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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코로나 때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 이성춘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20.10.30 17: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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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본부장 칼럼

코로나 때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성춘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코로나는 인류의 문명의 이기를 새롭게 활용하게 하고, 그 사용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버리고 놓쳐버려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그러한 일들을 외써 외면하거나 나의 일들이 아니라고 여기지 말고 지키고 보전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이 테이블이고 이웃과 함께 사는 마을 공동체이고, 일상을 나누는 제3의 공간이며,  성문과 시장인 것이다.

 

1) 태블릿(tablet)과 테이블(table) 사이를 넘나들기

전통적으로 환대하는 일은 삶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여행자를 위한 배려와 섬김, 이웃과의 나눔의 현장 등은 훈훈한 인심이 되었다. 튀빙엔 지역에 살았을 때에는 독일인, 외국인, 한인 유학생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하여 식탁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미리 예정되지 않은 식사초대도 자주 있었다. 이때 아내는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 배고픈 이들을 섬겨주었다. 튀빙엔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귀국하여 전주 근교에서 거주하며 신학연구소를 운영하는 한 유학생 사모가 들려준 말이 고마울 뿐이다. “튀빙엔 대학의 유학생 중에서 이성춘, 성영 선교사님의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식탁의 테이블은 우리 삶의 귀한 생명과 활력의 공급처이다.


이러한 테이블의 만남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삶의 중심이 테이블에서 테블릿으로 전환되고 있다. 테이블에 만나 함께 식사도 하고 협상하던 때에서, 테블릿을 가지고 소통하고 문서를 주고받으며 싸인까지도 하는 편리함으로 나아갔다. 코로나는 이것들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우리의 일상이 전통적인 만남, 교제, 교류의 상징인 테이블에서 테블릿으로 재빨리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화상회의도 하고, 계약도 온라인으로 하게 되었다.  하늘길이 막힌 것 같았는데, 이동이 중지된 것 같은데, 온라인에서 이르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좋은 일이다.


불통을 이야기할 때에, 전화기가 터지지 않는 장소를 말한다. 이것을 해소하려면, 기지인 송신소를 곳곳에 세우면 된다. 소통에는 반드시 소음(noise)이 있기 마련이다. 소음은 외부적인 주변 환경에서도 주어지지만, 낡아진 기계로 인한 소음도 있다. 최신 기자재를 구입하고 화질과 품질을 높여야 한다. 불통을 말할 때에 대화의 단절, 만남의 단절을 의미한다. 내부의 배려 없는, 존중 없는 모습에서도 발생하며 원만한 소통을 방해하기에 이른다. 상호 존중속에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소통은 기지 대 기지(station to station)가 아니라 인격 대 인격(person to person), 얼굴 대 얼굴(face to face)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마음의 간격을 단축하고 마음을 열면서,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며 살아가야 한다. 새로운 기지도 우리의 변함없는 인격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필요하다.


테이블에서 테블릿으로 이동한 사회에서 언제나 필요하면 다시  테이블로 적절하게 이동하며 살아가야 한다. 교회에서의 생활도 성만찬과 일상에서의 만찬으로, 만찬에서 성만찬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도들은 상호 교차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격적인 교류인 공동체성의 소멸을 극복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여전히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것은 테이블이다. 이웃과의 만남이다.

 

2) 클릭티비즘(Clicktivism)과  마을공동체의 참여

우리는 주민으로 살아간다. 동네에서 문안하고 인사하는 삶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 파송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평안의 인사 나누기였다. 많은 교류와 사귐이 아니라도 꾸준히 동네를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사는 평안을 나누는 인사이다. 이것은 집 안으로 들어가 가족의 일원으로, 동네 안으로 들어가, 동네 주민으로, 이웃으로 살아가라는 안내이다. 


