979년
 폴 포트의 지휘 하 공산주의 세력인 크메르 루즈는 프놈펜에 입성해 1976년 민주 캄푸치아로 국명을 개칭하고 전 국민의 강제 농촌 이주와 강제 노동이라는 극단적인 공산체제로의 회귀를 시행했다. 자본주의나 베트남을 포함한 외세와 연관된 사람은 모두 숙청의 대상으로 삼아 1976년에서 1979년까지 4년간 무려 2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무고하게 죽은 것으로 조사됐다.

 

⑧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1979~1991년
 1979년 베트남 군대와 연합해 캄푸치아 민족구국통일전선(KUFNS)는 캄보디아를 정복하고 폴 포트의 크메르 루즈를 태국 국경 근처로 쫓아냈다. 인민당의 삼린은 친베트남의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을 건립하였다. 그러자 크메르 루즈가 포함된 반베트남 3개 계파가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민주캄푸치아연합정부(CGDK)를 구성해 내전에 들어가고. 1989년 캄보디아에 주둔하던 베트남군대가 철수하자 내전은 더욱 격화됐다.

 

⑨ 캄보디아 1991~현재
 1991년 4개의 계파를 중심으로 하는 최고민족평의회(Supreme National Council)가 구성됐고 의장에는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부의장에서는 훈 센(Hun Sen)이 지명됐다. 1991년 10월 4개 정파와 19개국의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장기간에 걸친 내전은 종지부를 찍었다. 1993년 노로돔 시하누크는 왕으로 재즉위하며 입헌군주제가 시행된다. 1997년 7월 선거로 훈 센은 제2수상에서 제1수상으로 취임하고 그 이후 2013년 7월에 있었던 선거 이후로 야당과의 갈등으로 정국이 안정돼 있지 않은 상태이다. 2013년과 2014년 봉제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최저임금 인상시위가 자주 일어나 봉제공장 시설물 파괴, 비 출근 투쟁 등의 과격한 양상을 띠었다. 2015년 초 Human Right Watch의 보고서를 통해 노동자 인권문제가 제기됐고 6월까진 과격한 시위는 없었다.

 

2) 정치체제
캄보디아는 입헌군주국으로 국왕은 Throne Council에서 선출되며 종신직이다. 행정 수반은 총리이고, 하원 총선거에서 최다 득표한 다수당에서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다. 2016년 현재 프놈펜은 8개 구로 나눠져 있으며, 지방 행정조직은 24개의 주(Province), 159개 군(Srok), 1,406개 면(Commune, Khum), 1만 4,119개 촌(Phum)으로 구분되며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내무부 장관의 추천에 의해 총리가 임명한다. 현 국왕은 2004년 10월 29일에 왕위에 오른 노로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 국왕이며 총리는 훈센이다. 헌법상 캄보디아는 자유민주주의와 복수정당제도의 정책을 채택하고 캄보디아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은 행정부 및 사법부 권한이 분리된다고 규정하고 있다(제51조). 캄보디아는 국회와 상원제로 이루어진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총선은 2013년 7월 28일에 시행됐는데, 공식적으로는 여당인 CPP가 68석 야당인 CNRP가 55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부정선거 의혹이 있어 정국이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다. 다음 총선은 2018년 7월로 예정돼 있다.

 

3) 정치 이슈들

(1) 13년의 내전과 2백만의 대량학살(킬링필드)

