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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아브라함의 소명에서 본 나의 선교사 입문 | 김태현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20.02.28 17:5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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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본부장 칼럼

아브라함의 소명에서 본 나의 선교사 입문

김태현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우리가 묶은 모든 것은 어느 순간에 스스로 풀 수 있고, 자기의 원함을 드러낸다.
반면에 사로잡힌 자는 사로잡은 자의 손에 전부가 달려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표현이 옳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고 죽음의 길이다.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번제단 위의 제물이 우리 사람의 위치이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길게 다루고 있다. 무려 15장에 걸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온다.(창세기 11:26-25:11)  그의 생애는 대충 태생이 메소포타미아 우르였고, 거기서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버지와 함께 하란으로 나와 타향살이가 시작되었다. 먼 훗날, 스데반의 증언에 의하면 맨 처음에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보여 본토 아비 집을 떠났다고 한다.(행 7:2)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영광을 좇아 움직인다. 이 땅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은 어떤 영광의 비췸이 동기부여가 된다. 국회의원이 좋아서 패가망신할 정도로 그 영광을 좇아 사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하고자 하는 것과 되고자 하는 것이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울 때”(창 3:6) 행동으로 옮긴다. 어린아이가 어릴 때 무엇이 되는 것이 좋아 보이면 그 영광을 좇아서 평생을 드리는 시초가 된다. 물건을 살 때도 나의 피 같은 돈을 버리는 것은 그 돈보다는 그 물건의 영광을 본 후, 돈을 버리고 물건을 취하게 된다. 이런 과정이 소비행위이다.

 

아브라함은 당시의 사람들이 보지 못한 그 영광을 보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 하란에서 얼마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스데반의 증언에 의하면 ‘그곳에서도 발붙일 땅’(행 7:6-7)도 얻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그때 그의 나이 75세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때 백수(白壽)는 생물학적 연령을 고려해도 적은 나이가 아니다. 오늘의 사회학적 연령구분에서 볼 때 제3의 연령(The Third Age-50세에서 75세까지 나이)의 막바지요, 제4의 연령(The Fourth Age-75세 이후 나이)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도착하고 발붙일 땅을 받았는가? 아니다. 그는 객지 사람으로 이리 치고 저리 치고 갖은 사투를 벌이며 생존해야만 했다. 복의 근원, 혹은 “열국을 네게 주리라, 이 땅을 네게 주리라, 만민의 복이 되리라”(창 12:2-3)는 약속은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어디를 가나 약속대로 복이 되기보다는 전투적 삶을 통해 자신과 가족을 보존해야만 했다.

 

성경의 기록에서 아브라함의 고향이나 부름 받은 극적인 서술은 극히 제한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내용을 보충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전승에 나오는 이야기로 공백을 채우는 정도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두 가지 개연성을 두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고향에서 가진 게 많았는데 다 버리고 떠났다는 가정(假定)이다. 고대사회에서 혈연중심의 친족사회를 떠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 모든 혈육과 자신의 특권을 버리고 부르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헌신적 결단은 영웅적이고 자랑스러운 것이다. 동시에 그 반대 상황의 추론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즉, 아브라함이 의지할 게 아무것도 없어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추정이다. 절망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본토를 떠나야 하는 상황은 아브라함이나 우리네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인 만큼 이 두 가지 경험의 선택적 간증은 다분히 개인적인 것이다. 이 두 개의 추론은 성경에 문자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아, 각자의 경험을 통해 투영(投影)할 문제라고 본다.

“아브라함의 소명에서 본 나의 선교사 입문”이라는 제목은 나의 개인적 선교사 입문 간증이다. 아브라함이 그 땅에 발붙일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부르심에 응하지 않으면 다른 선택이 없는 경우가 나의 간증이다. 이 길이 아니면 다른 데로 갈 수도 없는 경우이다. 아브라함이 이런 환경이었을 것이라고 나의 경우에 비춰서 동일시해보는 것이다. 어차피 확실히 드러나지 않은 사실은 우리의 경험 속에서 그 이해의 폭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

 

어떤 분들은 선교사로 부르심의 과정을 설명할 때 잡아당기는 매혹적 요인(pulling factors)들이 많았다고 간증한다. 이를테면 선교사로 나올 때 매혹적인 목회 자리가 있었지만 뿌리치고 부르심에 응했다든지, 대학교수 자리 초청을 놓고 고심하다가 선교사로 헌신했다는 이야기, 또 아주 좋은 조건의 해외 유학 기회가 있었지만 뒤로하고 선교사로 부름에 순종한 분들의 간증도 듣는다. 모두가 대단한 헌신이고 부르심에 대한 결단이다. 그 ‘내려놓음’으로 하늘의 보상이 크리라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의 함정도 도사리고 있다. 모든 위대한 희생과 헌신의 뒤끝에는 자기 의가 그림자로 아른거리기 마련이다. 이 그림자가 평소에는 잘 안 보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여지없이 그 정체를 드러낸다. “내가 어떻게 버렸는데…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데…” 등등의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지금의 대접이 나의 희생과 헌신에 걸맞지 않다는 생각이 은근히 들게 마련이다. 버린 것에 대한 본전 생각 때문이다. 이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요한은 자신의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기록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띄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여기서 ‘스스로 띠 띠고’라는 말과 ‘남이 네게 띠 띄우고’라는 말이 대칭적 대비를 이룬다. 더욱 현실적인 이해를 위해서 상식을 동원해보자. 스스로 띠를 매고, 스스로 결박하는 것은 언젠가 상황이 변하면 그 맨 띠를 스스로 풀 수 있다. 자기가 자기를 묶었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기가 묶은 것은 스스로 풀 수도 있고, 다시 묶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베드로를 보라. 동료들을 지칭하며 이 자들은 다 버릴지라도 나는 선생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목숨도 바치겠다는 헌신과 각오가 어디 헛말이었겠는가? 그것은 진심이었고 대단한 헌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묶은 헌신과 스스로 결단이 되고 말았다. 어느 시점에 와보니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26:74)하는 순간이 온다. 자기가 자기를 묶고 따른 결과다. 반대로, 남이 나를 묶어봐라. 내가 풀고 싶어도 풀지 못한다. 꼼짝없이 남이 원하는 대로 가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복종할 수밖에 없다. 설령 원치 않는 곳에 나를 데리고 갈지라도 나는 못 간다고 할 수 없는 자리이다. 나는 묶였기 때문이다. 사로잡힌 자가 그렇다. 이 묶인 자리, 남이 나에게 띠를 띄운 상태가 아브라함에게 닥친 부르심의 현실이 아니었을까?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어디에서나 발붙일 한 뼘의 땅도 받지 못했다. 약속은 요원하고 상황은 악화하였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내가 스스로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내가 나를 띠 띄웠다기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묶었고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성서에 기록된 소명 받은 자는 자원자(自願者)가 아니라 징집자(徵集者)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거가 된다.


인간이 묶은 모든 것은 어느 순간에 스스로 풀 수 있고, 자기의 원함을 드러낸다. 반면에 사로잡힌 자는 사로잡은 자의 손에 전부가 달려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고 죽음의 길이다.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번제단 위의 제물이 우리 사람의 자리이다.♣ (동일한 주제가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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