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Republic of Cote d'Ivoire)

by PAUL posted Oct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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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 소개

서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유아모스 이지혜 선교사

(코트디부아르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1. 개괄정보
국명  코트디부아르 Republique de Cote d'Ivoire(영문명: Ivory Coast)
국명의 어원  15세기~17세기에 일어난 강렬한 상아 무역이 반영되었다.
독립  1960년 8월 7일 프랑스로부터 독립
정치형태  대통령 공화국
현 대통령  알라산 와타라(Alassane Ouattara) 2010년 대선 이후 현 정권 유지
행정  19개의 주로 나뉘며 이들 주는 81개의 현으로 나뉜다.
위치  반사하라 지대로 서부 아프리카에 있으며 라이베리아, 기니, 말리, 부르키나파소, 가나와 접경해 있다.
면적  3.458km(세계 67위) 한반도의 약 1.5배
인구  약 24.18만 (2016)
언어  프랑스어(공식) 외에 약 60개의 현지방언
수도  공식 수도: 야무스크로(Yamoussoukro)
행정 경제수도  아비장(Abidjan)
1인당 GDP  1.800$
통화  세파프랑 (XOF)
기후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후
종교  이슬람 42.9%, 카톨릭 17.2%, 기독교 16.7%, 정령숭배 3.6% 등
주요 천연자원 석유, 천연 가스, 다이아몬드, 망간, 철광석, 코발트, 구리, 금, 니켈, 규사, 점토, 코코아 콩, 커피, 야자 기름, 수력
대한 관계  대한민국과 1961년에 수교하여 1966년에 상주공관이 설치되었다.
인터넷 국가코드   .ci

 

2. 국가 개요
국명은 프랑스어로 ‘상아 해안’이라는 뜻으로 16~17세기 해안에서 상아를 주로 산출한 데서 유래한다. 1893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1946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 편입되었다. 1957년 자치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1958년 프랑스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치 공화국이 되었으며, 구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로 1960년 8월 6일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공화국이며 수도는 야무스크로(Yamoussoukro)며 행정, 경제수도는 아비장(Abidjan)이다. 친 프랑스적이며 자유주의 경제를 표방한다.
코트디부아르 국기는 오렌지색, 흰색, 녹색의 동일한 수직밴드의 모습이며, 오렌지는 북쪽과 다산의 땅, 흰색은 평화와 화합을 의미하며, 녹색은 남쪽의 숲을 의미하며 밝은 미래를 위한 희망을 나타낸다. 디자인은 프랑스 국기를 기반으로 했다. 

 

