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선언
바울 선교회는 2000년대까지 모슬렘 세력이 무너지도록 기도 선언 했다. 바울선교사 수련회(1945.5)를 통해 엄숙한 기도다짐으로 결의했다. 모슬렘은 기독교 복음에 가장 맹렬한 공격과 증오를 퍼붓고 있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란의 경우 모슬렘은 기독교 지도자를 살해하는 등 박해의 속도를 계속 늦추지 않고 있다. 중동 판도에서는 기독교가 숨쉬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기독교 본산지인 구라파에는 메뚜기 떼처럼 상륙하여 그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고, 사막의 종교를 세계종교로 변신시키는 무서운 마력을 보이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도 물량공세로 연약한 기독교인들을 사냥하고 있으며 가장 빠른 성장세의 종교가 있다. 그러나 기도 선언 한 궁극적인 이유는 이러한 사실들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슬렘권에 있는 형제들을 구원하자는 적극적 복음사랑 때문이다. 공산권이 무너지므로 공산당 사회에 살던 수많은 민족들이 구원의 기회를 흠뻑 가지게 된 기쁨을 우리가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도 그 기회를 주고 싶어서다. 먼저 우리는 모슬렘 형제들에게 우리 신앙 선조들이 지은 죄를 마음속으로 사과해야 한다. 이교도들을 사랑으로 변화시킬 생각을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씨를 말리려 했던 잔악한 행위를 회개해야 한다. 저들은 이 사실을 영원히 잊지 않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 저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증오스런 적기(敵旗)가 되었고, 말살시켜야 할 상징물이 되고 말았다. 10세기경에 살았던 우리 선조 기독교인들의 잔학성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노예매매, 식민지 정복을 서슴없이 감행하여 계속 큰 실수를 저질렀다. 잔인했던 선조의 악행은 후손인 우리가 사죄해야 할 과제이다. 사죄의 뜻에서 그들을 더 사랑하고 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달해야 한다. 무슬림들은 하루 다섯 차례씩 기도한다. 우리도 하루 종일 기도 속에 파묻혀 살자. 그들은 모하메드가 최후의 선지자요 구원자라고 믿는다. 우리도 예수님만이 우리 구주임을 견고히 믿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자. 그들은 170만의 선교사를 가졌다. 우리는 각 가정마다 한 명씩의 선교사를 내어놓자. 그들은 구라파를 공략하고 세계를 뻗어간다. 우리는 중동에 상륙하고, 각 종족에 교회를 세우자. 그들은 성지를 순례한다. 우리 모든 기독교인은 최소한 단기 선교사가 되어 한 번씩은 선교에 몸을 드리자. 그들은 금식기간을 한 달씩 가진다. 우리는 1년에 한 달은 성별하여 신앙을 강건케 하자. 그들 아랍권은 종교 때문에 결속되었다. 우리 모든 기독 교단은 예수 그리스도로 연합하는 일치운동을 펴자. 그들은 아내를 넷씩 둘 수 있어 산아제한 없이 자녀를 수없이 낳는다. 우리는 닫혔던 전도의 태문을 열고 영적인 자녀를 셀 수 없이 생산하자. 그들은 아직도 사막의 열풍 속에서 고생하며 산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불편하게 살자. 저들은 코란과 왕명에는 절대 복종한다. 우리도 권리는 포기하고 의문만 가지고 살자. 이 모든 일들에 있어 그들에게 없는 것이 우리에게 있다. 성령의 권능이다. 기도의 힘이다. 사랑의 힘이다. 200년대까지는 모슬렘이 여리고성처럼 무너지도록 기도의 외침을 쉬지 말자. 할렐루야!