① 크메르 공화국 시대(1970~1975) : 내전시기
 시하누크 정권의 정치적 혼란가운데,  당시의 수상며 군부 지도자였던 론 놀과 우파 쪽은 시하누크에게 큰 실망을 하게 되고 1970년 3월 17일 친미 론 놀이 시하누크의 외유 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시하누크 일파를 추방하고 크메르 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론 놀은 정권을 탈취하면서 강력한 반베트남 캠페인을 실행하여 남베트남 해방전선의 지원이 의심되는 캄보디아 거주지 내의 베트남계 주민을 박해, 학살하였다. 이어 론놀은 1970년 호치민 루트를 분쇄하기 위해 미군과 남 베트남군 전쟁에 개입하였다. 게다가 미국은 론 놀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남베트남 파견군의 일부를 캄보디아에 투입하고 반정부군 세력을 궤멸시키기 위해 1968년부터 국지적으로 행해져 오던 미국의 캄보디아 공중폭격을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을 포함한 캄보디아 전역으로 확대시켰다. 그러나 군사적 성과는 미미했고, 민간인 피해만 늘어나서 반미적이던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지가 늘어나 당시 인구 740만 명 중, 550만 명을 좌파에게 빼앗겼다. 미국은 론 놀 정권을 지원하여 크메르 루즈를 제거하기 위해 43,415회에 걸쳐 200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으며 10명의 캄푸치아인 중 1명이 미국의 폭격과 베드남들을 격퇴하기 위해 론놀이 파견한 살인부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거기에 쿠데타로 새로이 세력을 잡은 론 놀 정권도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회의 입법권을 박탈하고 5년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신문과 잡지를 폐간하고, 공공집회를 금지하고, 왕족들을 체포하였다. 하지만 1973년 3월 미국이 베트남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함으로 론 놀 세력이 크게 약해졌고 1974년 6월 학생소요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사회 각계각층에서 이에 합세함으로 정권의 유지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어 론놀은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즈가 프놈펜에 입성하여 1976년 캄보디아 민주 헌법을 공포하여 국명을 민주 캄푸차로 개칭함으로 크메르 공화국은 사라졌다. 
론 놀 정권의 반베트남 정책의 실패는 좌파인 민족주의자이며 농민개혁자들로 구성된 크메르루즈를 지지하도록 하여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 즉 인구의 1/3을 죽음에 몰아넣는 대살육의 역사를 만드는데 부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② 민주 캄푸치아 시대(1975~1978) : 대량학살의 시기
 1975년 4월 17일 폴포트가 이끄는 캄푸치아 공산당(크메르루즈)이 프놈펜에 입성할 때,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많은 시민이 길거리에 나와서 손을 흔들며 환영하였다. 이는 크메르 루즈의 입성이 오랜 전쟁과 부패한 독재정권의 종결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75.4~78.12.25일까지의 폴폿에 의한급진적 개혁정치와 1977년 옛 크메르제국의 영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여 태국 국경과 베트남 국경에서의 무력 충돌로  많은 주민들이 태국국경을 넘어 피신하면서 1979년 말까지 7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으며 기아, 질병, 중노동, 처형 등으로 약 2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본다. 
크메르 루즈의 수뇌부, 즉 프랑스유학파 공산주의자들 (폴폿, 키우삼판, 이엥사리 등)은 미국의 폭격, 론놀 정권의 부패에서 보는 미국의 영향력, 그리고 베트남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캄보디아를 지키고 옛 앙코르 왕국의 위대함을 재건하고 완전한 주권과 자립을 도모하고 싶었다. 그들은 캄보디아의 비참한 현실이 프랑스, 미국 강대국들에서 시작된 국제적 노동분배의 필연적 결과이며 도시에 의한 농촌지배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것은 캄보디아 농민들의 모든 기회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이상적인 농업공산 사회를 만들어 발전된 캄보디아를 만들고자 했는데 그 해답을 모택동의 농업주의와 문화혁명에서 찾게 되었다. 
크메르 루즈는 전 국토에 소개령을 내리고 도시민들을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발표했다. 그들은 도시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프랑스인을 비롯하여 화교, 베트남인 등 외국인의 거주지가 되어왔고 자본가, 지주, 상인, 고리대금업자, 정부관리들의 거점이 되었으므로 도시를 폐지함으로써 도시에 의한 농촌지배의 구조를 일거에 철폐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도시 소개령에는 베트남으로부터의 진정한 독립과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반베트남 감정이 묻어 있었다. 론놀의 반베트남 정책으로 약 50만 명이던 베트남인들이 20만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프놈펜에는 상당수의 베트남인이 기술자, 전문가, 서기, 소상인들로 살고 있었다. 도시 소개를 통한 인구재배치 정책은 캄보디아 거주 베트남인들을 일거에 제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크메르 루즈의 급진정책으로 화폐제도가 폐지되고, 시장, 전화, 전보시설, 가게, 사유재산, 그리고 임금노동이 사라졌다. 가족은 해체되고, 당에 의한 강제 결혼이 시행되고, 가족 단위는 1,000가구 기준 집산주의로 대체되었다. 학교는 폐쇄되고 혁명에 불필요한 80퍼센트의 서적이 폐기되었다.
폴폿의 급진 개혁정치는 저항과 반발을 초래하였다. 반공주의자인 우파 크메르 민족주의자, 극단적인 혁명정책을 반대하는 크메르루즈의 탈당자, 그리고 캄푸치아 내 베트남인들은 쿠데타를 시도하며 저항했으며 정국 불안과 태국과 베트남을 향한 난민 문제와 이들로 인해 야기된 국경분쟁이 계속되었다. 베트남은 1978년 12월 깜뽕짬의 크메르루즈 최고군사정치 지도자였다가 탈당한 친베트남 인사인 헹 쌈린을 내세워 폴폿 타도를 기치로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폴폿을 몰아냈다. 이에 폴폿은 정글속으로 들어가 1998년 그가 죽기까지 정부와 내전을 벌였고, 이엥싸리는 태국으로 피신했으며, 시하누크는 프놈펜 함락 며칠 전에 북경으로 망명을 떠났다.

 

