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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우리의 장막터: 더 넓게, 더 길게, 더 굳게! | 김태현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19.06.25 17:5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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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본부장 칼럼
우리의 장막터: 더 넓게, 더 길게, 더 굳게!(사 54:2)
The Place of our Tent: Wider!, longer!, stronger!
김태현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네 장막 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이사야 54:2)

 

바울선교회 제17차 수련회 주제는 “우리의 장막 터: 더 넓게(Wider), 더 길게(Longer), 더 굳게(Stronger)”이다. 이 말은 우리의 장막 터를 “일면에서 다면으로, 특정 방위에서 전방위로, 평면에서 입체적으로”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당위성에서 이 주제를 선택했다. 이제 바우리는 지난 33년 동안 선교 인력이 92개국에 걸쳐 470여 명이 전 세계를 내딛게 되었다. 놀라운 성장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 안주할 수 없다. 왜냐면 생명은 조건만 갖춰지면 그 확장성이 무한대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세상 끝날까지 뻗어 가야 하고, 급기야 온 누리를 덮어야 한다. 이번 수련회에 이사야가 전해준 예언적 말씀이 우리의 체험적 간증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이 칼럼을 쓴다.

 

BC 586년경, 선민 유다는 바벨론에서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이다. 도저히 스스로 지탱할 수조차 없는 자신들의 장막의 터를 ‘오히려 더 넓히라, 더 길게 뻗어라, 더 견고하게 하라’는 요구는 자기들이 지금 겪고 있는 상황과는 모순된다. 이 텍스트의 핵심은 절망의 상황에서 비춰주는 희망의 계시이다. 다음 세대를 이어갈 자식이 없다는 사실은 낙담 그 자체다. 고대사회의 계보와 계승적 사회 관점에서 볼 때, 이보다 더 실망스러운 일은 없다. 자기 후사를 가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다말의 이야기가 불임여성의 갈망을 말해준다.

 

오늘의 사회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혼돈이 결코 이스라엘이 처한 그것보다 경하지 않다. 우리를 둘러싼 주위 상황은 여전히 암울하다. 이 절망을 딛고 소망으로 내디딜 수 있는 동력은 오롯이 여호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과 우리가 처한 환경을 형태적으로 등치 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지만, 그 적용 범위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더 넓게(Wider)
이 단어가 주는 일차적 함의는 공간적 수용력이다. 우리의 공간이 넓어야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이 옹색하면 마음과는 달리 넉넉함이 나올 수 없다. 그만큼 넉넉함은 우리의 운신의 폭을 넓혀준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이라.”(3절) 이 말씀의 예언은 무수한 이방인이 그들의 장막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예언인가? 자민족 중심의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땅에서 디아스포라로 살면서 장차 이방인들도 자기들의 장막에 들어오고 자기들과 같은 선민으로 자리매김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장막 터를 넓히라는 명령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세계선교 명령과 같다. 모든 민족이 우리 장막 안에 거할 만큼 더 넓어져야 한다. 이민족들이 우리의 장막 문을 드나들며, 꼴을 먹는 자(요10:9)들이 된다면 우리의 선교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더 길게(Longer)
이 단어를 통해 얻고자 하는 속내는 바우리가 시간상으로 장수하는 문제다. 바우리의 장수는 지금이 아니다. 다음 세대를 통해서 증명된다. 지금 세대와 다음 세대가 단절되면 소망이 없다. 씨를 기대할 수 없는 남편 없는 여인이 어찌 절망이 아닌가? 여인은 씨를 받아 후대를 낳아야 한다. 그러므로 낙담의 시대에 이사야가 주는 희망의 메시지가 이번 수련회 주제다.

 

“즐거워하여라. 아기 못 낳는 여인이여, 소리 높여 외쳐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인이여, 홀로 사는 여인의 자녀가 남편 있는 여인의 자녀보다 더 많으리라.”(갈 4:27)

 

바우리가 더 길게 가기 위해서는 선교지에서 사역의 위임과 이양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 이런 위임과 이양이 없는 사역은 기껏해야 나 자신으로 수명을 다하게 된다. 이것이 불임이고, 잉태하지 못한 여인의 현상이다. 정진규 시인은 바다가 수만 년 동안 저렇게 싱싱하고 푸르게 유지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져놓고, 다음과 같이 답을 제시한다. 앞 물결이 뒷물결에 자리를 내주키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 존재의 탈영토화다. 낡은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은 언제나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우리가 배설한 똥의 성질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더 길게(longer)’는 바우리의 지속성과 연속성에 관한 문제다.

 

더 굳게(Stronger)
우리는 바우리 정신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다. ‘바우리’라면 국내/국외 훈련의 과정을 거쳐 반복과 지속을 통해, 이 바우리 정신을 체화(體化)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래서 우리는 바우리 정신을 우리의 DNA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DNA는 나의 몸을 구성하는 기본 핵이 된다. 따라서 이 단어 ‘굳게’를 바우리 정신 강화의 의미로 적용하고 싶다. 이것은 우리의 성숙으로 연결된다. 지금까지 바우리는 넓게 뻗어왔고, 여기까지 33년 동안 걸어왔다. 이제는 허우대만 멀쩡한 몸매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골다공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근육질을 길러야 한다. 이 생리적 전환점을 맞이하여 깊은 자성적숙고와 함께 머리를 맞대는 열린 시간을 기대해 본다. 벌거벗었으나 판단 받지 않고, 서로를 품으며 세워주는 수련회를 기대한다. 이제 바우리는 성장을 넘어 성숙으로 진입할 때다.

 

우리가 처한 오늘의 선교환경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한국선교가 식어가고 있다고 한다. 한국교회에 활활 타오르는 선교의 불을 지펴야 할 책무를 가지고 우리는 여기 있다. 이 일을 위해 우리가 불쏘시개로 드리자. 아직도 하나님의 기회는 여전히 여기 한국 땅에 머물고 있다. 풍전등화와 같은 소돔의 운명이 의인 열 명의 부재에 달려있었던 것처럼, 이 시대를 살리겠다는 헌신 된 일단의 무리만 있다면 다시 한국선교를 살릴 수 있다. 우리의 장막 터를 넓게, 길게, 굳게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의 장막에 지구촌 모든 민족이 들어와서 우리와 함께 거하는 하나님의 처소를 소망한다.


국제본부장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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