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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아브라함의 소명에서 본 나의 선교사 입문 2 | 김태현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20.05.06 17:5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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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본부장 칼럼

아브라함의 소명에서 본 나의 선교사 입문 2

김태현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저희 부부가 바울선교회 울타리에 발을 들여놓은 때가 1991년 4월(국내훈련)이니 어언 29년이 흘렀다. 10년마다 강산이 변한다는 아날로그 시대에 비춰봐도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 셈이다. 아이들은 어느덧 훌쩍 커서 제 살림을 누리고 있고, 아들딸 휘하에 손주 넷을 두었다. 공자의 명언에 따르면, 이제 우리도 “들으면 다 안다는 도인의 경지” 즉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줄에서도 중반에 있다. 마음은 여전히 청춘인데 외모 나이는 못 속이나 보다. 하긴 바우리 훈련생 중에 아들딸 또래 나이의 프로필을 보면서 묘한 감(感)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는 선교사로 헌신하기 전에 크리스천 공동체 구현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나름 애를 쓰며 살았다. 두어 곳에 장소를 물색하여 젊은이들과 함께 살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너무 컸다. 크리스천 공동체라는 이상사회는 이상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유기적 한 몸의 이상(Vision)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직으로 변했고, 그 조직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규범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 규범은 또 다른 사회조직의 강령으로 둔갑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인류의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모든 공동체는 사람으로 시작했다가 서류로 끝난다(Christian commune starts with people and ends up with papers)고 일갈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함께 살다 보면 가장 친하다는 사람이 실망스럽고, 가장 기대했던 사람과 이반(離叛)을 경험한다. 종국에는 사람이 좋아서 시작했던 공동체가 사람이 싫어지고 무서워지는 것이다.


농촌에서 공동체 생활한다고 30여 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살면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으로 처절한 실패와 절망을 경험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공동체 이상(理想)’에서 현실적 출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끝내, 몸담았던 공동체를 나왔지만, 막상 갈 데도 없었고, 오라는 데도 없었다. 어느 날,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서 이 책 저 책을 훑다가 한 기독교 월간 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내용은 ‘깡통교회’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기사에 대한 나의 첫 소감은 ‘자기를 비어 남을 부유케 하는 모범적인 지역교회 상’이었다. 그 기사를 마음에 담았다가 며칠 후 ‘깡통교회’ 목사님과 전화로 면담 약속을 잡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머릿속에는 공동체가 최선이지만, 이렇게 깊은 실망과 패배감을 안고 다시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마도 깡통교회와 같은 모델이 나의 공동체 이상에 대한 차선의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약속 장소인 전주안디옥교회에 도착하니 허름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대지를 확보하고 건물만 무리해서 짓더라도 교인들이 몰려온다는 70~80년대의 추세와는 반대로, 건물보다 사람에, 지엽적 필요보다 지구적 필요에 방점을 두고, 제 살을 깎아 불편하게 사는 교회와 목회자의 모습은 나에게 신선함 그 자체였다. 그 날, 깡통교회의 목회자를 만나면서 나에게 다가온 강렬한 느낌은 공동체란 명분으로 나의 왕국을 쌓고자 했다는 사실이 짚어졌다. 거짓은 진실 앞에 심판되고, 가난은 부자 앞에 폭로되듯이 저의 모든 공동체 명분은 이 목사님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여지없이 심판되고 말았다.

 

여러 이야기 끝에, 과묵하신 이동휘 목사님께서는 나에게 “선교사로 나가라”고 한마디 하셨다. 그때 그 말이 나에게 어찌 크게 들리던지! 그러나 한 번도 해외선교를 생각했거나 꿈꾸어 본 적이 없는 터라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실은 공동체 생활과 연구를 위해서 일본에서 지구촌 36개국 사람들과 함께 살았고, 유럽 여러 지역에서도 공동체를 찾아 수년을 보낸 적이 있지만 한 번도 내가 해외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이나 소원을 해 본적이 없었다. 따라서 이런 한 번의 도전에 그동안 구축하고 있었던 나의 생각에 균열을 가져온다는 것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답을 못 했다. 나는 아무것도 없었고, 갈 데도, 오라는 데는 없었지만, 나 나름의 계획과 비전은 여전히 나를 볼모로 잡고 있었다.