(2) 크메르 루즈 전범 재판
 1997년 6월 시하누크 국와의 아들인 라나리드 제1 총리와 훈센 제2 총리는 공동명의로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에게 크메르루즈 지도자의 반인권 범죄의 단죄를 위한 국제재판 실시를 위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1999년부터 시작된 유엔-캄보디아 정부 간 협상을 통해 2003년 3월 캄보디아 전범재판소(ECCC:Extraordinary Chambers in the Courts of Cambodia) 설립안이 최종 합의되었으며 2006년 7월 ECCC가 공식 출범하였다.
2006년 판사 15명으로 국제재판장을 구성하고  2007년,  1998년에 사망한 크메르 루즈 최고 지도자였던 폴폿, 2006년에 사망한 전 군 최고사령관 따목을 제외한,  키우 삼판 전 국가원수, 이엥사리 전 외무장관, 이엥티리트 전 사회부장관, 누온 치아 전 상임위원장, 카잉구엑에아으 전 투어슬렝 일명 S-21교도소, 5명을 전범자로 지목하였다. 첫 번째 재판은, 2009년 투어슬렝 S-21 교도소 소장 카잉 구엑 에아으, 일명 듀크를 기소하고, 전쟁범죄 및 인류에 대한 범죄에 대해 2010년 1심에서 35년 감옥형(잔여형 19년)을 선고했고 2012년 항소심에서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두 번째 재판은 2010년 9월 16일 누온 치아, 이엥 사리, 이엥 티리트, 키우삼판에 대한 기소를 결정하고, 2011년 재판을 예정하였으나 늦어진 가운데 이엥사리 전 외무 장관이 2013년 3월에 사망하고, 이엥 티리트가 2015년 8월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두 명, 누온 체아, 키우 삼판은 1심에서 종신형을 받고, 2016년 11월 23일 항소심에서도 종신형을 받았다.
그동안 캄보디아 전범 재판소는 단 3명의 전범을 단죄하는데 10여 년의 기간을 보내고 2억 달러의 비용을 소비하였다. 정부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캄보디아인 재판관과의 갈등 등의 이유로 재판관들의 잇따른 사퇴와 직원파업, 기소대상자를 축소하도록 훈센총리가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훈센총리는 국가분열을 이유로 전범처벌에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지만 캄보디아 집권당인 CPP의 현 정권 고위직에는 크메르 루즈 출신이 많이 포진되어있으며 훈센총리도 크메르 루즈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이런 태도는 현 정권의 유지 차원에서 당연한 처사일 수 있다. 어쨌든 현재의 크메르루즈 전범 재판은 가해자들에 대한 조속한 단죄를 바라는 희생자 가족 등 피해 당사자와 국제사회의 기대에 크게 못 미친 것은 사실이다.

 

(3) 부패한 국가
 캄보디아는 세계부패도 지수나 비즈니스 환경지표 등에 하위권에 위치하며 세계적으로도 뇌물 관행이 가장 만연된 국가 중 하나이다. 2014년 부패인식지수에서, 캄보디아는 100점 만점에 21점을 획득했고, 조사대상국 175개국 중 156위에 머물렀다. 2013년에는 177개국 중 160위였다. 정치적 비호시스템, 인허가 과정에서의 급행료 등은 CPP 집권 하의 캄보디아 경제에서 오랜 관행이었다. 재벌들과 고위 관료들이 은밀한 거래를 통해 토지 계약과정에서 수백만 달러를 주고받는 일부터 교통경찰이 경미한 교통위반에서 2달러 정도의 뇌물을 요구하는 일까지 그 양상은 다양하다. 캄보디아 관리들은 국가의 산림자원 중 많은 부분을 벌목하면서 부를 축적해왔고, 여타형태의 국가 자산들, 즉 토지 어업권, 열대의 섬들과 해변들, 광산, 석유 등으로도 자신들의 상업적 이권을 확대시켜 나가고 있다. 캄보디아 정부는 국가의 천연자원을 할당하면서 권력과 유착된 사업가들과 계약을 체결했고 그 과정에서 강제철거와 철거민 퇴거 등 인권유린과 환경파괴가 발생하여 원조 제공처들과 인권단체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인권단체 '리카도'의 통계에 의하면, 이렇게 토지분규로 강제철거사태에 말려든 캄보디아인들의 수가 지난 2000년 이후 50만 명에 달하고 있다. 프놈펜 주재 미 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정경유착은 지나치게 끈끈하여 훈센 총리조차 부정부패 및 비호시스템 청산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고 분석하고, "이런 재계 지도자들은 집권 CPP에 돈을 기부하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재벌들은 총리의 후원에 힘입어 추가적인 신용과 합법성을 누리고 있다. 이 같은 공생 관계는 캄보디아 재벌들과 정치적 유력인사들, 그리고 정부 관리들의 네트워크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런 네트워크로 인해 불법을 저지를 이들에 대한 면책의 문화를 강화시키고 부패와의 전쟁이라는 개혁을 제한시키고 있다"고 말하였다. 

 

3. 경제
캄보디아는 오랫동안 정치적 혼란과 내전을 거듭하면서 전후 복구와 경제재건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러나 1993년 총선 이후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고 과거의 사회주의적 경제 운용방식을 탈피하여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면서 경제적 안정과 경제재건의 노력이 확대되었다. 1994년 8월 투자법이 시행되고 1997년 미국으로부터 최혜국대우를 받게 되고, 2004년 WTO에의 가입을 기반으로 세계 경제에 순조롭게 편입되면서 섬유 봉제 부분을 중심으로 외자 유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 2004~2007년까지는 11%의 고도경제 성장을 이룩하기도 했으나 2008년 이후 평균 7%의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2004년 7월 출범한 제3기 캄보디아 연립정부는 국정 운영을 총괄하는 국가전략(사각 전략)을 발표한 데 이어, 구체적 이행을 뒷받침하는 경제정책 행동계획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분야별 과제를 선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상설기구를 설치함은 물론 외국인 투자유치 확대를 위한 수단으로써 캄보디아 개발위원회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캄보디아 정부는 사각 전략의 구체적 이행과 캄보디아 새천년개발목표 달성을 위한 우선순위 목표와 전략이 포함된 전략적 국가개발계획(2014~2018)을 지속해서 추진 중이며 이에 따라 국민총생산(GDP)과 국민소득(GNI) 수준이 향상되고 있다. 2016년 GDP 1,140 달러(153위, IMF,2016), GNI 2,040 달러(125위, IMF, 2010)를 기록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주요산업은 농업생산, 봉제 신발산업, 관광산업, 건설산업 등이다.

