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이야기  / Mission Story
[칼럼]일본 선교의 성서적, 선교적 원리-일본 선교의 필요성(행 16:9-10) | 전형구 선교사
BY 관리자2024.01.12 09: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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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바우리 사역 방향

일본 선교의 성서적, 선교적 원리-일본 선교의 필요성(행 16:9-10)

전형구 선교사(일본 은퇴 선교사)

 

일본 영토는 370,000㎢로 남한의 4배, 우리나라 전 영토의 1배 반, 인구는 1억 2천3백만 명, 또 무역 대국으로 1인 국민소득이 35,000$, 교육 대국으로 문맹률이 2%, 세계 최대 장수국가로 백세 이상이 5만 명이 넘는 장수 대국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오요로즈 즉 8백만 귀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본은  종교대국이다. 또한 자살자 수가 매일 평균 90명 정도로, 한 해에 그 수가 3만 명이 넘는 자살 대국이기도 하다.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은 아시아에서 같은 문화권이다. 지리적으로는 가장 가까워 친구가 되어도 좋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부른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교회는 이웃 나라 일본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그때부터 많은 젊은이들이 단기 사역에 나섰고 적지 않은 헌신자들이 생겨났다. 우리 가족이 1993년에 입국할 때는 그런 분위기가 시작될 때였다.

 

‘일본선교는 왜 해야 하는가?’ 그 필요성, 이유를 ‘성서적 원리’와 ‘선교적 원리’로 나누어 살펴보자.

 

 

1. 성서적 원리

여기에서 ‘성서적 원리’란 일본선교의 필요성을 성서를 통해서 밝히려는 시도를 말한다.

 

성서적 원리를 3가지로 나누어 보면,   

첫째, 도움을 요청하는 일본인: 즉 일본 측이 필요로 하므로 일본 선교를 해야 한다.

둘째, 사마리아인과 같은 일본인: 즉 한국 측이 필요로 하므로 일본선교를 해야 한다.

셋째, 다시스로 도망한 선지자 요나: 즉 하나님 측이 필요로 하므로 일본선교를 해야 된다.

일본 측, 한국 측, 하나님 측의 필요로 일본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1) 성서적 원리 첫째, 도움을 청하는 일본인, 즉 일본 측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본선교는 해야  한다.

제2차 선교여행을 하고 있던 사도 바울이 갑자기 마게도냐로 그 선교 방향을 바꾸는 내용이 나온다. 바울에게 환상이 보였는데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바울에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바울은 성령이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자기들을 부르시는 줄로 인정하고 선교지의 방향을 아시아에서 마게도냐, 유럽으로 바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였다. 선교의 주관자는 성령님이시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부른다.

 

본문에서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바울에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도움을 요청하는 마게도냐인을, 도움을 요청하는 일본인으로 이렇게 바꾸어 보고 싶다.              

“일본인 하나가 한국교회에게 일본으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기독교 인구가 겨우 1%밖에 되지 않는 나라 일본, 따라서 복음 전파의 가능성이 그만큼 많고 필요한 나라, 일본이야말로 영적으로 심히 갈급하여 이제는 한국교회가 일본선교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일본인 목회자들의 말을 인용해 보면, “서양 선교사들이 일본선교를 맡아 왔지만 솔직하게 실패다. 왜냐하면 아직도 1%의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일찍부터 서양선교사 대신 한국 선교사가 일본선교를 맡았다면 1% 벽은 벌써 뛰어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일본 국영 방송인 NHK의 종교 여론 설문조사의 결과를 보면, ‘만일 종교를 갖는다면 기독교를 믿고 싶다’는 응답자의 비율이 10년 전에는 24%, 5년 전에는 36%였으나 최근엔 60% 이상이 나왔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그만큼 영적으로 갈급해 있는 가운데 진리를 찾고 있다는 증거다.

 

오래전에 총신대학교에서 개교 105주년 기념으로 한일선교 협력 국제학술 세미나가 개최된 적이 있다. 그때 “일본 프로테스탄트 150주년의 과제”라는 주제 강의에서 동경 기독교대학의 야마쿠치요우이치(山口陽一) 학장은, “한국 선교사와의 협력은 앞으로 일본선교의 열쇠다. 우리들 세대는, 한국교회와의 일치를 주 안에서 바라고 있다”라고 말했다. 

