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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언어의 혼잡/방언 | 김태현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18.11.06 17:5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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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혼잡/방언
김태현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말을 섞는 것은 살을 섞는 것보다 관능적인 행위다. 나는 섹스보다 대화가 더 심각한 인간관계라고 생각한다. 말이 통한 다음에 올 천국과 파국을 알기에, 되도록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엮이는 것만큼 재앙도 없다.” (정희진의 어떤 메모, 〈지배하는 치유자〉) 그렇다. 사실 살을 섞는 일은 배우자 외에는 문명사회의 금기사항이지만, 말을 섞는 일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엮어주는 교량이 된다. 어떤 사람을 아무리 많이 보았을 지라도 말을 섞기까지는 그저 피상적 지인(知人, acquaintance)에 불과하다. 말을 섞기 시작할 때부터 관계는 사회적으로 발전하며 친밀한 단계로 들어간다. 인간이 갖춘 능력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도구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수단이 언어다. 어린아이는 신체발달과 더불어, 언어가 동반되어야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언어를 통해 거절, 수락, 자기표현, 소원 등의 뜻을 전달할 수 있다. 말이란 존재의 내면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산다”는 것도 기계적인 성경 암송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말씀을 내 속에 내면화라는 반복된 과정을 밟아 그 말씀이 인격화 되고, 마침내 밖으로 나타내는 것까지 포함하는 언어의 여정이라고 본다. 이것이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는 말씀의 속뜻이 아닐까? 이래서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표현을 썼다.

 

세상에는 말이 무성하다. 밖에 떠도는 말들을 우리는 내뱉기도 하고 들이마시기도 한다. 그리고 그 말들은 세상에 떠돌아다니면서 만물을 지배한다. 말 때문에 행복과 불행이 나뉘고, 말 때문에 아군과 우군이 아우성이다. 대기 중에 산소를 들이마셔서 나의 생명체를 유지하듯이 우리 주위에 있는 말로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일을 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소통하고 문명을 일구었으며 공동체를 존속 혹은 확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의 거의 모든 재앙은 혓바닥에서 나온다. 오늘날의 수많은 ‘악플’ 홍수에서 보듯이 언어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사정없이 파괴하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이래서 야고보 사도의 언어에 대한 경고는 여전히 현실적 공명(共鳴)을 준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야고보서 3:6)

 

상상해 보자. 바벨성(창 11:1-9)과 같은 대업을 완수하는 데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을! 언어의 혼잡은 일의 성사를 당연히 그르친다. 관계의 첫걸음은 말이 통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부부간, 부모와 자식 간, 교우 간, 사회구성원 간 모두 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결속하고 일을 성취해 간다. 왜 분란이 생기는가? 말이 안 통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로 ‘안 통한다, 꽉 막혔다(불통)’는 말과 같다. 이래서 초기 인류 기록들이 ‘이민족(異民族)’이라는 표현보다는 주로 ‘이어족(異語族)’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점들이 흥미롭다. 고대 ‘문명인’들은 자기들 기준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들을 ‘야만인’들이라고 일컬었다.

 

나는 어떤 해외 교포 교회를 알고 있다. 여전도회 주관으로 김치를 담다가 한쪽은 노인들을 위해 싱겁게 담아야 한다는 의견과 또 다른 쪽은 젊은이들을 위하여 맵고 짭짤하게 담아야 한다고 옥신각신하다가 서로 싸움이 벌어져 급기야 교회가 쪼개지고 말았다. 참 우스운 얘기지만 실화다. 한쪽도 나무랄 수 없다. 모두가 교회를 위한 것이었으리라. 한쪽은 노인들의 건강을 챙기려는 효심이 발동했을 것이고, 반대로, 노인들의 입맛에는 다소 맞지 않지만, 젊은이들의 성향에 맞추어 교회를 확장하자는 선교적 함의(含意)가 그 저변에 있었으리라고 의미 부여를 하고 싶다. 그러나 결과는 파행이었고 바벨탑처럼 붕괴를 맞이하였다. 이것이 바벨탑이다. 언어의 혼잡 결과다. 같은 말을 하지만 서로 알아듣지 못한다. 언어의 혼잡이 심화하여 결국 쌓아 올리고자 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바벨탑)는 붕괴한다. 외국어를 말해서 못 알아듣는 게 아니다. 같은 한국말을 하는데 서로 못 알아들어 분쟁하고 싸운다. 이 언어의 혼잡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고 교회가 갈라지고 국가의 균열이 심각하다.

 

반면에 바벨탑의 언어와 대비되는 한 사건을 주목한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되어 있는 신약교회 태동에서 벌어지는 언어의 통일적 사건이다. 유월절(생명의 씨 뿌림)의 완성이 오순절(생명의 추수)이라고 볼 때, 오순절 방언 사건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으로 보인다. 오순절 날에 모인 자들의 지역적 출신 배경을 보면, 도저히 서로 언어소통이 불가능하였다. 보라! 몇 나라 언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이 모였던가? 기록된 지역 이름을 세어보면 대충 14개 지역 방언으로 이루어진 다중언어 청중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외국 말을 자기들의 난 곳 방언으로 알아들었다니 기이할 뿐이다. 나는 1989년 가을쯤 이스라엘 하이파 근처 해안가에 있는 기브츠 공동체에서 4개월 동안 자원봉사자로 일한 경험이 있다. 그때 기브츠 공동체에 사는 유대인들은 러시아 출신, 남미 출신, 동유럽 출신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1세대들은 그들의 출생언어가 다르므로 소통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보았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언어의 통일을 맛보았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오순절에 첫 교회의 시작 징후가 방언이었다. 서로가 각자의 방언(언어)을 말하는데 신기하게도 자기네 태생 언어로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가시적 교회의 모습이 보인다. 하나님 나라, 어린양의 세계는 언어가 통일되는 세계이다. 상상해 보라 서로 다른 말을 하는 데도, 서로 일치하고 아멘이 되는 세계를! 이것이 서로 물고 뜯어 우격다짐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피투성이의 바벨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바벨의 세계는, 말은 같은데 서로 통하지 않고, 교회는 말이 다르지만, 서로 통하는 사회다. 즉 몸의 다양성이 오히려 몸의 풍성함을 드러낸다. 다르지만 서로 ‘아멘’ 할 수 있는 세계가 교회다. 세상은 언어가 같으면서도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망한다. 바벨성에서는 내가 쌓아 올린 것을 가지고 내가 일등을 해야 하고, 반드시 성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일찍이 이러한 깨달음을 설파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을 ‘화합’에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자(君子)는 주위와 부화뇌동(附和雷同)을 하지 않지만 화합하고, 소자(小子)는 부화뇌동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작금의 우리네가 처한 선교환경의 다양성과 상호관계의 난삽(難澁)함이 이중나선처럼 얽혀 뒤틀릴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쏟아내는 말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 하나로 알아들을 수 있는 천국 언어(방언)로 소통하자! 이 방언만이 나와 이웃 그리고 열국을 살리는 사도로 증명된다. ‘질그릇 속에 있는 보배’만 우리가 표현할 언어이다. 오직 질그릇의 운명은 보배의 가치로만 그 값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나의 ‘질그릇’ 됨이나 이웃의 그릇을 평가할 시간이 없다. 오직 우리의 입술로 그 ‘보배’만 표현하고 증거하자. 이것이 부름 받은 자의 본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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