 

1) 농업
캄보디아 전체 노동인구의 70% 이상이 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캄보디아는 비교적 넓은 국토와 적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어 농업 발전에 대단히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메콩강과 그 지류들, 톤레샵(Tonle Sap) 호수의 풍부한 수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강 주변의 퇴적 지대에 양호한 농지들이 분포해 있다. 캄보디아의 영토는 약 18만㎢이며, 이 중 국토는 약 17만6000㎢ 수준이다. 이 중 농업에 사용되는 비중은 약 5만 7,000㎢ 수준으로, 전체 국토면적의 약 32% 수준이다. 농업의 중심 작물은 쌀인데, 국민 칼로리 섭취량의 75%가 쌀로 충당되고 있을 만큼 쌀은 중요한 작물로 전체 경작지의 90%를 사용하고 있다. 쌀 이외의 작물로는 슈가팜, 캐슈넛, 등나무, 옥수수, 타피오카, 콩, 사탕수수, 고무, 후추 등이 재배되고 있다. 하지만 단위면적당 평균 쌀 생산성은 동남아시아 전체 국가 중 최하위에 속한다. 관개시설 미비, 생산성 향산 기술 미흡, 농자재 생산 및 수급 미흡, 유통구조 및 농업연구투자 미흡 등 농업에 대한 전반적인 인프라 열악으로 모든 작물의 생산성이 저조한 것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2) 섬유- 봉제 산업
봉제 산업은 캄보디아에서 거의 유일한 이차 산업으로, 2015년 기준으로 캄보디아 섬유 제조업체 협회에 등록된 업체는 총 590여 곳에 이른다. 이들 중 대부분은 중국계 공장이며, 한국 봉제 공장도 60개사 정도 진출해 있다. 지역별로 보면 프놈펜 지역이 198개 업체로 가장 많고, 그다음은 칸달 지역에 51개의 기업이 진출해 있다. 봉제 산업의 고용 인원은 약 7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차 산업 총 고용의 약 50%에 해당하며, 부가가치 창출 면에서도 41%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EU의 일반특혜관세(GSP) 원산지규정 개정으로 캄보디아 등 최빈국(LDCs) 국가들이 유럽시장 수출 시 관세 혜택 범위가 조정됨에 따라, 유럽지역이 주 수출국으로 자리 잡게 됐다. 캄보디아의 대EU 수출 품목은 상위 8개 제품 중 쌀과 자전거류를 제외한 나머지 6개 제품이 섬유·봉제 제품일 정도로 섬유·봉제 제품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해외직접투자에서도 지난 20년간 가장 많은 투자를 기록하며 제조산업을 이끌어나가는 견인차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2013년 말과 2014년 초에 걸쳐 최저임금과 관련해 대규모의 봉제 산업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면서 공장 기물을 파손하는 등의 과격한 시위와 그에 따른 유혈사태, 군, 경의 과잉진압으로 1명이 사망하며 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최근 경제발전, 노동분쟁, 정치적 영향에 따라 지나 수년간 최저임금이 연 20% 내외로 지속해서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 2012년 80불, 2014년 100불, 2015년 128불, 2016년 140불, 그리고 2017년에는 153불로 확정되었다. 최저임금를 기준으로 초과근무수당, 보너스, 식비 및 교통비 보조금 등을 포함한 실제 임금은 여기에 60불이 더해지고 있고 임금인상 요구에 비해 생산성은 이에 미치지 못해 2016년에 대략 150개의 봉제 공장이 폐쇄하거나 임금이 상대적으로 더 저렴한 국가로 공장을 이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방글라데시, 미얀마, 라오스 등과 함께 여전히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을 보여 전체 공장 수는 다소 증가하고 수출도 증가하고 있다. 봉제 산업 분야에서의 지속적 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저임금인상요구를 조정하고 노동파업이 과격화되지 않고 빈도수가 줄도록 하는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

 

3) 건설 및 부동산업
부동산 및 건설산업의 직접투자는 봉제 제조업의 뒤를 이어 최근 20년간, 특히 최근 2~3년간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봉제 산업 등 노동집약적 산업이 발달하면서 여성 노동력이 수도권으로 밀려들고 있으나, 이를 수용할 주거시설이 부족한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단순한 주거시설이 대거 들어서고 있다. 외국인 투자가 증가하면서 상업용 건물 부족 현상이 심화하고 있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소규모 상업용 건물이 신축되고 있다. 대형주거 단지 및 고층빌딩 건설 프로젝트도 활발하게 진행 중에 있다. 2003~2016까지 건설된 대형주거단지는 146곳이며 5층 이상의 고층건물은 742채가 건설되었으며 많은 수의 대형 건설프로젝트가 외국인 투자 자금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건설 중인 고층빌딩 등이 완공되면, 인테리어 및 내장재 관련 사업이 더욱 많이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4) 관광업
관광업은 캄보디아가 육성하고자 하는 중요한 부문 중의 하나이다. 캄보디아 관광객의 수는 매년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2010~2013년까지 평균 18%의 관광객이 증가했고, 2016년에는 앙코르 유적을 중심으로 대략 42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간 것으로 보고되었다. 2014년 캄보디아 관광부와 중국국제여행공사가 중국 관광객 유치 확대를 위해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중국인 관광객은 매년 8%의 증가세를 보이고 2016년 중국인 관광객은 전년 대비 14%가 증가한 65만 명을 기록했다. 태국은 시엠립과 방콕을 연결하는 새로운 버스노선의 설립과 도로의 건설을 계획하고 있고, 일본 ANA항공사가 일본 직항 노선을 취항함으로써 일본 관광객의 방문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2017년부터 앙코르와트 입장료를 두 배 가까이 인상하여 관광객 감소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정부가 관광업을 부양하기 위해 관광비자를 1회 연장 가능케 하거나, 더 다양한 관광자원을 개발하여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4. 사회 및 문화
1960~1975년 캄보디아 인구는 매년 약 2.2%씩 증가했으며, 이는 동남아에서 가장 낮은 수치이다. 1975~1979년 사이의 크메르 루즈 집권기에 100만~200만 명의 국민이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계속적으로 노인 인구 비율은 증가할 것이며, 2013년 현재 1980년대의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이 20대를 이루고 있어 두꺼운 청·장년층을 구성하고 있다.