3. 역사
코트디부아르의 역사는 유럽의 선박이 도착하기 전인 1460년까지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주요 인종이 인접한 지역에서 이주해 왔는데 1600년경에 라이베리아에서 크루족, 부르키나파소와 말리에서 세누포족과 루비족이 이주해왔다. 가나에서 코트디부아르의 동부로 이주한 바울레족을 포함한 아칸족과 기네에서 북서부로 이주한 말린케족은 18~19세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다. 바울레족에 의한 게릴라전과 동부지역의 다른 종족에 의한 전쟁도 1917년까지 이어졌다. 이웃국가인 가나와 비교해 코트디부아르는 노예무역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유럽인의 노예무역과 상업선은 해안의 다른 지역에 잘 발달된 항구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1840년부터 코트디부아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지역 족장을 설득해 해안지대의 프랑스 상업 무역 독점을 하게 된다. 이로부터 프랑스는 프랑스 이외 국가의 무역을 제거하기 위한 해양기지를 건설했으며, 영국은 다수의 관리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결과로 1/3의 코코아, 커피, 바나나 농장이 프랑스인의 손에 넘어갔으며 노예에 의한 산업구조가 경제의 축이 됐다. 바울레 족장의 아들인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Felix Houphouet-Boigny)가 코트디부아르의 독립을 주도한다.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는 코코아 농장과 지역의 수장이 되기 전에 의학을 공부했으며, 1944년 정치에 입문해 아프리카인으로만 구성된 국가 최초의 농업 무역조합을 창설한다. 프랑스인에 의해 운영되던 농장 운영의 식민지 방식을 부정하고 이주한 노동자에 대해 그들 스스로 운영하는 농장을 조직하도록 했다.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의 인기는 현저히 상승했고 다음 해에 파리의 프랑스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일 년 후 프랑스는 노예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는 재력과 정치력을 동시에 획득하고 젊은 시절의 진보적인 자세를 완화해 프랑스로부터도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고 프랑스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유럽인 정부에서 최초로 아프리카인 장관직을 그에게 부여했다.
코트디부아르가 독립을 얻은 1960년 당시에는 프랑스령의 서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가장 번영했으며 지역경제 전체수출의 40%를 차지했다.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가 코트디부아르의 최초의 대통령이 된 후 생산을 더 자극하기 위해 농산품에 대한 좋은 가격을 제공했다. 커피 생산은 급속히 증가해 브라질, 콜롬비아에 이어 세계 제3위의 커피 생산국이 됐다. 코코아 생산도 동일하게 발전해 1979년에는 세계 제1위의 수출국이 됐으며, 파인애플과 야자오일의 수출도 아프리카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발전의 뒤에는 프랑스의 기술적인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종종 '디브와르의 기적'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다른 아프리카지역에선 독립으로 인한 유럽인의 철수가 이어졌으나 코트디부아르로는 유입이 증가했다. 프랑스인은 만 명에서 5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대부분은 교사와 조언자들이었다. 20년 동안 경제는 지속적으로 10% 가까운 성장(아프리카 산유국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치임)을 이룩했다.
정치적으로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는 강권을 휘둘렀는데 언론은 통제를 받았으며 한 개의 정당만을 허용했다.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도 역시 아프리카의 다른 지도자처럼 쇼맨의 성격이 강했다. 수백만 달러의 돈을 자기의 고향에 투자했으며, 야무수크로(Yamoussoukro)가 새로운 수도가 됐다. 세계적인 경제 침체와 기근이 디브와르 경제에 충격을 가하기 전인 1980년대까지 브와니의 정권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재의 과다한 벌목과 설탕 가격의 폭락으로 인해 코트디부아르의 부채는 3배로 늘어났다. 아비장(Abidjan)에 증가하는 범죄는 유럽에서 주요 뉴스가 됐으며 더 이상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1990년에 수백 명의 종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학생들이 참여해 경제 위기를 야기한 부패하고 낭비가 심한 생활을 한 정부관료에 대한 비난을 하며 폭력적인 거리 시위를 벌였다. 시위의 규모와 격렬함은 예측하기 어려웠고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 정부가 동요하기 시작해 군대의 지원을 받으며 정부를 운영하게 된다. 1990년에 대통령 선거가 양당제로 최초로 시행됐으며, 전통적인 99.9%의 지지 대신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는 85%의 득표를 얻어 당선됐으나 1993년 체력 약화로 인해 사망한다. 그의 친근인 바울레족 국회 대변인인 헨리 코난-베디에가 정권을 인계한다.

 

4. 지리 및 기후
독일과 거의 비슷한 크기로 거의 사각형의 모양인 코트디부아르는 남쪽으로는 대서양, 서쪽으로는 라이베리아, 기네, 북쪽으로는 말리, 부르키나파소, 동쪽으로는 가나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망(Man) 주변의 서부 구릉 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평지다. 해안지대는 산호로 유명하며 가나의 국경에서 해안선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300km에 걸쳐 이어진다. 남부는 수도인 야무스크로와 코트디부아르의 주 생산품인 코코아와 커피 농장이 있다. 이 지역의 나머지는 한때 남부 전역을 차지하고 있던 산림지역이고 북부로 더 올라가면 사바나 지역이다. 농경지의 확대로 다양한 동식물 군이 위협을 받고 있으며 산림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로 벌목되기도 했다. 목재산업은 활엽수목의 수출은 국가 면적이 20배나 큰 브라질과 맞먹을 정도로 많다. 코트디부아르는 해안선 지대는 습한 열대지역이고 북부는 세 가지 계절로 구분되는 반 불모지다. 따뜻하고 건조한 기온은 11월에서 3월, 덥고 건조한 기온은 3월에서 5월, 덥고 비가 많은 시기는 6월에서 10월까지 나타나며 7월이 가장 비가 많이 내린다. 12월 초부터 2월까지는 하마탄풍이 사하라에서부터 모래를 동반해 불어와 북부의 산악지역의 시계를 제한한다.

