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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도전(挑戰)과 응전(應戰) | 전형구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14.12.24 19:3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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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挑戰)과 응전(應戰)
 

 

전형구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매년 1월 1일 아침을 원단(元旦)이고 부른다. 지구는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하고 있다. 자전이란 지구 자체가 도는 것을, 공전이란 이 지구가 자전하면서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지구 자체가 자전하여 한 바퀴 도는 것을 1일이라고 하고 자전하면서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여 한 바퀴 도는 것을 1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아 공전의 출발점에 와서 다시 공전을 시작하면 이것을 원단이라고 부른다. 이런 말이 있다. “1년의 계획은 원단에 의한다.” 원단이 되면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세운다.
 

 

 
 

 

금세기 최고의 현대역사가요 문명비평가인 영국의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 박사는 ‘역사의 연구’라는 걸작을 냈다. 그는 과거의 무수한 문명이 흥하느냐 쇠하느냐의 흥망성쇠를 ‘도전과 응전’이라는 법칙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인류 역사상 빛나는 문명을 이룬 민족은 모두 자연 혹은 외부의 적으로부터의 도전에 잘 응전하여 극복함으로 지금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도전에 잘 응전하여 극복하지 못한 문명이나 민족은 결국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도전과 응전의 법칙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공식이 성립된다. ‘도전+응전=인생, 민족, 문명’. 인간은 도전과 응전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난관이 끊임없이 도전해 오고 그 도전에 잘 응전하여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이 도전과 응전이라는 공식은 인간 뿐 아니라 생물에게도 적용되어 약한 것은 강한 것에게 먹힌다는 ‘약육강식(弱肉强食)’, 생물이 그 환경에 맞는 것만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것은 도태해버린다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여기에 적용된다.
 

 

 
 

 

이 도전과 응전의 법칙이 기독교 2천 년사에도 적용된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로부터 박해받는 소규모 운동으로, 반대와 차별의 환경에서 그 박해에 응전하여 극복하면서 생존하고 확장해 왔다. 오히려 박해가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원후 500년경부터 기독교 신앙의 꾸준한 전진이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외부로부터의 박해의 도전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박해가 멈추자, 기독교는 존경을 받게 되고 힘이 있는 위치로 자리하게 되었다. 콘스탄틴 황제를 시작으로 조직화된 교회는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힘을 부여받게 되었고 기독교 결정이 법적 효력을 갖게 된 것이다. 서로마제국에서는 마침내 국가를 지배했고 동로마제국에서는 지배까지는 못했지만, 국가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었다. 기독교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하려고 사람들을 설득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갖가지 난관의 도전도 오지 않았다.
 

 

 
 

 

여기에 갖가지 끊임없는 도전에 좌절하지 않고 잘 응전하여 극복할 수 있는 두 가지 비결이 있다.
 

 

첫째, 도전에 대해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갖가지 난관이 도전해 온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요 16:33b)라고 말씀하셨다. 간단하지만 그 의미는 깊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난관이 도전해 온다는 것이다. 난관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라는 의미이다. 만일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난관이 도전해 오면 당황하고 좌절해 버리기 쉽다. 사도 바울은 박해받고 있는 안디옥교회 장로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고 말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갖가지 난관을 주셔서 그 난관들을 통하여 축복을 주신다. 그것은 우리를 단련하시는 그분의 방법이다. 이것을 시련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깊이 넓게 알아가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진다. 동시에 나 자신의 무력, 교만, 나태, 불신 등을 뼈저리게 절감하게 된다.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은 없듯이 시련 없는 축복은 없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고백한 것이다. 일본어 성경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행복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미국의 신학자 노먼 빈센트 목사의 ‘불가능은 없다’라는 저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에 갖가지 문제와 난관의 도전을 받는다. 만일 누구든지 문제가 없고 도전이 없다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 당신은 왜 나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십니까? 나에게 제발 문제 좀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둘째, 도전해 오는 난관을 잘 응전하여 극복하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만 신뢰하는 신앙이다.
 

 

도전과 응전의 법칙에서 어떤 난관이 도전해 오는가 보다 그 도전에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1b)고 말씀하셨다. 즉 우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을 담대히 하여 이미 세상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신뢰하라는 응전의 비결을 말씀해 주셨다.
 

 

제임스 와트라는 사람이 그린 ‘소망’이란 유명한 명화가 있다. 이 명화의 내용을 보면 지구가 있는데 그 지구 위에 남루하게 옷을 입은 어떤 소녀가 앉아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그런데 그 바이올린 줄을 주의 깊게 보면 그 줄들이 가닥가닥 끊어져 있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줄만 남아 있다. 이 소녀는 그 하나밖에 없는 바이올린 줄을 가지고 열심히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것이다. 줄이 정상적으로 모두 있어도 바이올린을 켜기 어려운데 가닥가닥 끊어지고 하나밖에 없으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 줄을 가지고 소녀는 열심히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그것이 ‘소망’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화이다. 재정의 줄이 끊어지고, 건강의 줄이 끊어지고, 믿었던 사람과의 관계의 줄이 끊어지고, 오직 나 홀로 남아 있을 때에라도 한 가닥의 줄은 아직 남아 있다. 그 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그 한 줄만 남아 있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인생을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일본어 성경에는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고 되어 있지 않고 “우리가 압도적인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라고 번역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절대 신뢰할 만한 분이시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그분을 바라보자!(히 12:2). 날마다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 앞에 마음을 토하고 그분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자!(시 62:8). 바울처럼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채우자!(빌 1:23)
 

 

 
 

 

우리의 선교현장은 단숨에 생명을 집어삼키려는 박해자들의 위협, 우리의 건강을 좀먹어가는 열악한 환경, 우리의 마음을 연약하게 만들려는 재정적 결핍 등등의 갖가지 난관의 도전장이요 그 도전 앞에 무릎 꿇느냐 아니면 그 도전을 우리 앞에 무릎 꿇게 하느냐의 치열한 전장이다. 그런 도전들을 향해 우리는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 순교 당하기 직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것을 강요받자, “주님은 평생 나를 한 번도 부인하신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나의 주님을 부인할 수 있겠소?”라고 말하며 화형에 처할 화형대를 향해 나아가며 “오!, 나를 태우려는 저 불꽃이 아름다운 장미꽃 같구나!”라고 소리치며 그의 생애를 불꽃 위에 바친 폴리캅과 같은 믿음의 영웅(英雄)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을 사랑하여 선교의 사명을 버리고 고향인 데살로니가로 돌아간 데마(딤후 4:10)와 같은 믿음의 패잔병(敗殘兵)이 될 것인가?
 

 

2015년을 맞이하여 이렇게 소리쳐 보고 싶지 않은가? “갖가지 난관들아! 나에게 한번 도전해 와 봐라! 내가 멋지게 응전(應戰)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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