제35호[94.12.21] 강단용 목사 교회용 신자 얼마 전 ‘농어촌 성장 연구회’에 오신 강사 한 분이 자신이 ‘강단용 목사’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자성의 소리를 외침으로 모들들 크게 자극 받은 일이 이었다. 강단에서는 사랑을 외치나 자기는 화를 자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강단에서는 전도하라 하지만 자기는 전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목사 부인이 설교하는 자기 남편 목사가 있는 강단으로 이불을 들고 가서 ‘여기서 살자’고 했더라는 실담이 있다. 강단에서는 사랑과 희생을 역설하면서도 가정에서는 폭군이 되었던 것 같다. 외식이 관습화 된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도 여기에 해당한다. “저희 말하는 바는 들어도 행위는 본 받지 말라” 그들은 강단용에 불과한 지도자들이었다. 한편 교회용 신자도 수두룩하다. 한 외국 기독교 지도자가 한국 교회를 둘러 본 후 출국하는 자리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논평을 원했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교회에는 신자가 가득한데 길거리에는 하나도 없더라”라는 일침을 주고 떠났다. 속여 팔려는 장사꾼, 친절치 못한 표정들, 지저분한 거리들이 천국 백성이 살고 있는 도시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수대교의 붕괴는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점에서 한국 전체가 붕괴되는 처참한 모습의 한 예였다. ‘진실하게 살자’는 외침에 예배당 유리창이 흔들릴 정도로 ‘아멘’했던 교회당 사람들도 함께 끼어 이런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교회당 안에서만 강한 자들인가? 교회용으로만 제조된 장식용 제품들인가? 선교사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본 현지인들이 ‘우리에게 화해의 복음 전하기 전에 당신들끼리 먼저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질책하는 현상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이 어찌된 일일까?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설교한 목사가 예배 끝난 후 그날 밤 화를 못 이겨 헐떡거리며 싸웠다는 말과 행동의 거리는 멀고도 험한가 보다. 입술만 떼어 천당 보낼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 예수님은 일찍이 신앙 지침을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가면을 벗자. 가식은 탄로가 난다. 가장 행렬은 날마다 하는 것이 아니다. 혹 필요할 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다나엘을 보신 예수님은 감탄하신 나머지 지상에 오셔서 최초의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2:47) 전천후 전투기란 것이 있다. 잔잔한 하늘이든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이든 상관없이 그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하는 고성능 전투용 비행기이다. 강단과 교회 그리고 생활 터전을 구별않고 그 감화력을 발산하는 전천후 그리스도인이 오늘에 요구된다. 진짜 예수꾼의 나타나기가 기다려진다. 할렐루야!
이동휘목사(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담임목사)
바울 선교회는 2000년대까지 모슬렘 세력이 무너지도록 기도 선언 했다. 바울선교사 수련회(1945.5)를 통해 엄숙한 기도다짐으로 결의했다. 모슬렘은 기독교 복음에 가장 맹렬한 공격과 증오를 퍼붓고 있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란의 경우 모슬렘은 기독교 지도자를 살해하는 등 박해의 속도를 계속 늦추지 않고 있다. 중동 판도에서는 기독교가 숨쉬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기독교 본산지인 구라파에는 메뚜기 떼처럼 상륙하여 그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고, 사막의 종교를 세계종교로 변신시키는 무서운 마력을 보이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도 물량공세로 연약한 기독교인들을 사냥하고 있으며 가장 빠른 성장세의 종교가 있다. 그러나 기도 선언 한 궁극적인 이유는 이러한 사실들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슬렘권에 있는 형제들을 구원하자는 적극적 복음사랑 때문이다. 공산권이 무너지므로 공산당 사회에 살던 수많은 민족들이 구원의 기회를 흠뻑 가지게 된 기쁨을 우리가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도 그 기회를 주고 싶어서다. 먼저 우리는 모슬렘 형제들에게 우리 신앙 선조들이 지은 죄를 마음속으로 사과해야 한다. 이교도들을 사랑으로 변화시킬 생각을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씨를 말리려 했던 잔악한 행위를 회개해야 한다. 