우리는 세계의 시민으로 어디서나 언제나 세상의 모든 일에 참여하고 있다. 지구촌 반대편의 일들에도 클릭티비즘을 통해서 참여하고 영향을 주고 있다. 클릭티비즘(Clicktivism)은 클릭(Click)과 행동주의(Activism)의 합성어로 SNS를 통한 사회 운동을 말한다. 지역에서의 사회적 활동과 공동체의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하지 않아도 온라인상에서 그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만 가지고 지지하고 동의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슬랙티비즘(slacktivism)도 있다. 이것은 게으름뱅이(slacker)와 사회운동(activism)을 더한 복합어이다. 개인이 현장에 대한 노력이나 부담을 지지 않고 온라인상에서만 사회운동을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마우스에 머무는 작용보다는 이웃의 삶에 참여하고 함께 동행하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 저 멀리 세상의 일에 관여하는 모습에서 내가 사는 동네의 일에도 자주 관여하고 참여하여야 한다. 지구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동네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한다. 선교사에게도 차가 없을 때와 있을 때의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차가 있음으로 교제권의 형성이 거주지에 있기보다는 저 멀리에 있는 사람들과 이루어져, 집이 있는 동네의 사람들과의 교제가 더 멀어진다. 차가 있음으로 저 멀리 있는 곳을 방문하기에 들리지 못하고 지나치는 많은 동네가 있는 것이다. 이웃을 찾아가는 일과 이웃동네를 방문하는 일도 해야 한다.


지구촌과 마을공동체의 상호작용으로, 클릭티비즘과 슬랙티비즘도 일상이 되며, 함께 참여하는 마을공동체 생활도 일상이 되어야 한다. 이웃을 향한 길을 차단하고 벽과 담을 쌓지 말고, 이웃에 이르는 길을 열어가야 한다. 부시맨들에게는 물건에 이르는 길(paths for things)이 있다. 노동력을 잃어버린 노년이 되어도, 혼자가 되어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염려가 없다. 이들에게는 삼백 마일, 482km 이상의 거리를 이동하면서 이천 개 이상의 품목들을  모두에게 나누는 길이 있다.(비즈너)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거나 이탈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이다. 이웃에 이르는 길과 그들을 만나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3) 가정과 직장과 제3의 공간(The Third Place)의 삶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집과 회사 사무실이 아닌, 개인적인 여유와 일상을 누리며, 취미활동을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가 제3의 공간으로 대두되고 있다. 제1의 공간은 휴식공간인 집이고, 제2의 공간은 작업공간인 회사다. 제3의 공간이란 단어는 미국의 사회학자인 레이 올든버그가 1989년 그의 책 [The Great Good Place]에서 사용했다. 이웃과 함께 만나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지역 커뮤니티 공간이 제3의 공간인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구민체육관에서 독일사람들과 외국인 거주자들과 정기적으로 탁구를 쳤다. 정기적으로 일상 속에서 사회적 관계가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사람은 독일 사람이지만, 유럽 및 동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과의 교제가 이루어졌고, 젊은 층에서 노년의 층에 이르기까지 교회 절기에 따라 작은 선물들을 정성껏 나누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가정의 일들과 지역의 일들을 서로 공유하고 참여하게 되었다.


아내가 뇌졸중과 우울증에 걸려 어려운 시기에 큰딸이 엄마를 위해서 강아지 한 마리를 사 주었다. 개와 더불어 동네의 산책길과 공원에서의 독일인 가정들과의 만남이 이어졌다. 공동으로 산책하고, 가정들을 방문하고, 주말에서는 빵집에서 커피도 마시고 간단한 조찬을 나누기도 하였다. 자녀들과 가정들과 신앙에 대한 대화를 이어져 갔고, 서로 삶의 활력을 나누어 가졌다.