 

1) 민족 구성
캄보디아는 인구의 약 90%가 크메르족이며, 그 외에 참족(이슬람교 신봉), 중국계, 베트남계로 구성되어 있고, 중국계의 상업 분야 진출이 두드러진다. 크메르족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참족 및 베트남계는 어업에 주로 종사하고 있다. 소수 민족으로는 시엠립주 동북부와 캄퐁톰주에 걸쳐 거주하는 쿠이(Kuy) 족(약 1만 4,000명), 라타나끼리주에 거주하는 탐푼(Tampuan) 족(약 1만 5,000명), 몬돌끼리주에 거주하는 스티엥(Stieng) 족(약 3,200명)이 있다.

 

2) 교육
교육 인프라가 기본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 크메르루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됐으며, 1979년 크메르루즈의 붕괴 이후 재건되고 있는 상황으로, 교육시설, 교사, 교육 매체가 모두 부족하며, 프놈펜의 경우는 그나마 기본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나 지방의 경우는 매우 열악하다. 교육제도는 1996년부터 우리와 같은 6-3-3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헌법에서는 의무교육을 초등학교 및 중학교까지 9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취학률(2015~2016년도 기준)은초등학교 93.9%, 중학교 53.8%, 고등학교 24.3%, 대학교 14%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공립학교가 대부분이나 최근 사립학교가 증가하고 있으며, 초등학교의 경우 학교와 교사의 부족으로 오전, 오후반 2부제로 학교를 운영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3) 질병, 매춘, 여성폭력
캄보디아에 공식적으로 첫 에이즈 환자가 보고 된 것은 1993년이다. 그 후 단 4년 만에 15~40세 사이의 성인 인구 중 약 3.9%가 에이즈 보균자로 집계될만큼 에이즈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에이즈의 발생 요인은 심각한 빈곤과 높은 실직률로 인한 매매춘, 인신매매, 주변국으로의 인구 이동(어부, 군인, 임시 거주자들 등), 여성의 낮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로 인한 성적인 착취 등으로 보고 있다.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이 약 8~10만 명 정도이며 그 중 프놈펜에 약 17,000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중 30% 정도인 5천 명 정도가 18세 미만인 아동이다.