 

5. 정치(내전), 경제
오랫동안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 상태를 겪던 코트디부아르는 1960년 8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독립 후 카카오, 커피 등 열대작물을 수출하며 성장하였으나 1993년 33년간 재임하였던 초대 대통령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가 사망한 후 쿠데타에 시달렸다. 2000년 시민들의 시위로 군부 정권을 몰아냈으나 북부와 남부 간의 인종 문제가 불거져 왔다. 코트디부아르의 북부는 사바나 기후로 척박하며 무슬림이 주를 이루는 반면, 남부 해안 지역은 열대 우림으로 플렌테이션 농업이 발달해 있는데, 북부와 이웃 나라의 주민들이 남부로 몰려들게 되면서 인종 갈등이 일어났고 결국 2002년 무력 충돌을 겪기도 하였다. 2000년에 대통령으로 로랑 그바그보가 취임하였으나, 2005년 임기 완료 후에도 대선 준비 부족을 이유로 다음 대선을 미루다 2010년 11월 28일에 대통령 선거를 하였고 그 이후 선거관리위원회와 헌법재판소가 각기 다른 유권해석을 내놓으면서 두 명의 후보(로랑 그바그보와 알라산 와타라)가 대통령임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나라에 내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로써 2010년 12월 4일 알라산 와타라와 로랑 그바그보는 각각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고 결국 한 나라에 두 명의 대통령이 존재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고 2010년 12월 6일 아비장에서는 양측을 지지하는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고 총격전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유엔과 미국에서는 전 대통령에게 대선 결과에 승복할 것을 요구하며 유혈사태를 멈추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으나 유엔 평화유지군마저 공격당하면서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2만 9천여 명이 이 유혈사태를 피해 라이베리아 등지로 피난하기도 했다. 결국, 와타라측이 3월 28일 북부 반군들과 손을 잡고 대공세를 펴 전 국토의 90%를 장악하고 경제 수도인 아비장을 공격했다. 2011년 4월 11일 아비장 대통령궁 안의 지하 벙커에서 로랑 그바그보 전 대통령이 반군들에게 무력하게 체포되었다. 현재까지도 로랑 그바그보 전 대통령은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정책은 친프랑스적이며 자유주의 경제를 표방한다. 프랑스와 긴밀한 경제 관계를 1960년대까지 이어온 덕택으로 경제는 순조로운 추이를 보여, "서아프리카의 우등생"이라고 불리며, "이브와르의 기적"이라는 말 아래, 비교적 높은 경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국민총소득은 203억 달러(1인당 980달러, 2008년)이며, 통화는 CFA 프랑이다. 다양한 농업기술이 발달되어 있으며 대외투자가 일찍이 이루어져 왔다. 이 나라는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가장 번영하고 있는 곳이자 잠재적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주요산업은 카카오(세계 제1의 수출국), 커피, 감자류, 천연고무의 생산을 중심으로 한 농업이다. 주요수출품은 커피·코코아·목재 등의 농림생산물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의 최대 생산지로 유명하다. 전 세계 카카오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는 2006년 카카오 수출로 1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런데, 카카오 생산과정에서의 인권 유린이 비판의 대상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12~14세의 어린이 28만여 명이 카카오 농장에서 인신매매와 혹사,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커피·코코아 생산량은 세계 3위이고, 코코아 수출은 세계 1위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농업 수출품의 가격이 낮아지고 있어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커피, 코코아 등) 1970년대에 아비장 남쪽 해저에서 유전 2개소가 발견되었으며, 석유수출국으로 전환할 전망도 있다. 코트디부아르는 2002년부터 2003년까지 내전을 겪는 과정에서 코트디부아르와 반군 모두 카카오 수출로 전쟁자금을 충당했고, 지금도 중요한 재정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 정부와 반군이 2004년 이후 카카오로 거둔 세수는 각각 5,800만 달러와 3,000만 달러에 달했다. 그 밖에 임업, 공업(식품가공, 석유제품)도 성행한다. 인근 다른 나라들에 비해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되고, 수도 아비장에는 국제공항과 국내 최대의 항구가 있으며 자동차 조립·알루미늄·과일 통조림 제조공업이 성하다. 카카오, 석유제품, 재목의 수출이 호조이어서 무역은 매년 약 1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으나, 커다란 누적 채무를 포함한 재정을 압박하고 있다.