가정생활과 직장생활과 취미와 사회활동 속에서 활력을 나누는 공간활동도 언제나 온전하고 지속적이며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된 모습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호흡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 성전과 성문에서 : 선교적 교회로

교회와 동네는 분리된 별도의 공간이 아니라 상호 밀접한 관계와 협력이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 안의 존재로만이 아니라, 동네의 주민으로 살아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성전이고, 그리고 사람들이 자주 오고 가며 왕래하는 곳이 성문이다. 성전에서 예배하며 거룩한 임재를 체험한다. 성문에서는 일상적인 문안과 대화들이 이루어지고 억울한 일들이 하소연 되고, 기쁜 일들이 축하된다. 이곳은 시장이 될 수도 있고, 일상생활이 연결되고 나누어지는 중요한 장소가 된다. 성전에 머무는 일도 중요하지만, 성문, 시장에 머무는 일도 중요한 것이다. 


우물을 파 주고 자동펌프 시설을 만들어 주고 삶의 질을 개선해 주지만, 현지인에게는 멀리 가서 빨래도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물을 길러서 들고 오는 오래된 시냇가가 있다. 그들은 자동펌프 시설보다 그 멀리 있는 시냇가를 활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일상의 삶을 나누고, 각 가정의 소식을 듣고, 연장자에게 삶의 지혜와 자녀의 교육 원칙들을 나누며 서로 애환을 나누기 때문이다. 새롭게 파주는 우물이 성문과 같은, 그러한 곳이 되도록 지역의 사회적 관계를 알아가고 또 그러한 기반 위에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 가야 한다.


시장에서 간단한 물건을 팔지만, 한꺼번에 모든 것을 사가는 외국인 선교사를 감사의 시선으로 쳐다볼 수 없는 할머니가 있다. 시장에 오래 머물며 시장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사회적 교류와 소통이 이루어지고, 일상이 생동감이 있게 되기 위해서 아직도 팔리지 않는 물건이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교적 교회는 목장에서 울타리 경계를 막아서 동물들이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물을 파고 그곳으로 짐승들이 몰려들게 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이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고집스럽게 지켜가야 하는, 쉽게 다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의 일과 새로운 일 사이에 서서, 그것들이 우리의 삶과 사역의 중요한 부분이 되도록 양쪽을 넘나들면서 시소게임들을 해야 할 것이다.♣

국제본부장 칼럼

코로나 때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성춘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코로나는 인류의 문명의 이기를 새롭게 활용하게 하고, 그 사용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버리고 놓쳐버려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그러한 일들을 외써 외면하거나 나의 일들이 아니라고 여기지 말고 지키고 보전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이 테이블이고 이웃과 함께 사는 마을 공동체이고, 일상을 나누는 제3의 공간이며,  성문과 시장인 것이다.

 

1) 태블릿(tablet)과 테이블(table) 사이를 넘나들기

전통적으로 환대하는 일은 삶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여행자를 위한 배려와 섬김, 이웃과의 나눔의 현장 등은 훈훈한 인심이 되었다. 튀빙엔 지역에 살았을 때에는 독일인, 외국인, 한인 유학생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하여 식탁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미리 예정되지 않은 식사초대도 자주 있었다. 이때 아내는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 배고픈 이들을 섬겨주었다. 튀빙엔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귀국하여 전주 근교에서 거주하며 신학연구소를 운영하는 한 유학생 사모가 들려준 말이 고마울 뿐이다. “튀빙엔 대학의 유학생 중에서 이성춘, 성영 선교사님의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식탁의 테이블은 우리 삶의 귀한 생명과 활력의 공급처이다.


이러한 테이블의 만남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삶의 중심이 테이블에서 테블릿으로 전환되고 있다. 테이블에 만나 함께 식사도 하고 협상하던 때에서, 테블릿을 가지고 소통하고 문서를 주고받으며 싸인까지도 하는 편리함으로 나아갔다. 코로나는 이것들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우리의 일상이 전통적인 만남, 교제, 교류의 상징인 테이블에서 테블릿으로 재빨리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화상회의도 하고, 계약도 온라인으로 하게 되었다.  하늘길이 막힌 것 같았는데, 이동이 중지된 것 같은데, 온라인에서 이르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좋은 일이다.