프놈펜의 길거리에서 거주하는 아동의 수는 대략 천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소년이며, 쓰레기를 뒤져 재활용품을 찾아내는 일(46%), 구걸(18%) 등을 일거리로 삼고 있다. 약 9%의 소녀들과 5%의 소년들이 섹스 산업과 연관되어 있고, 아동 매춘은 가난한 부모들이 빚을 갚기 위하거나 도시의 좋은 직장에 일하기를 바라며 딸들을 파는 경우가 흔하다. 이들은 대부분 18세 이하의 아동으로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매춘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가정부로 일하는데 프놈펜에서만 14~17세 6,500명의 아동이 자신의 집이 아닌 다른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이들 중 93%가 소녀이며, 주인으로부터 성 학대에 노출되기 쉽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아동들의 가사노동이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어 이들 역시 14~17세의 아동들로 소년 77%, 소녀 82%가 그들의 부모를 도와 가사 일을 한다. 여성폭력과 관련해서도, 2000년 조사에서 15~49세의 기혼 여성 중 23%가 15세 이후부터 신체적 폭력을 당했으며, 그중 15%는 지난 1년 동안에 일어났다. 여성들의 가정 내 폭력 비율은 도시와 시골의 차이가 없으며, 20~39세의 미혼 여성들이 현재 기혼이거나 과부인 여성들보다 더 폭력을 당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4) 최신 이슈
(1) 한류열풍
 현재 캄보디아에는 한류열풍이 상당하다. 미디어 관련 인프라가 거의 전무한 캄보디아에서 양질의 콘텐츠를 가진 한국의 드라마, 영화, 예능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캄보디아 현지 방송국 중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지 않은 방송국이 없을 정도로 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대장금, 옥탑방 왕세자와 대조영 등 한국 드라마들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한국드라마는 시청률 보증 수표로 자리 잡고 있고, 대부분 드라마는 현지어로 더빙되어 방송되고 있다. 런닝맨을 비롯한 한국 예능 프로그램들 또한 수출되어 보통 자막과 함께 방송되고 있으며 한국 뮤직비디오와 음악 프로그램 위주로 방송하는 채널이 따로 있을 정도로 K-POP 관련 방송 또한 인기 있다. 안방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는 한국 드라마 배우들이 인지도를 높여가는 만큼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캄보디아 한류 열풍의 핵은 K-POP이다. My TV, Sea TV 등에서 한국 가요의 뮤직비디오 및 음악 프로그램을 방송할 뿐 아니라, 훈센 공원과 리버사이드(Riverside)에서 매일 저녁 K-POP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문화가 발달하고 있다. 심지어 샤이니, 원더걸스 등 한국 아이돌 그룹을 카피한 그룹이 존재하고 있다. 한국 가요가 가사에 영어를 섞어 쓰듯 캄보디아 가요도 한국 가요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랑해' 같은 가사를 섞어 쓰고 있다.
다른 국가에서의 한류가 그랬듯 캄보디아에서도 미디어 콘텐츠 위주였던 한류열풍이 패션과 화장품으로 옮겨가고 있다. 의류 및 화장품을 포함한 다양한 상품들이 TV·포스터·인터넷 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홍보되고 있으며, 한국 제과점 뚜레쥬르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프놈펜 여기저기 점포를 가진 것 외에 캄보디아 내 체인슈퍼마켓인 럭키 슈퍼에 뚜레쥬르 점이 모두 들어와 있으며 매출액이 한국 강남의 점포 매출을 웃돌고 있다고 한다. 한국 동아제약의 박카스도 캄보디아에서 고급 피로회복제로 각광을 받으며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한 인기와 함께 한국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한글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2014년에는 한국어 능력평가 시험(TOPIK)에는 5만여 명이 응시했다. 이밖에 KOICA를 비롯한 NGO 단체, 한국종교단체들의 봉사활동 및 지원으로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특히 삼성, 엘지와 같은 한국의 기업들이 만들어낸 국가 브랜드 이미지도  이런 한류열풍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캄보디아 내 스마트 폰 시장을 삼성이 장기간 선두기업을 유지했다. 2014년에는 47%의 점유율을 보였고, 엘지는 7%의 점유율을 보였다. 한국 기업이 캄보디아인들이 매일 사용하는 스마트 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국가 이미지를 제고시키고 있다.

 

(2) 스마트폰 페이스북 세대 젊은이
 2013년 총선을 위한 선거운동은 예전과 다른 새로운 모습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집권 CPP는 강력한 세력을 보였고, 야당 지도자 삼랑시 총재는 장기징역형을 선고받아 해외에 망명하여 프랑스에 체류 중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힘이 되지 못하는 상태였다. 야당의 선거운동은 집권당보다 모든 게 뒤처져있었다. 그런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야당의 선거 승리 가능성에 대한 냉소적 분위기가 급속히 반전하였다. 젊은이들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면서 야당 집회에 자발적으로 모여들었고, 파란색 바탕과 떠오르는 태양의 야당 로고를 얼굴에 페인팅하고서, 날마다 거리로 나와 야당 깃발을 흔들어댔다. 당시에 보도된 수많은 인터뷰와 대담 기사들을 보면, 일반 국민이나 70만 명에 달하는 의류 노동자들이나 모두 같은 정서를 보여줬다.
온라인 공간 역시 선거전의 큰 부분이었다. 야당이 스마트폰 및 인터넷 열풍을 활용하면서, 캄보디아의 정치 활동과 표현의 자유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표현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투표일이 다가오자 사회관계망들에는 야당의 승리에 대한 희망과 낙관이 넘쳐났고, 야당과 관련된 메시지, 사진, 동영상들이 활발하게 공유됐다. 그러한 정보들은 정부가 통제하는 공중파 매체들에선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온라인 세계는 정치적으로 민감하면서도 독립성을 확보한 정보들에 국민이 접근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것이 스마트폰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힘이었다. 유명 제품과 모조품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캄보디아에서 스마트폰은 생필품으로 자리 잡았다. 저렴한 휴대폰의 등장과 가격 경쟁력을 갖춘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온라인 세계를 접하고 '페이스북'(Facebook) 등과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도 합류할 수 있게 됐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인터넷 회선 이용자 수는 2012년에 270만 명이었고, 현재는 580만 명에 달한다. 또한, 휴대폰 가입자 수는 2014년 상반기에 2천30만 명이, 2015년 동기에는 2천192만 명이다. 젊은이들의 스마트 폰과 페이스북 공간을 통한 SNS는 선거기간 동안 많은 청년을 야당의 선거운동 자원봉사자로 참여토록 만들기도 했다. 비록 집권 CPP 68석, 야당인 CNRP는 55석으로 야당이 아깝게 졌지만, 2008년 총선과 비교해 2012년 총선에서 야당은 대약진을 한 셈이었다. 스마트 폰과 페이스북의 온라인을 통한 혁명들이 앞으로 어떻게 캄보디아 사회를 변화시킬지 예측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5. 종교
캄보디아 국교는 불교이다. 인구의 95% 이상이 자신의 종교를 불교라고 하지만, 그들은 힌두교와 민간신앙이 혼합된 형태의 불교를 숭상하고, 여기에 민간신앙을 가미하는 혼합종교를 믿고 있다.

