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이야기  / Mission Story
[칼럼]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 성광호 목사
BY 관리자2021.04.20 16: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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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단상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글·성광호 목사(동일교회 담임, (사)바울선교회 이사)

 

코로나 팬데믹 중에도 여전히 봄은 왔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계절 정점을 보내고 있습니다. 벚꽃, 목련꽃은 하얗게 피었건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항에서 봄의 왈츠를 즐기지 못하고 그냥 보낼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계절이 된다면 정말 코로나가 대수일까 생각해 봅니다. 어디에 있든지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깊이깊이 새기며 보내는 계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독교의 본질에 가장 부합한 절기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자취를 따르는 부활절이라 할 수 있고, 기독교의 능력은 주님의 부활 생명에서 나오며 이것의 원천은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봄은 ‘생명과 비생명이 싸우는 계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산 제물이 되는 것이고, 지배자가 아니라 지배받는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는 산 사람의 희생을 통해 생명의 거름이 되라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 나를 하나님께 맡기고 산 제물과 생명의 거름으로 드리는 기간입니다. 또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진정한 회개로 자기 일생의 갱신을 이루는 큰 은혜의 기간입니다. 사람에게 ‘회개’는 자기 갱신의 큰 축복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에서 죽는다는 말은 부정적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성도들이 얼굴을 찡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고 억제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한 것처럼 죽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욕망의 흐름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는 것은 자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삶을 내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내 삶을 경영하셔서 깨어진 인생이 다시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나 스스로 계산하고 계획하는 일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은 그분이 나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을 책임지겠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살아주시겠다는 보증입니다. 따라서 이 죽음은 부활을 위한 죽음입니다. 위대한 결과를 위해 나의 가진 적은 것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비밀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는 것이 이런 놀라운 능력이구나"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것처럼 새 주인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가 주인이더니 이제는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새 주인으로 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들어가셔서 여러분 마음과 생각과 계획을 다스리시고 나의 주인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포기하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내가 나의 실패와 잘못과 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의 적은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면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받으셔서 죽은자를 살리시고 새 주인이 되심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운영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이 이미 소유권을 가지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지 못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타협함으로 내 마음을 불법 점유하고 있습니다. 70년 동안 내 뜻대로 일을 결정하고 저질러버렸기 때문에 부끄러운 잡품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내가 주인 노릇 했기 때문입니다.

 

필리핀에서는 원숭이를 잡기 위해 재미있는 방법을 쓰는데 코코넛에 원숭이 손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쌀을 넣어 나무 밑에 갖다 놓습니다. 그러면 원숭이가 나무에서 내려와 코코넛 구멍에 손을 집어넣어 쌀을 움켜쥘 수 있는 만큼 움켜쥐고는 손을 빼려고 한답니다. 하지만 움켜쥔 쌀 때문에 손을 뺄 수가 없게 되겠지요. 손을 펴고 움킨 쌀을 놓으면 손이 빠지는 데 계속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주먹 쥔 손이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원숭이가 코코넛을 깨기 위해 나무에 땅땅 소리 나게 칠 때 그 소리를 듣고 천천히 걸어와 원숭이를 잡으면 된다고 합니다. 원숭이는 저 잡으러 오는지도 모르고 코코넛을 치고 있다가 결국에는 잡히고 마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잡힐 줄 모르고 포기할 것 포기하지 못하고 움켜쥐고만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다가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줍니다. 사랑하면 나를 다 바칠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만일 사랑한다고 하면서 희생하지 않으면 가짜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 때문에 치른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부교역자였을 때 일입니다. 어느 날 심방 요청이 왔습니다. 아기가 없는 집사님이었습니다. 심방을 갔더니 집사님이 우수와 걱정에 쌓인 얼굴로 저를 봅니다.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제가 산부인과에 갔더니 더이상 애를 가질 수 없답니다." 여러 해 동안 애를 가지려고 노력했는데 의사의 검진에 의해 불임이라는 판명이 났다는 것입니다. 저는 당시 부목사로서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아들이 셋이죠?"
"예, 셋입니다."
"아들 셋 키우시기 힘드시지 않으세요?"
그래서 "아닙니다. 하나님 은혜로 세 아들이 잘 큽니다"고 했더니
"막내 아이를 우리 집에 양자로 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그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서 미국에서 일류 대학에서 공부를 시키겠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에 애비로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애 셋 키울 여력이 없으니 고생시키지 말고 애를 우리 집에 보내주면 잘 키우겠다는 얘기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그 애를 제가 혼자 낳은 것이 아니라 집사람과 함께 낳았으니 제가 집에 가서 물어보고 해답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니까 그렇게 예쁘고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집사람과 상의했지만 어떤 결정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3명이나 되니까 자식 없는 집에 하나 정도 줄 수 있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너는 아들이 셋이 있지 않느냐? 나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 아들을 죽는 자리에 내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셋 중에 하나 막내를 출세 시킬 테니 양자로 달라고 하는데도 줄 수가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독자 아들을 내 죄를 위하여 죽는 자리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의 희생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내 뜻을, 내 삶을, 내 인생을 내가 경영할 자격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과 줄줄이 흐르는 보혈의 공로로, 그분의 지극하신 사랑과 역사하심이 여러분과 나의 죄를 덮어버렸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가운데 살아있는 한 내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와 생기를 소유한 분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바우리 식구들과 함께 나누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것을 찬양하며 감사드립니다. 그분이 나의 의지가 되시고 반석이 되시며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삶의 경영자가 되시고 우리 삶의 인도자가 되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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