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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국제본부장(IMD) 취임 언(申就任 言) | 김태현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16.08.31 19: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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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본부장 칼럼

국제본부장(IMD) 취임 언(申就任 言)

김태현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지난 6월 21일 본부 사무실에서 이사님들과 본부 요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본부장 이취임 예배가 있었다. 신임 본부장 인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자 했으나 시간 관계상 적절한 설명을 못 하였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본래 의도를 본부장 칼럼으로 기고한다.

 

 거주민들의 눈에 성막은 난민들의 텐트 정도로 보일지 모르지만, 유대인들은 그곳이 하나님과 만나는 유일한 거처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와 그 교회의 절대적인 모형이다. 성막과 그 기구의 재료는 귀금속, 보석, 피혁(皮革), 향유, 목재, 면사(綿絲)로 이루어져 있다.(참조: 출애굽기 25장)

 

 그 구성 재료는 각각 성질이 전혀 다르다. 귀한 것과 천한 것이 함께 어울러 있다. 굳이 오늘 우리의 버전으로 표현해 보면 그곳에는 금수저 재료도 있고 은수저 재료도 있는 셈이다. 보석류와 비교하면 나무와 면사는 오늘날 우리의 인식으로 번역하면 흙수저에 해당할 것이다. 금과 목재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보석과 천이 어찌 함께 거할 수 있는가?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재료이다. 그런데 여기 성막에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무엇이 있다. 바로 기름이다. 모세는 성막의 모든 형태를 갖춘 후, 기름을 바른 뒤에야 성막이 비로소 완성된다.(민 7:1) 이것을 성막과 모든 기구에 바름으로 각 재료는 성막이라는 거룩하고 구별된 연합체가 된다. 그 이전에는 금은 금대로, 보석은 보석대로, 목재는 목재대로, 면사는 면사대로 자기의 위용을 드러내다가 비로소 기름을 바름으로 성막의 금, 성막의 보석, 성막의 나무, 성막의 천이 된 것이다. 어느 하나도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그의 몸 된 교회의 모형으로 부족함이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 세계(Kingdom of God)는 정확히 이런 모습이다.

 

 어떤 연유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가 있을 수 있다. 세상은 이것이 문제다. 능력과 소유에 따라 지배 구조와 피지배 구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세상은 아우성이다. 내 몫은 제발 어디에서 찾느냐고? 각각 자기의 위치에서 값을 지급해 달라고 아우성이다. 금은 금값을 쳐달라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고, 은은 은값을 가져가겠다는데 뭐가 잘못되었느냐는 것이다. 목재나 천도 적어도 내 값을 받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아우성이다. 서로가 내 값 치러달라는 것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과 무한 경쟁이 존재 양식이 된 세상이다. 이래서 세상은 살벌하다.

 

 그러나 기름 부으신 그리스도, 그 영이신 성령의 인침이 있는 교회나 선교회는 다른 세계다. 금은 금대로, 은은 은대로, 조각목은 조각목대로, 천은 천대로 각각의 역할을 가지고 당당한 정체성을 지닌다. 내가 사는 집을 흔히 몸집이라고 한다. 이 몸집 안에는 눈에 띄게 드러난 것도 있고, 감추어진 것, 큰 것, 작은 것도 있다. 의학적 치료비용으로 보면 값비싼 것도 있고, 값싼 것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쓰임새가 내 몸 안에서 완벽하다. 내 몸의 지체는 각각의 위치에서 적절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바울도 이 몸집에 대한 예를 실감 나게 입체적으로 설명한다. “지체가 서로 쓸데없다고 할 수 없고, 도리어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더 요긴하다고….”(고전 12:12-31) 오늘날 기업의 CEO, 금융권의 CEO, 상아탑의 CEO, 심지어 교회의 후임자 선정까지도 화려한 경력을 갖춘 최고경영자 기준을 가지고 발굴하여 세운다. 그리고 자기들이 선정한 CEO에게 한결같은 요구는 “우리 기업을, 우리 학교를, 우리 교회를 살려달라는 읍소(泣訴)로 일관한다.” 한결같이 경제논리다. 경제논리는 효율성, 성취도, 생산성에 그 방점을 둔다.

 

 이런 추세는 집단적인 구세주 증후군(Messianic complex)을 유발한다. 정치인은 이 메시아 콤플렉스를 약삭빠르게 이용한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의 표를 향한 구애는 가히 절정을 이룬다. 후보마다 지상낙원 수준의 공약을 남발한다. 이들은 곧장 내가 하면 금방 뭐가 된다는 유토피아를 화려하게 제시한다. 군중들은 믿지는 않지만, 은근히 기대한다. 집단 구세주 증후군에 빠진 것이리라. 그러나 매번 결과는 그저 그렇다. 우리 선교회가 이런 구세주 콤플렉스에서 전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리더십 선정 기준은 무엇에 방점을 두고 있는가? 화려한 경력을 지닌 자를 향한 잠재적인 생산적 효율성을 기대하는가? 아니면 적어도 외장은 영성, 인성의 어깨띠를 두르고 CEO에게 거는 기대를 내심 하는 것은 아닌지? 세상이 좋은 지도자에 의해 좋아진다는 믿음은 과신이다. 세상은 평범한 사람의 삶에서 작은 가치들이 쌓일 때 조금씩 좋아진다. 세상은 나쁜 지배자에 의해 나빠지는 것도 전부는 아니다.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작은 가치들이 무너져 내림으로써 조금씩 나빠진다. 좋은 지도자, 나쁜 지배자는 그런 상황의 반영일 뿐 결코 원인은 아니다.

하나님의 집은 철저히 공생, 공영, 공존의 구조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 가족을 보라. 정상적인 가족은 이것을 여실히 증거한다. 절대 홀로 서는 자가 아니다. 철저한 화목을 추구하며 합치하는 자이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된다고 대안 없이 비판만 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은 유혹이 든다.

“그럼 네가 해봐.”

가장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저마다 나라님을 한다고 달려들어도 세상은 그저 그렇다. 관중석에서 바라볼 때와 트랙에서 선수로 뛸 때가 다르다. 우리의 사회성은 앞서 뛰는 선수를 탓하기 이전에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무슨 문제를 향하여 나도 1/n의 몫이 있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3회 바울선교회 전체수련회(1992.10.12~16. 태국 빳따야) “다 내 탓입니다”라는 주제는 지금까지 그 마음의 울림이 우리의 가슴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예언자적 사명과 제사장적 사명을 아우르는 접점이 될 것이다. 일의 편의상 직책을 만들어 자리를 정했을 뿐 우리는 모두 어디에 있든지 반드시 우리 몸(바우리)을 구성하고 유지하는데 나름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하고 싶은 게 칼럼의 요지이다.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의 1/n의 몫을 통해 우리의 몸은 더욱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공동체로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작금의 한국 선교가 가속페달만 밟다 보니 그냥 지나친 것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의 선교 지형과 담론이 해묵은 대립과 경쟁 구도가 반복되면서 ‘선교 한국’을 물귀신처럼 침몰시키고 있는 느낌이다. 현재 우리 선교에 대한 나름의 진단과 지금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해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천착(穿鑿)이 필요할 때이다. 우리가 당면한 리스크를 관리하며 연대와 동감의 리더십으로 함께 전진하고 싶다. 다시 한 번 손에 손잡고 우리 함께 가자. 협력을 통해 주어진 과업을 함께 완성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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