불통을 이야기할 때에, 전화기가 터지지 않는 장소를 말한다. 이것을 해소하려면, 기지인 송신소를 곳곳에 세우면 된다. 소통에는 반드시 소음(noise)이 있기 마련이다. 소음은 외부적인 주변 환경에서도 주어지지만, 낡아진 기계로 인한 소음도 있다. 최신 기자재를 구입하고 화질과 품질을 높여야 한다. 불통을 말할 때에 대화의 단절, 만남의 단절을 의미한다. 내부의 배려 없는, 존중 없는 모습에서도 발생하며 원만한 소통을 방해하기에 이른다. 상호 존중속에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소통은 기지 대 기지(station to station)가 아니라 인격 대 인격(person to person), 얼굴 대 얼굴(face to face)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마음의 간격을 단축하고 마음을 열면서,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며 살아가야 한다. 새로운 기지도 우리의 변함없는 인격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필요하다.


테이블에서 테블릿으로 이동한 사회에서 언제나 필요하면 다시  테이블로 적절하게 이동하며 살아가야 한다. 교회에서의 생활도 성만찬과 일상에서의 만찬으로, 만찬에서 성만찬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도들은 상호 교차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격적인 교류인 공동체성의 소멸을 극복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여전히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것은 테이블이다. 이웃과의 만남이다.

 

2) 클릭티비즘(Clicktivism)과  마을공동체의 참여

우리는 주민으로 살아간다. 동네에서 문안하고 인사하는 삶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 파송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평안의 인사 나누기였다. 많은 교류와 사귐이 아니라도 꾸준히 동네를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사는 평안을 나누는 인사이다. 이것은 집 안으로 들어가 가족의 일원으로, 동네 안으로 들어가, 동네 주민으로, 이웃으로 살아가라는 안내이다. 


우리는 세계의 시민으로 어디서나 언제나 세상의 모든 일에 참여하고 있다. 지구촌 반대편의 일들에도 클릭티비즘을 통해서 참여하고 영향을 주고 있다. 클릭티비즘(Clicktivism)은 클릭(Click)과 행동주의(Activism)의 합성어로 SNS를 통한 사회 운동을 말한다. 지역에서의 사회적 활동과 공동체의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하지 않아도 온라인상에서 그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만 가지고 지지하고 동의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슬랙티비즘(slacktivism)도 있다. 이것은 게으름뱅이(slacker)와 사회운동(activism)을 더한 복합어이다. 개인이 현장에 대한 노력이나 부담을 지지 않고 온라인상에서만 사회운동을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마우스에 머무는 작용보다는 이웃의 삶에 참여하고 함께 동행하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 저 멀리 세상의 일에 관여하는 모습에서 내가 사는 동네의 일에도 자주 관여하고 참여하여야 한다. 지구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동네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한다. 선교사에게도 차가 없을 때와 있을 때의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차가 있음으로 교제권의 형성이 거주지에 있기보다는 저 멀리에 있는 사람들과 이루어져, 집이 있는 동네의 사람들과의 교제가 더 멀어진다. 차가 있음으로 저 멀리 있는 곳을 방문하기에 들리지 못하고 지나치는 많은 동네가 있는 것이다. 이웃을 찾아가는 일과 이웃동네를 방문하는 일도 해야 한다.


