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이야기  / Mission Story
[칼럼]코로나 상황에서 우리는? | 박용태 목사
BY 관리자2021.02.24 18: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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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단상

코로나 상황에서 우리는?

글·박용태 목사(전주제자교회 담임, (사)바울선교회 이사)

 

온 세상이 코로나 홍수 속에 빠져든 지 벌써 일 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습니다. 백신과 치료제에 대한 말이 있지만, 사실상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지난 십여 년간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코로나 등 바이러스 때문에 생겨난 전염병이 세계를 뒤덮고 있지만, 바이러스보다 사람의 탐욕이 더 문제인 줄 알아야 합니다. ‘나쁜 바이러스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그 자체로 생명력이 없고 숙주가 있어야만 활동합니다. 생명 없는 바이러스에게 활동력을 부여하는 것이 동물과 사람입니다. 좀 더 크게 보자면 무한성장을 추구하는 물질문명입니다. 19세기 초 10억 인구가 지금은 75억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사람이 지구 공간의 14% 정도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77%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동물과 식물이 살아가는 영역이 줄어들고, 사람들과 뒤섞이게 되었습니다. ‘지구 생명 보고서(Living Planet Report) 2020’이라는 기관에서는 1970년 이후 지난 50년 동안 척추동물의 70%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 합니다. 짐승들에게 있던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옮겨오고 있습니다.

 

무한성장, 무한경쟁, 무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닫혀 있는 공간이요, 지구 환경 안에서 순환하는 생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지난 200여 년 동안 지구 생태계를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했습니다. 석탄과 석유 등 화석연료를 지나치게 사용한데다, 생태계 순환의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고 있는 소비기반 도시문명, 육식을 위한 축산 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과정에서 덩달아 탄소발생량이 급증한 나머지, 지구온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상기후야말로 기근과 홍수, 산불 등 자연재해가 엄청난 규모로 더 자주 일어나게 된 원인입니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이 곳 저 곳의 만년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경고가 있지만, 마땅한 대응책을 세우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설령 지금 발등에 떨어진 코로나 19를 어떻게 이겨 낸다할지라도 이상기후 덕분에 더 무섭고 더 많은 바이러스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코로나가 아니라 사람의 탐욕입니다. 더 화려하고 더 풍요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결국 파국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지구적 재난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개인의 경건, 개인의 성실함으로 막아 설 수 없는 고통과 재난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애굽왕 바로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출산하는 아들을 나일강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했을 때,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었습니다. 바벨론이 침략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 내릴 때는 믿음 있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개인의 믿음, 개인의 헌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 밀려닥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실한 사람이라도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재난에 휩쓸려서 희생당할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도 코로나에 걸릴 수 있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아무리 거대한 재난이 세상을 뒤덮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내아이를 다 죽이려는 애굽왕 바로가 세상을 호령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벨론이 온 세상을 짓밟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려 하는 시절에도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  소리쳤던 하박국의 외침은 올바른 고백이었습니다. 요셉 생각해 보세요. 꿈이 깨어지고 노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누명을 쓰고 언제 풀려날 지 모를 감옥에 빠져 들어가면서도 하나님 생각했던 요셉의 믿음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거대한 로마제국을 초라한 십자가가 이겼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세상을 뒤덮는 재난과 상관없이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고 하나님 하시는 일이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재난과 상관없이 우리 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렸던 보디발의 집에서뿐만 아니라 누명을 쓰고 갇혔던 감옥에서도 성실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 여인이 낳는 사내아이를 죽이라고 강요하던 애굽왕의 명령을 거절했던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생각해 보세요. 아이를 숨겨 키우다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 갈대상자를 만들었던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도 있습니다. 바벨론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탄식하며 고민하고 기도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을 주목하면서,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찬송을 불렀던 하박국을 배워야 합니다. 얼핏 보면 무능하고 무기력한 몸부림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의 신음과 탄식 속에 우리 하나님의 선한 역사가 드러났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를 드리고 우리가 불러야 할 찬송을 부르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다만 ‘방역지침을 좌파 정부의 교회 박해’라는 식의 억측이나, ‘고춧대 삶아먹기’ 식의 몰상식한 대응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로마제국에 전염병이 밀려 닥쳤을 때 초대교회 성도들이 버림 받은 환자들을 돌보다가 죽어가면서, 역설적으로 로마 사람들이 놀랄만한 방식으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확증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하는 타락한 세상, 불안과 두려움에 매인 코로나 상황에서 ‘교회’라는 조직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희생적인 사랑’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비록 우리 신앙에서 성도의 교제와 사귐이 중요하고, 예배의 현장성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신앙이 단순히 예배당이라는 공간에 갇힌 종교적 활동에 매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마스크를 잘 쓰고 물리적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서로를 사랑으로 돌보며 연약한 이들을 희생적으로 섬기는 일은 더 부지런히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화려하고 풍요로운 도시문명, 사람의 탐욕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물질문명이 한계에 봉착해서 비명을 지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을(롬 8:20-22) 목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상을 정복하는 힘을 숭배하며 동시에 쾌락을 극대화 시켰던 로마제국의 문화와 스스로를 구별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 풍요로움에 대한 개인의 욕심을 절제하고 화려함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는 거룩한 문화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저 묵묵히, 꾸준하게 감당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만 좀 더 신중하고 경건한 예배, 좀 더 치밀, 치열하고 열정적인 헌신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온 세상을 불안과 두려움으로 몰아넣고 있는 재난의 시대, 거룩한 사명에 초점 맞추면서 세상에 복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흔들림 없이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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