 

사이타마현의 요시가와교회의 담임이었던 고 테라다유이치(寺田祐一) 목사는 「일본선교의 비밀을 벗긴다」라는 그의 저서에서, “일본선교를 위한 한국교회와의 협력은 필수적이며 주님의 섭리가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일본선교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서구 선교사들의 능력으로서는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역시 서구 역사와 문화에서 오는 차이가 너무나 현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그것이 아무리 다르다고 하더라도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문화가 그대로 동양 문화라고 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한국 이외의 일본 선교의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는 것이다. 일본선교에 있어서 한국과의 협력이 필수적인 것은 거기에 주님의 섭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형 교회 중에 일본 선교 전문교회가 있다. 예를 들면,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그 교회다. 고 조용기 목사는 70년 전부터 일본선교를 시작했고, 일본 전국에 걸쳐 많은 교회를 개척했다. 일본에 자주 와서 대형 집회를 인도하면 수많은 일본인이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

서울 온누리교회가 일본선교에 열중인 것은 고 하용조 목사 때부터였다. 온누리교회도 일본선교 전문교회다. 특히 오래전에 개최한 ‘러브 소나타’라는 전도 집회는 일본 선교 사상 기념할 만한 기록을 남겼다. 예를 들면 오키나와에서 개최한 러브소나타에서 2,552명이, 후쿠오카에서는 2,906명이, 오사카에서는 4,322명이 집회에 참가했다. 동경에서도 개최되었는데, 20,961명이 참가하여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런 통계를 볼 때 일본인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 큰 교회 많은 목회자들이 한국교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기도, 금요 철야기도, 금식기도에 뜨거운 열심이다. 일본교회의 많은 목회자들 중에는 한국교회를 성지라고 여기고 배우려고 하고, 배운 목회자의 교회는 뜨겁게 부흥하고 있다. 한국인 선교사가 개척하고 시무하는 교회는 예배당도 짓고 크게 성장하고 있다.

 

우리가 왜 일본선교를 해야 하는가? 마게도냐인이 바울에게 선교를 원했던 것처럼, 일본인들이 우리 한국교회를 향해 일본선교를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에 해야 한다.

 

 

2) 성서적 원리 두번째, 사마리아인과 같은 일본인, 즉 한국 측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본 선교는 해야 된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여기에서 ‘사마리아’를 일본으로 바꾸어 읽어 보면 어떨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일본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일본은 사마리아와 같다고 본다. 그래서 세계선교를 책임져야 할 한국교회가 땅끝까지 증인이 되기에 앞서 꼭 거쳐야 할 곳이 일본이라는 것이다. 사마리아란 ‘유대인과의  관계에서 감정이 나쁜 것’ 그리고 ‘민족의 피가 섞여야 한다는 것’ 두 가지가 포함되어야 하는데, 한국에게 있어서 일본이 바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이 일본과 유독 감정이 나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이 되지만, ‘민족의 피가 섞여 있다’는 말은 좀 인정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일본 민족의 최하 25%에서 최고 75%까지 한국 민족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이, 양심 있는 일본학자들의 견해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일본은 우리의 형제 나라 일런지도 모른다. 아니 일본인 중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수 없이 많다.  

 

일본인들의 아이덴티티, 정체성에 관하여 여러 설이 있는데, 가장 최근에 나온 설로는, 아시아대륙의 기마민족, 특히 한반도 세력 등이 중심이 되어 일본 열도에 들어와 원주민과 혼혈을 이루었다는 소위 ‘기마민족 정복 왕조설’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일본역사를 보면, 천왕으로 호칭된 최초의 천황인 텐무천황(天武天皇、재위 674~686년)의 때에, 한반도로부터 백제와 고구려의 수많은 사람들, 이들을 도래인이라고 부르는데, 그 도래인이 일본에 유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 정치가들이 자존심 문제로 매우 싫어하는 “일본 천왕은 백제의 후손”이라는 말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며, 지금의 천황의 아버지 상왕이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우리 부부가 1988년 12월, 당시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한 한민족사탐방의 일원으로 큐슈지방을 다녀보고 우리는 너무나 놀랐다. 그리고 결론은, 일본은 우리의 형제 나라라는 것이다. 큐슈지방에는 옛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흔적이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지나치게 많다.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의 고고학자들이 고분을 발굴하면, 그것이 일본의 문화라기 보다 백제, 신라의 문화여서, 일본의 정치가들은 발표를 금지하는 경우가 있다. 그 밖에 재미있는 것은 두 나라는 얼굴의 모습이 너무 비슷하다. 때로는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분해 내기 어렵다. 세계에서 이런 민족이 어디 있는가? 