지구촌과 마을공동체의 상호작용으로, 클릭티비즘과 슬랙티비즘도 일상이 되며, 함께 참여하는 마을공동체 생활도 일상이 되어야 한다. 이웃을 향한 길을 차단하고 벽과 담을 쌓지 말고, 이웃에 이르는 길을 열어가야 한다. 부시맨들에게는 물건에 이르는 길(paths for things)이 있다. 노동력을 잃어버린 노년이 되어도, 혼자가 되어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염려가 없다. 이들에게는 삼백 마일, 482km 이상의 거리를 이동하면서 이천 개 이상의 품목들을  모두에게 나누는 길이 있다.(비즈너)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거나 이탈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이다. 이웃에 이르는 길과 그들을 만나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3) 가정과 직장과 제3의 공간(The Third Place)의 삶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집과 회사 사무실이 아닌, 개인적인 여유와 일상을 누리며, 취미활동을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가 제3의 공간으로 대두되고 있다. 제1의 공간은 휴식공간인 집이고, 제2의 공간은 작업공간인 회사다. 제3의 공간이란 단어는 미국의 사회학자인 레이 올든버그가 1989년 그의 책 [The Great Good Place]에서 사용했다. 이웃과 함께 만나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지역 커뮤니티 공간이 제3의 공간인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구민체육관에서 독일사람들과 외국인 거주자들과 정기적으로 탁구를 쳤다. 정기적으로 일상 속에서 사회적 관계가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사람은 독일 사람이지만, 유럽 및 동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과의 교제가 이루어졌고, 젊은 층에서 노년의 층에 이르기까지 교회 절기에 따라 작은 선물들을 정성껏 나누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가정의 일들과 지역의 일들을 서로 공유하고 참여하게 되었다.


아내가 뇌졸중과 우울증에 걸려 어려운 시기에 큰딸이 엄마를 위해서 강아지 한 마리를 사 주었다. 개와 더불어 동네의 산책길과 공원에서의 독일인 가정들과의 만남이 이어졌다. 공동으로 산책하고, 가정들을 방문하고, 주말에서는 빵집에서 커피도 마시고 간단한 조찬을 나누기도 하였다. 자녀들과 가정들과 신앙에 대한 대화를 이어져 갔고, 서로 삶의 활력을 나누어 가졌다.


가정생활과 직장생활과 취미와 사회활동 속에서 활력을 나누는 공간활동도 언제나 온전하고 지속적이며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된 모습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호흡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 성전과 성문에서 : 선교적 교회로

교회와 동네는 분리된 별도의 공간이 아니라 상호 밀접한 관계와 협력이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 안의 존재로만이 아니라, 동네의 주민으로 살아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성전이고, 그리고 사람들이 자주 오고 가며 왕래하는 곳이 성문이다. 성전에서 예배하며 거룩한 임재를 체험한다. 성문에서는 일상적인 문안과 대화들이 이루어지고 억울한 일들이 하소연 되고, 기쁜 일들이 축하된다. 이곳은 시장이 될 수도 있고, 일상생활이 연결되고 나누어지는 중요한 장소가 된다. 성전에 머무는 일도 중요하지만, 성문, 시장에 머무는 일도 중요한 것이다. 


우물을 파 주고 자동펌프 시설을 만들어 주고 삶의 질을 개선해 주지만, 현지인에게는 멀리 가서 빨래도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물을 길러서 들고 오는 오래된 시냇가가 있다. 그들은 자동펌프 시설보다 그 멀리 있는 시냇가를 활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일상의 삶을 나누고, 각 가정의 소식을 듣고, 연장자에게 삶의 지혜와 자녀의 교육 원칙들을 나누며 서로 애환을 나누기 때문이다. 새롭게 파주는 우물이 성문과 같은, 그러한 곳이 되도록 지역의 사회적 관계를 알아가고 또 그러한 기반 위에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 가야 한다.


시장에서 간단한 물건을 팔지만, 한꺼번에 모든 것을 사가는 외국인 선교사를 감사의 시선으로 쳐다볼 수 없는 할머니가 있다. 시장에 오래 머물며 시장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사회적 교류와 소통이 이루어지고, 일상이 생동감이 있게 되기 위해서 아직도 팔리지 않는 물건이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교적 교회는 목장에서 울타리 경계를 막아서 동물들이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물을 파고 그곳으로 짐승들이 몰려들게 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이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고집스럽게 지켜가야 하는, 쉽게 다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의 일과 새로운 일 사이에 서서, 그것들이 우리의 삶과 사역의 중요한 부분이 되도록 양쪽을 넘나들면서 시소게임들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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