 

6. 사람과 언어
코트디부아르의 인구는 가까운 미래에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인구의 거의 60%가 25세 미만이며 총 출산율은 여성 1인당 약 3.5 명이다. 크게 성장하고 있는 청소년 집단을 인적 자본으로 전환하기 위해 교육, 보건 의료 및 양성평등을 개선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고, 특히 여성교육에 취약하다. 남성의 53%와 여성의 33% 만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되며(2015년) 교육 성취의 부족은 코트디부아르의 높은 비숙련 노동력, 청소년기 임신, HIV/AIDS 유행으로 인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염병과 수인성 질병, 말라리아 등의 질병 문제로 영아 사망률이 높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아이를 출생하는 어머니의 평균 나이도 19.8세로 매우 어린 나이에 출산을 시작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또한, 2000년 7월 23일 자 헌법 29조 5항에 "공용어는 프랑스어다."라고 규정했다. 언어는 프랑스어가 공용어이고 각 민족 언어도 사용된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사용되는 프랑스어는 표준 프랑스어와 어휘, 문법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프랑스어 이외에도 60개 정도의 원주민 방언이 있으며 이 중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Dioula이다.

 

7. 종교
코트디부아르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 그리고 정부 또한 선교단체에 호의적인 편이다. 그러나 현 대통령과 정부가 우회적으로 이슬람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코트디부아르의 종교는 이슬람교도 42.9%, 가톨릭 17.2%, 기독교 16.7%(복음주의 11.8%, 감리교 1.7 %, 기타 기독교 3.2%). 정령 숭배자 3.6%, 기타 종교 0.5% 종교 없음 19.1% 으로 집계되고 있다. 많은 외국인 이주 노동자는 무슬림(72.7%)과 기독교인(17.7%)으로 많은 무슬림들이 코트디부아르에서 노동자로 생활하고 있다.

 

8. 코트디부아르를 위한 기도제목
1. 나라를 위해
① 코트디부아르에 지난 내전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한 어려움이 멈추기 위해 부정부패가 사라지고 위정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도록
② 빈부의 극심한 격차로 많은 사람이 경제적 문제로 어려움 당하고 있는 나라의 형편을 아시고 이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도록
③ 아직도 안정되지 않은 정치적 혼란이 멈추고 빼앗기고 헐벗은 자들의 울분을 위로하시며 국민 모두가 더 성장하고 나라도 안정될 수 있도록
④ 말라리아와 수인성 질병, 바이러스 등 알 수 없는 질환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당하고 사망하고 있는 어려움을 도우시고 국민이 더 나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2. 교회를 위해

① 내전과 갈등으로 인해 많은 선교사와 선교단체들이 이 땅을 떠났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지만, 장차 이 나라를 서부 아프리카 복음의 전진기지로 사용해 주시도록

②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생활과 올바른 가르침이 필요한 상황 가운데 있는데 먼저는 바른 목회자들이 배출되고 세워지며 교회의 리더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맡겨주신 영혼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③ 북부에서부터 남하하고 있는 이슬람 세력을 저지하는 영적인 권능을 주시고 이 땅에 많은 교회가 이 일을 위해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며 헌신된 사역자들과 선교사들이 이 일을 위해 주님의 권능으로 힘있게 사역할 수 있도록

④ 바울선교회 2가정(박광우, 고혜영(mk-규형), 유아모스, 이지혜(mk-유온유,유사랑) 선교사들의 사역이 아름답게 열매 맺으며 영육이 강건하여 주님 맡겨주신 일을 충성되이 감당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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