 

두 나라는 감정 면에서도 비슷하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목포의 눈물’과 같은 한국의 가요들을 어찌해서 일본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지... 그들의 가요를 들어보면, 우리 한국인의 감정에 딱 들어 맞는다. 

 

언어도 살펴보면 가, 까, 요, 네, 다, 에, 또, 마, 응, 아노(저), 간단, 무료, 유료, 온도, 기온 등등 같은 발음이 많고 사용하는 한자도 거의 같다. 일본이 한국에서 전래받은 것이 여러 가지인데 대표적인 3가지 불교, 도자기, 그리고 한자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자는 아주 오래 전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받아 오랫동안 사용하는 중에 변질되어 우리나라식 한자가 되어 거의 다르다. 그러나 우리 한국이 사용하는 한자가 일본으로 전래되어 90%이상 같다. 이런 경우가 세계 어디에 있는가? 습관도 비슷하다. 예를들어, 한국사람들이 함께 과자를 먹는다고 하자. 잘 먹다가 마지막에는 하나가 남으면 서로 먹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지 않은가. 일본도 그렇다. 우리는 노래를 잘 부르는 곡을 18곡이라고 하는데 일본도 그렇다.

 

형인 우리가 동생인 일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따라서 비록 선교비가 많이 들고 노력에 비해 혹시 열매가 적다 하더라도 사도행전 1장 8절의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의미에서, 한국교회는「사마리아」같은 일본을 최우선적으로 긴급하게 선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3) 성서적 원리 셋째, 다시스로 도망한 선지자 요나, 즉 하나님 측에서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본선교는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욘 1:3)

일본 선교를 위해 헌신한 선교사 가운데, “나는 요나와 같았다”라는 간증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무슨 의미인가?

 

앗수르(B.C 934~605)와 북쪽 이스라엘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매우 불행하였다. 

앗수르는 북쪽 이스라엘을 빈번히 공격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는 등 괴롭히다가 끝내는 B.C.722년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주민 27,280명을 포로로 끌어가는 그야말로 앙숙의 관계였다. 북 이스라엘 갈릴리 출신인 요나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기는 이스라엘의 13대 대왕인 여로보암Ⅱ세(B.C 793~753) 때였다. 마침 그 시기는 앗수르가 가장 강성했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자 요나는 곧장 니느웨로 갔는가? 아니다. 그는 어디로 갔는가? 다시스다. 성경은 그가 다시스로 도망갔다고 말씀하고 있다. 

 

요나서를 읽어보면, 요나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너무나 싫었을 뿐 아니라 은근히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랬다. 그런데 저 원수와 같은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니, 요나는 화가 났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간 것이다.

 

 

여기에서 요나의 문제점은, 니느웨의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어린아이만 12만 명, 당시 전체 인구가 6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측되는 큰 성읍 니느웨를 구원하시고, 이 일을 통해 이방인 구원에 대한 절대적 주권과 구속 사역의 보편성을 계시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요나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시려는 것은 하나님 측에서 니느웨 선교를 필요로 하셨기 때문이었다. 

 

만일, 일본으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한국 선교사가, 우리를 36년간 식민지로 삼고 괴롭혔던 저 원수 같은 일본인들에게는 갈 수 없다고 버틴다면, 마치 요나와 같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한국 선교사를 일본으로 보내시려는 것은 하나님 측에서 일본 선교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 아닌가? 꼴도 보기 싫은 일본인들이 죄로 말미암아 멸망받기를 우리가 학수 고대 할지라도,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신다면 우리가 어찌 절대 안된다고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을까?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교회의 선교 협력에 가장 심각한 장애는, 두 가지인데 ‘증오’와 ‘무시’다. 