 

1) 민간신앙
고대 크메르인들은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숨 쉬는 자연 속에서 삶에 크게 영향을 주는 강, 나무, 산, 돌들과 그 자연이 만들어 내는 자연현상을 숭배하고 두려워했다. 그중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이었으므로 자연스레 물에 대한 신앙이 컸었다. 이 물에 대한 신앙은 물 축제에서 볼 수 있는데 바삭강과 메콩강 주변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지켜지고 있다. 캄보디아 명승지에는 대부분 나가(큰 용)의 형상들이 있는데 이런 용의 형상은 수신용으로 그 지역을 보호해준다고 믿고 있다. 
대부분의 크메르인은 조상신 혹은 토지신인 마을의 정령 '네악따'는 마을을 지키고 풍요한 결실과 비를 내려준다고 믿고 있다. 이것들은 적절히 숭배하면 해가 없지만, 무시하고 존경을 보이지 않을 때는 병이나 가뭄을 일으킨다고 믿고 그들을 달래기 위해 신당을 세우고 제물을 바치고 있다. 또한  '크마우잇', 즉 귀신들을 믿고 매우 두려워한다. 그것들은 방황하는 인간이나 동물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무리 용감한 사람일지라도 귀신을 만날까 두려워하여 한밤중에 혼자 걷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단어를 입 밖에도 내지 않는다. 또한, 집을 지키고 유일하게 선한 귀신인 집 귀신을 믿는다. 무당이 있어서 병을 고치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고, 불행을 막기 위해 부적을 만들기도 한다. 한편 캄보디아인들이 손목이나 허리에 빨간 끈을 묶고 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는 사람의 몸속에 있는 19개의 생령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아프면 생령  중의 하나가 나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캄보디아인들은 긴 막대 향과 향초 술 바나나 또는 삶은 닭고기, 돼지머리 등을 놓고 정령들을 숭배한다.
모든 가정(사찰까지)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모셔놓은 아렉은 개인의 가정을 보호하는 신이다. 사각형으로 울타리가 있고 지붕에 화려한 장식을 하고 금색 칠을 한 사치스런 신당 안에는 알 수 없는 조상이 있고 매일 음식을 공양하는 장소도 있고 막대 향을 꽂을 장소도 있다.

 

2) 힌두교
기원을 전후하여 인도의 힌두교는 주로 해양을 통해 동남아 일대로 퍼져나가 문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크메르 왕국도 힌두교를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힌두교의 영향은 앙코르 와트를 비롯한 여러 사원이 힌두교 신에게 헌납된 앙코르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크메르 왕들은 힌두교의 쉬바신이나 비슈나 신과 왕을 동일시하여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힌두교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대규모 사원건설과 외적의 침입에 시달린 서민들은 차츰 왕권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12세기 말 챰족의 침입으로 앙코르가 함락되면서 민심은 극도로 혼란하게 되어 자야바르만 7세는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힌두교를 대신한 대승불교를 도입하여 왕국의 재건을 꾀했다. 이후로 힌두교는 대중종교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었지만, 대승불교와 함께 캄보디아 국민의 의식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3) 소승불교(테라바다 불교)
캄보디아의 사회구조와 윤리관은 소승불교예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현행 헌법 43조는 불교가 국가종교라고 명시하고 있고, 불교사원은 문화전수지이며, 교육 제공처이며, 복지 시혜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가난한 아이들은 절에서 양육을 받고 있고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갈 곳이 없으면 절에 가서 잘 곳을 구한다. 이렇게 사원은 불교와 백성들과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고 불교는 종교를 넘어서서 캄보디아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삶의 일부분이 되어있다.

 

12세기 말 자야바르만 7세 때 도입된 대승불교는 힌두교의 연장선이었을 뿐 힌두교 신이 모셔질 자리에 부처가 있을 따름이어서 일반 대중에게 깊숙이 침투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15세기 앙코르를 함락시킨 태국의 야유타야족에 의해 전래한 소승불교가 대중들에게 흡수되고 오늘날 국교가 되었다. 아마도 개인적인 수행과 원칙을 중시하는 소승불교가 힌두교나 대중불교보다 더욱 민주적인 면이 있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적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가족 중에 남자들은 일정 기간 사원에서 수도승 생활을 하는 것이 가족의 구원과 안녕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다. 이에 폴폿 시대 이전에는 약 8만 명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폴폿은 이들을 무위도식하는 식객으로 규정하여 이들을 모두 해산시키고 강제수용소로 보냈을 뿐 아니라 약 3천 개의 사원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폴폿 이후, 불교사원들이 복원되고 1980년 다시 국교로 지정되었고 승려들은 약 55,000~ 80,000명으로 늘어났고 5,000개의 사원이 건축되었다. 원래 소승불교에는 불상이 없었는데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불상을 갖추게 되었고 전 수도였던 우동에 있는 사원에는 3,000개의 크고 작은 불상들이 있다.