저들은 이 사실을 영원히 잊지 않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 저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증오스런 적기(敵旗)가 되었고, 말살시켜야 할 상징물이 되고 말았다. 10세기경에 살았던 우리 선조 기독교인들의 잔학성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노예매매, 식민지 정복을 서슴없이 감행하여 계속 큰 실수를 저질렀다. 잔인했던 선조의 악행은 후손인 우리가 사죄해야 할 과제이다. 사죄의 뜻에서 그들을 더 사랑하고 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달해야 한다. 무슬림들은 하루 다섯 차례씩 기도한다. 우리도 하루 종일 기도 속에 파묻혀 살자. 그들은 모하메드가 최후의 선지자요 구원자라고 믿는다. 우리도 예수님만이 우리 구주임을 견고히 믿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자. 그들은 170만의 선교사를 가졌다. 우리는 각 가정마다 한 명씩의 선교사를 내어놓자. 그들은 구라파를 공략하고 세계를 뻗어간다. 우리는 중동에 상륙하고, 각 종족에 교회를 세우자. 그들은 성지를 순례한다. 우리 모든 기독교인은 최소한 단기 선교사가 되어 한 번씩은 선교에 몸을 드리자. 그들은 금식기간을 한 달씩 가진다. 우리는 1년에 한 달은 성별하여 신앙을 강건케 하자. 그들 아랍권은 종교 때문에 결속되었다. 우리 모든 기독 교단은 예수 그리스도로 연합하는 일치운동을 펴자. 그들은 아내를 넷씩 둘 수 있어 산아제한 없이 자녀를 수없이 낳는다. 우리는 닫혔던 전도의 태문을 열고 영적인 자녀를 셀 수 없이 생산하자. 그들은 아직도 사막의 열풍 속에서 고생하며 산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불편하게 살자. 저들은 코란과 왕명에는 절대 복종한다. 우리도 권리는 포기하고 의문만 가지고 살자. 이 모든 일들에 있어 그들에게 없는 것이 우리에게 있다. 성령의 권능이다. 기도의 힘이다. 사랑의 힘이다. 200년대까지는 모슬렘이 여리고성처럼 무너지도록 기도의 외침을 쉬지 말자. 할렐루야!
제35호[94.12.21] 강단용 목사 교회용 신자 얼마 전 ‘농어촌 성장 연구회’에 오신 강사 한 분이 자신이 ‘강단용 목사’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자성의 소리를 외침으로 모들들 크게 자극 받은 일이 이었다. 강단에서는 사랑을 외치나 자기는 화를 자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강단에서는 전도하라 하지만 자기는 전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목사 부인이 설교하는 자기 남편 목사가 있는 강단으로 이불을 들고 가서 ‘여기서 살자’고 했더라는 실담이 있다. 강단에서는 사랑과 희생을 역설하면서도 가정에서는 폭군이 되었던 것 같다. 외식이 관습화 된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도 여기에 해당한다. “저희 말하는 바는 들어도 행위는 본 받지 말라” 그들은 강단용에 불과한 지도자들이었다. 한편 교회용 신자도 수두룩하다. 한 외국 기독교 지도자가 한국 교회를 둘러 본 후 출국하는 자리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논평을 원했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교회에는 신자가 가득한데 길거리에는 하나도 없더라”라는 일침을 주고 떠났다. 속여 팔려는 장사꾼, 친절치 못한 표정들, 지저분한 거리들이 천국 백성이 살고 있는 도시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수대교의 붕괴는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점에서 한국 전체가 붕괴되는 처참한 모습의 한 예였다. ‘진실하게 살자’는 외침에 예배당 유리창이 흔들릴 정도로 ‘아멘’했던 교회당 사람들도 함께 끼어 이런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교회당 안에서만 강한 자들인가? 교회용으로만 제조된 장식용 제품들인가? 선교사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본 현지인들이 ‘우리에게 화해의 복음 전하기 전에 당신들끼리 먼저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질책하는 현상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이 어찌된 일일까?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설교한 목사가 예배 끝난 후 그날 밤 화를 못 이겨 헐떡거리며 싸웠다는 말과 행동의 거리는 멀고도 험한가 보다. 입술만 떼어 천당 보낼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 예수님은 일찍이 신앙 지침을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가면을 벗자. 가식은 탄로가 난다. 가장 행렬은 날마다 하는 것이 아니다. 혹 필요할 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다나엘을 보신 예수님은 감탄하신 나머지 지상에 오셔서 최초의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2:47) 전천후 전투기란 것이 있다. 잔잔한 하늘이든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이든 상관없이 그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하는 고성능 전투용 비행기이다. 강단과 교회 그리고 생활 터전을 구별않고 그 감화력을 발산하는 전천후 그리스도인이 오늘에 요구된다. 진짜 예수꾼의 나타나기가 기다려진다. 할렐루야!
이동휘목사(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