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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남녀 연합에서 숨은그림 찾기 | 김태현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20.01.07 17:5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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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본부장 칼럼

남녀 연합에서 숨은그림 찾기

김태현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모든 생물의 세계는 소멸과 생성의 단계를 거친다.
소멸은 곧 거름이 되어, 다음 세대를 키워낸다.
물질의 세계에서 떠남은 손실이지만,
생명의 세계에서 떠남은 그 동질 생명의 ‘강화’로 이어진다."

 

성경에서 최초로 언급되는 남녀의 연합을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 24)  새로운 연합(union)은 사람이 부모를 떠나므로 이루어진다. 부모를 보호막으로 살던 삶에서, 이제는 스스로 가정을 꾸리는 성인으로 삶의 전환을 의미한다.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의 그늘 밑에 산다면, 또 다른 연합을 통한 재생산은 일어나지 못한다. 성인은 독립해서 남녀가 만나, 또 하나의 가정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생물 세계에서 일어나는 확장의 자연법칙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한 일차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녀가 만나지 않는다면 사회적 확장은 불가능하다.

 

여기 ‘부모를 떠나’라는 히브리어의 아삽((ă•zāḇ)은 여러 뜻 가운데 ‘강화하다(fortify)’라는 뜻이 있다.(참조; Strong`s Exhaustive Concordance)  어떤 글 뜻의 번역을 위한 단어 선정은 원래 번역자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번역은 어떤 단어를 선택하여 적절하고 타당한 언어로 배치하는 과정이다. 여기 `떠나`라는 단어를 `강화하다`라는 말로 연결해서 이해한다면 그 뜻이 더 선명하다. 부모 밑에 평생을 살아도 생물학적 번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자기 부모를 떠남은 강화로 이어진다. 개체는 그 부모를 떠나야 그 종의 번식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생물의 세계는 소멸과 생성의 단계를 거친다. 소멸은 곧 거름이 되어, 다음 세대를 키워낸다. 에덴에서 하나님과 사람, 남자와 여자의 가시적 연합의 형태를 묘사하는 어귀가 참으로 흥미롭다. 연합(한 몸)의 전제조건은 다음의 두 동사를 통해 선명하게 그려준다. ‘부모를 떠나(Leave)’와 ‘아내와 합하여(cleave)’다. 분명 부모를 떠나는 일은 ‘손실’임에 틀림없다. 자식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에 연결되는 실체가 ‘손실’의 의미를 보강해 준다. 그러므로 ‘합하여’라는 단어는 떠나는 자를 채워주는 설명이다. 물질의 세계에서 떠남은 손실이지만, 생명의 세계에서 떠남은 그 동질 생명의 ‘강화’로 이어진다. 늦은 가을에 감잎이 지고 늦게까지 홍시가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를 보라. 그 감이 자기를 붙들고 있는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그 감나무는 강화되지 않는다. 그 감이 자기를 붙들고 있는 원 가지(부모)에서 떨어져서 흙(아내)과 만날 때 강화가 이루어진다. 씨는 흙을 만날 때 비로소 그 감나무는 재생되기 때문이다. 씨는 나무에서 떨어져야 흙과 만나 생명의 씨앗을 퍼뜨리는 원리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씨(종자)의 연합의 버전은 다음과 같다: “씨는 나무를 떠나 흙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라.” 이것이 ‘떠남’의 의미이고 ‘강화’의 의미이다.

 

부부는 한 몸이다. 더는 각각으로 살지 않는다. 완전한 연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연합으로 이루어졌다. 씨와 흙, 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 신랑과 신부는 성경에 나오는 연합의 모형이다. 이것은 창조세계를 지은 조물주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연합은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표상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아버지는 아들의 근원이고 아들은 아버지의 표현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다. 둘은 하나다. 이 연합 속에서 우리는 생명의 근원과 그 형상을 본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교회 속에서 생명의 하나 됨을 나타낸다. 모든 생물의 세계는 결혼을 통해 이 연합의 어떠함을 보여준다. 이로 보건대, 우리의 연합에 대한 위임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기의 모양을 따라,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짓자 계획(창 1:26)하시고, 실행(창 1:27)하셨으며, 그 자신의 형상으로 완성된 사람을 향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고 위임(창 1:28)하셨다. 여기서 창조주의 인간에 대한 목적과 위임이 선명하다. 하나님은 실재(the reality)이고, 사람은 그 실재를 반영하는 형상(the image)이다. 형상은 형상 자체로는 껍데기일 뿐이다. 형상은 그 본체와 연합할 때 온전해진다. 장갑은 손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 즉 장갑은 손이라는 실재가 없으면 그 지으신 목적이 상실된다.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 장갑은 쓸모없게 된다. 결국, 버려지고 만다. 이것이 저주다. 원래 목적에서 벗어난 용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버림받은 게 저주다. 지으신 자와 지음 받은 자의 완벽한 유비가 실재와 형상이다. 실재는 형상을 통해서 표현됨으로 형상은 그 실재와 더불어 있어야 한다. 마치 아들은 아버지 생명의 연속적인 표현이고, 아버지는 아들의 생명의 근원으로 그 뿌리이다. 이 둘은 하나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명령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 갈망의 비유적 표현은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만든 인간은 씨와 흙의 만남이다. 전혀 다른 성질의 씨와 흙이 만나 온전한 한 생명을 낳는다. 그리고 지구는 씨와 흙의 열매로 생육과 번성을 통해 풍성함을 이룬다. 남자와 여자의 연합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형상이다.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함의 표현도 결국 하나님 자신이 홀로 있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여자, 흙, 그릇의 공통점은 받아드림에 대한 수용성이다. 밖에서 들어가는 무엇에 의하여 자신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여자는 남자, 흙은 씨, 그릇은 내용물에 따라 그릇의 이름이 바뀐다. 밥을 담으면 밥그릇, 똥을 받으면 똥 그릇이 된다. 이게 받아들이는 여자(사람)의 운명이다. 이 씨를 만나면 이 씨를 낳고, 정 씨를 만나면 정 씨를 낳는 게 여자의 운명이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이름이 바뀐다.

 

선교사는 씨와 흙을 연결해 주는 촉매자와 같다. 씨와 흙이 잘 연합하도록 필수요소 가운데 퇴비를 들 수 있다. 퇴비가 필수적인 요소지만 모든 퇴비가 다 좋을 수 없다. 자기가 죽지 않고, 완전히 살아있는 퇴비는 오히려 씨와 흙이 연합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한다. 퇴비가 온전히 썩고, 발효하여 이전의 성질과 전혀 다른 존재만이 씨와 흙을 결합하는 물질로 변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죽고, 전혀 다른 생명으로 전혀 이질적 존재 같은 두 존재(씨/흙)에게 씨가 되고 흙이 되어 연합을 이룬다. 놀라운 생명의 신비다. 이런 촉매적 원리가 선교사의 원리라는 사실은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는 표현과 한 알의 밀이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실제적인가를 보여준다. 선교사의 위치가 생명의 연합을 향한 실질적인 예가 된다. 연합은 생명 세계의 현상이고, 그 현상으로 세상은 예수의 신성한 생명으로 뒤덮일 날을 언제나 고대하며 우리는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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