 

소승불교에서 승려는 물고기나 육류를 먹지만, 술은 마시지 않으며 절에서는 요리하지 않고 공양에 의해서만 하루 두 끼 식사를 하는 등 아주 엄격한 계율이 적용된다. 일반 신도들에게도 오계와 다른 신행의 규범이 있지만 일반 신도들은 열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오직 승려에게 음식을 보시함으로 죽은 조상을 섬기고, 각종 보시와 절을 건축하는 등의 선행을 통해 공덕을 쌓으므로 더 나은 환생을 소망하고 불상 앞에 꽃과 촛불을 바치며 현세의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

 

4) 캄보디아의 무슬림
캄보디아 짬족의 뿌리는 현재 중부 베트남 지역에서 힌두 불교에 뿌리를 두고 참파 왕국을 이루며 살던 참파(Champa)족이다. 11세기 이후부터 아랍, 말레이, 페르시안 해상 무역업자들이 캄보디아를 방문하면서 이들을 모슬렘으로 개종시켰는데, 특히 짬족의 상류층부터 시작하여 종족 전체가 이슬람교로 집단개종하게 되었다. 메콩강과 뚠레이삽 강 주변의 짬족은 논농사와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도시의 짬족은 도살업,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이슬람권에서 상당한 오일머니를 캄보디아 모슬렘들을 위해 지원하고 있으며 이 재정은 사업자금으로 유입되어 모슬렘 종족인 짬족들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수도인 프놈펜 주변에도 짬족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깜뽕잠, 깜뽕 츠낭, 깜뽓 지방 등에도 분포되어 있다. 짬족은 인구 숫자에 비해 다른 소수민족들보다 중앙 정치에 많이 진출해 있는 편이다. 라나리드 국회의장 아내, 부수상 1명, 각료 1명 그리고 12명의 국회의원이 있다. 중동과 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은 매년 약 20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캄보디아의 모슬렘들을 위해서 쏟아붓고 있다. 또한, 매년 200명 이상의 종교지도자를 쿠웨이트와 중동, 말레이시아 등지로 종교 유학을 보내고 있다. 한 짬족 지도자는 "After 20 years, Cambodia will have no choice"라고 이야기하며 앞으로 3년 뒤에 돌아올 5,000여 명의 짬족 이슬람 지도자들이 캄보디아의 지도자가 되어 이슬람 선교를 감당할 것이라고 단언적으로 말하고 있다.

 

5) 기독교
(1) 가톡릭의 전래
불교 왕국이었던 캄보디아에 가톨릭이 처음 전해진 것은 16세기 말경으로, 당시 포르투갈의 상인이었던 도미니크 교단의 gasper da cruz가 1555년 캄보디아에 입국한 이래로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기독교를 전하였다.

 

(2) 개신교의 성장
 1921년부터 미국 C&MA 선교사들이 과거 캄보디아 영토였던 베트남 남부의 코친차이나(깜뿌찌어 끄라옴)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얼마간의 개종자들을 얻었고, 그들에 의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번역되었고 초기 캄보디아 교회의 목회자와 전도자로 큰 공헌을 하였다. 캄보디아의 최초의 크메르 어 성경은 1925년에 Arthur hammond 부부가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1954년 시아누크 왕은 새로 번역된 크메르 어 성경을 증정받는 자리에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였다. 이와 같은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캄보디아 교회는 약 10년간 더디지만 꾸준한 성장을 이루어갔다. 그러나 1956년 미국이 캄보디아 영토를 폭격하기 시작하자 정부는 미국인 선교사들을 미국 CIA의 앞잡이로 몰아 추방하고, 기독교회를 핍박하였으며, 캄보디아인 목사들을 투옥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 론놀이 정권을 잡은 약 5년 동안 다시 미국의 선교사들이 캄보디아에 입국해 구호와 지역개발 사역에 주력하여 많은 캄보디아인 개종자들을 얻게 되었다. 1972~75년은 캄보디아 역사상 기독교 교회가 가장 급성장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75년 4월 17일 폴폿이 정권을 잡은 후(1975~1979) 모든 선교사가 캄보디아를 떠나야 했고, 크메르루즈 공산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과 캄보디아 목회자들을 잔인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학살하였다.
다시, 1993년 총선 이후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많은 기독교 NGO들과 선교사들 그리고 태국의 국경지대에 있던 난민 캠프에서 신앙을 받아들였던 교회 리더들과 크리스천들이 돌아오면서 캄보디아에 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65년 이전에 캄보디아에는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크메르 복음교회(KEC)라는 단 하나의 교단만 있었으나, 70년 이후 다시 기독교 사역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침례교를 비롯한 많은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1993년 이전 캄보디아 내에는 약 1,000명 미만의 크리스천들이 생존해 있었으나 난민촌에서 돌아온 크리스천들과 많은 기독교 NGO들의 구제사역 그리고 많은 선교사와 현지인 목회자들의 교회개척 사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현재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교회들이 4,000개 이상 되는 것으로 파악되며, 신자들의 숫자는 어린아이들을 포함해 약 2십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기도제목
1) 캄보디아내 독재정치와 부패가 종식되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정치가 실현될 수 있기를 위해
2) 캄보디아가 경제적으로 꾸준히 성장하여 아시아 최빈국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기를 위해서, 단순히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넘어 맘몬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캄보디아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더 관심을 갖게 되기를 위해
3) 근래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인터넷 환경에 젊은이들이 자신들을 지킬 수 있도록, 그리고 인터넷을 활용한 복음전도와 양육의 새로운 전략들이 생겨나기를 위해
4) 불교의 강력한 진을 허물 수 있는 복음전도 전략들이 연구 및 적용될 뿐 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하나님의 교회에 강력하게 부어지시기를 위해
5) 캄보디아의 모든 마을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기독교인구 1.5%의 장벽이 돌파될 수 있기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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