아직 한국 교회 안에서 일부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왜 하필 일본 선교인가, 혹은, 왜 하필 일본인인가?”라고 날카롭게 반문한다. 과거의 역사로 인하여 아직도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한편, 일본에서도 일부 지도자들마저, “왜 한국 선교사가 일본에서 와서 선교하느냐?” 라고 반문하고 불쾌하게 생각한다. 아직도 일본인은 한국인을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다.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어느 정도인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1995년 1월 17일, 사망자 5,502명, 부상자 36,896명의 피해를 낸, 일본 고베지진은 잊혀지지 않는 비극적 재난이었다. 그 시기에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어느 교회에서 설교 및 선교보고를 하면서 지진 화보를 들고 당시의 비참상을 설명했다. 예배 후 그 교회의 당회실에서 담임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장로님이 들어오면서, “전 선교사님, 당시의 지진 사건을 TV를 통해서 본 한국의 분위기는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일본인들 잘 죽는다. 속이 시원하다고 말하면서 건배를 하였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로 속이 매스꺼웠다. 아니 이 정도로 일본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의 골이 깊은가. 그것은 미움 정도가 아니라 일종의 증오심이었다. 아니 미국 LA에서 지진 사건이 발생하면 속이 시원하다는 마음을 가진 국민이 과연 있을까?  

 

우리는 이 증오 감정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아가페적 사랑으로 풀어가야 한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원수 갚는 것은 주님께 맡기고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얼마 전에 내가 소속해 있던 일본교단의 교단장인 오야마레이지 목사님이 96세로 소천하셨다. 한국 신문에도 나왔을 것이다. 그는 한국통으로 한국을 사랑하셨다. 그분은 한국교회에 오면 반드시 엎드려 “과거에 여러분을 괴롭혔던 일을 용서해 주십시요”라고 말하면서 사죄하곤 했다. 심지어 그는 “한국 분들이 사죄하지 말라고 말할 때까지 사죄하겠다”고 말하였다. 제암리교회에 가보면 오야마레이지 목사님의 사진이 보일 것이다. 그가 일본교회에 사죄 운동을 벌이면서 모금한 헌금이 지금의 제암리 기념관 건립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교회 지도자 중에는 오히려 일본인을 향한 좋지 못한 감정을 회개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물론 일본인도 회개해야 되지만 우리 한국인도 일본인을 증오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은 일이다. 요나가 니느웨로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처럼, 일본으로 들어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일본인은 우리를 무력으로 정복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들을 정복해야 한다. 

 

 

2. 선교적 원리

여기에서 ‘선교적 원리’란 선교적 관점에서 일본 선교의 필요성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일본은 선교의 장점이 많은 나라다.

 

1990년부터 ‘AD 2000년 운동(AD2000 Movement)’ 의 루이스 부시(Luis Bush)가 만들어낸 ‘10/40창’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말은 ‘덜 복음화된 나라’가 있는 지역을 북위 10도에서 40도 사이, 즉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구분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10/40창의 지역의 나라들은 표면적으로 볼 때 35%에 불과하나, 인구는 65%를 차지하고 있다. 이 지역을 ‘저항대’라고도 부르는데, 그 대부분은 이슬람교권이든가 흰두교권, 불교권 나라들로서 복음전도 조차도 결코 용이하지 않다. 이 지역은 비자 발급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 복음전도자라는 신분조차 숨겨야 한다. 상식적으로 이슬람교권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편지나 전화 혹은 메일을 보낼 때, “아무게 선교사라든가, 예수, 복음, 교회 등의 말을 결코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수많은 선교사들이 자신의 선교지에서 박해와 테러, 풍토병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도 복음화가 덜 된 지역인 10/40창에 속하고, 기독교 인구가 1%뿐이 되지 않지만, 일단 모든 면에서 볼 때 일본은 복음 전도가 용이한 나라다. 먼저 일본은 체재비자를 세계에서 가장 발급받기 쉽고 전도의 자유도 있다. 일본은 특별한 서류의 하자가 없는 이상, 종교비자를 신청하면 3개월 정도 기다리면 1년간 체재 할 수 있는 비자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1년을 몇 번 연장하다 보면 3년, 그 다음은 5년 비자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풍토병이라든가 타 종교로부터의 테러 등의 신변의 위협이 없으며 언어 습득이 쉽고 식생활, 풍습 등의 문화의 충격도 적다. 또한 일본은 생산적 선교가 가능하여 선교사가 교회를 개척하고 그 개척한 교회가 성장이 되면 교회당도 건축할 수 있고 다른 지역에도 얼마든지 교회를 개척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본은 생활비 이외의 사역비는 자체적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일본은 선교의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가장 선교의 가능성이 높은 나라다. 그래서 때로는 일본을 선교의 황금어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오지 말라, 필요없다”고 선교사의 입국을 거부하거나 혹은 이미 와 있는 선교사들에게 박해를 가하여 쫒아 내는 나라에도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물며 “와 달라”고 말하면서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나라, 일본은 더더욱 선교를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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