나는 비전과 목표의 급격한 방향전환에 대한 혼돈으로 갈등을 거듭하다가 약 2개월 후, 1991년 2월 28일 ‘부르심(神命)’에 대한 굴복을 하였다. 손을 든 것이다. 더는 버틸 심적, 물적 요인이 다 바닥난 상태가 되었을 때 손을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울선교회 선교사 모집에 응하게 된 우리 부부의 스토리다. 내면적으로는 확신이 필요했고, 영적으로는 철저한 소명이 확인되는 과정이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갈 데가 없는 자였다. 아브라함처럼 이 땅에 발붙일 땅을 받지 못해 이 길 밖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선교사로 부르심에 대한 나의 이야기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나의 경험적 관점에서 해석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바울선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 한 시도 놓치지 않는 장면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 20:1-16)이다. 불러주는 주인이 없어서 여전히 밖에서 서성거리는 구직자에게 나의 눈길이 간다. 하루 일이 거의 끝나갈 즈음, 시간은 늦은 오후였다. 이들의 사정과 나의 처지가 어찌 그렇게 중첩(重疊) 되는지! 나도 오갈 데가 없었다. 늦은 시간까지 써 줄 사람을 찾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주님은 나를 불러 바울선교회라는 포도원에서 거둬주셨다. 광야 막다른 서편에서 모세를 부르듯 나와 아내를 선교사로 부르셨다. 만약 내가 갈 데가 있고, 받아주는 데가 있었다면 바울선교회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솔직한 심정은 빌어먹자니 부끄럽고, 땅을 파자니 힘이 부쳤다. 많은 사람이 갈 데도 있고, 더 좋은 조건으로 오라는 데도 내려놓고 선교사로 헌신한 자들의 간증도 많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마치 밖에서 써 주는 사람이 없어, 서성거릴 때 포도원 주인이 일꾼으로 불러 준 것이다. 그러니 주인이 하루 일당이라고 내 손에 쥐여준 한 달란트 품삯이 얼마나 고맙고 풍성한지! 지난 28여 년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것도 깊은 만족과 한없는 감사가 되었다.

 

나는 자랑거리가 없다. 선교사 생활 동안 모두 질병, 파산, 좌절의 이야기이다. 나(우리)에게서 무슨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래서 내가 야곱을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야곱의 삶의 노정이 나에게서 문뜩문뜩 묻어 나오기 때문이다. 야곱은 평생 목표를 정하고 잔뜩 잔꾀로 살아왔지만, 마지막 황혼기에 지팡이를 짚고, 거대한 바로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자였다. 명색이 요셉의 아버지지, 실상은 거지였다. 맨 몸뚱이만 가지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야곱은 이집트 왕 바로 앞에 섰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창 47: 9-10)

 

빈털터리 무일푼 노인이 바로 왕을 축복하는 일을 누가 상상할 수 있는가? 이런 반전은 복음을 떠나서는 해석이 안 된다. 양식을 구하는 야곱을 바로 왕 앞에 세우시고, 쇠사슬에 묶인 바울을 네로 황제 앞에 세우셨으며, 유대 종교가 버린 예수님을 빌라도 앞에 세우셨다. 표면적으로는 바로가 야곱에게 양식을 주고, 네로가 바울을 심판하며, 빌라도가 재판관 자리에서 예수님을 심판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고 있었고, 바울이 네로를 심판하고, 예수님이 만민의 심판자인 것이다. 이 신기한 한 그림이 나(우리)를 부르신 소명에서도 가슴 깊이 녹아있다. 가장 약할 때 강하고, 낮을 때 높이시는 역설(paradox)의 원리는 복음 안에서 누리는 은혜의 세계에서만 해석되고 간직될 뿐이다.

 

하나님 앞에 꺾인 사람, 자기 맘대로 살 수 없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자유하심이 드러나고, 세상의 거역은 심판되며, 하나님의 성품이 그의 계신 그대로 비취게 된다. 결국 내 뜻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 자리로 이끄시기 위해 십자가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할렐루야!

 

국제본부장 김태현

 

 

지난 호에 이어 두 번의 같은 제목의 칼럼을 시작했을 때는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범지구적 재앙 앞에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시사적 칼럼을 쓰고 싶었으나
이전 칼럼과 연결된 글을 올리게 되어 아쉬운 마음입니다.
지난 4년 동안 졸필을 읽어주시고 격려해 주신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호로 저의 본부 임무를 마치고 필드로 돌아갑니다.
바우리 가족 여러분, 건강히 지내십시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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