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이야기  / Mission Story
[칼럼]헤세드의 사랑을 생각하며 | 안재근 선교사
BY 관리자2022.07.12 10:5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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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리 칼럼

헤세드의 사랑을 생각하며

글·안재근 선교사(필리핀, 동남아권역장)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단어 중 하나가 ‘은혜’다. 

 

감동되는 설교를 듣거나 마음이 뜨거워지는 찬양을 드리거나 했을 때 “오늘 은혜받았어!”라고 표현한다. 우리말 성경은 은혜, 은총, 자비 등으로 혼용한다.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에게 당신은 은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라고 질문했고, 대부분의 사람은 ‘공로나 대가 없이 거저 받는 호의’라고 대답했다. 

 

은혜는 영어 Grace그레이스의 번역이다. 그런데, 중세영어에서 Grace가 쓰여진 것은 12세기다. 그전에는 없던 단어다. 이것은 고대 불어Old French로부터, 라틴어 그라투스Gratus로부터, 그라투스는 헬라어 칠십인역LXX에 나오는 엘레오스로부터 번역되었다. 그리고 이 단어는 히브리어 구약성경 헤세드의 번역이다. 헤세드의 뜻은 ‘언약적 충절Covenant Loyalty’이다. 그래서 이 단어가 언약적 용어임을 시사한다. 언약에 따른 충절이니 언약을 배제하면 쓸 수 없는 조건적 단어라는 얘기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내용이 사무엘하 9장에 잘 나타나 있다. 

 

삼하 9:1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아직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 헤세드를 베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절뚝발이 므비보셋이 다윗왕 앞에 불려 온다. 자기를 ‘죽은 개 같은 나를’삼하 9:8이라고 비하하는 걸 보면 그가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왔고, 다윗이 두려워 말라고삼하 9:7 말하는 걸 보면 얼마나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볼 수 있다. 조부와 부친을 한 날에 다 잃고, 재산도 다 빼앗기고 두 다리를 저는 불구였으니 수많은 열등감, 두려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겠는가? 그런 므비보셋에게 ‘네 아비 요나단으로 인해서 너에게 은총을 베풀겠다’고 말하며 모든 재산을 도로 찾아 회복시켜주고 다윗왕의 식탁에서 다른 왕자들과 똑같이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은 왕위에 앉은 다윗의 여유 있는 제스처가 절대 아니다. 그 당시 쌍방의 언약은 완벽한 하나 됨의 ‘동맹’이었다. 서로의 목숨을 지켜주고, 서로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며, 서로가 서로의 것을 공유하는 관계의 연합이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었다.삼상 18:3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렇게 했다.삼상 18:4  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증표였다. 네 아비 요나단으로 인해서란 말은 바로 그와 맺은 언약 때문에 라는 말이다. 언약을 이행하는 의리 있고 책임감 있는 행동 그것이 은총으로 번역된 헤세드의 원래 뜻이다.

 

13여 년 전에 나는 삶과 사역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했다.


중국의 사상가 이탁오는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다른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니 그냥 따라 짖는 것처럼, 짖는 이유를 물을 땐 꿀 먹은 벙어리였다. 내가 믿었던 세계가 그림자인 허상은 아니었을까? 그러니 난 개처럼 산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전하는 복음, 구원, 믿음 그리고 축복 등 모든 개념들과 전이해 들을 허물어뜨렸다. 수 개월간 이 삶과 사역의 실체를 생각하며 눈물의 회개만 있었던 것 같다. 사역 이외의 불필요한 시간을 차단했다. 기도와 말씀 안으로만 들어갔다. 그리고 주께서는 나를 이 언약적 사랑으로 깊이 이끄셨다. 나를 당신 자신의 피로 세운 새 언약과 하나됨에서 비롯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셨다. 하나님의 ‘절대주권Sovereignty’과 ‘새 피조물 된 나’를 인지하고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친밀하게 감각 하면서부터 삶과 사역은 마음이 닿는 진검승부로 바뀌었다. 

 

필리핀 분들은 나의 설교만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구원을 날마다 경험하는지, 내가 어떻게 기도하고 응답받는지, 내가 어떻게 주님께 귀한 대우를 받고 품위 있게 변화되어 가는지, 어떻게 인내와 눈물과 감격으로 살아가는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들도 말씀과 기도, 성령님의 인도에 모든 것을 걸기 시작했다. 그 후로 사막 같던 삶에 샘이 터져 나오고, 광야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들이 계속 일어났다. 아니 정말 이런 삶이 있었던 거야? 오 놀라운 주님의 은혜여! 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탄성이 터져 나온다.

 

일만 시간의 법칙, 인계점 기도 3시간 등, 여러 가지 이론들이 회자 되고 있다. 물론 일정부분 이런 원리가 작용한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많은 사람은 ‘내가 이렇게 했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셨다’는 자신의 노력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았다. 혹은 ‘그냥 다 주님의 은혜’라고 말하며 마치 그 사람만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처럼 보여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 모두 ‘은혜’가 오해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새 언약이 바로 메시야 언약Messianic Covenant이며 그 보증으로 내 안에 보내주신 성령님이 존중되고 진심으로 따를 때, 이 헤세드는 폭발적인 능력으로 삶을 사로잡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나의 자리에서 형벌 받으시고 나를 그분의 자리에 앉히셨다. 자신의 몸을 찢으셔서 쏟으신 그 피로 새 언약을 맺으셨다. 오직 믿음으로만 이 언약의 수혜자가 된다. 새 피조물로 거듭난 우리는 이 언약적 충절헤세드의 당사자가 된다. 

 

주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를 사랑하심을 믿는가? 그렇다면 이제 죽은 개 같은 므비보셋이 아니고 자기 상태나 조건과 관계없이 왕의 식탁으로 당당히 나가서 누리는 왕자 같은 므비보셋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혹은 받을 수도 혹은 받을 수 없는 것은 절대 은혜가 아니다. 언약 때문에, 주 예수님 때문에 아주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 ‘은총’이고 ‘은혜’의 개념이다.

 

 난 오늘도 이런 헤세드의 사랑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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