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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직선의 삶, 곡선의 삶 | 김태현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18.06.29 17:5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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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본부장 칼럼

직선의 삶, 곡선의 삶

김태현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하나님은 자연 속에 자신의 속성을 담아 놓았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은 그의 하신 일을 나타낸다.(시19:1) 한편 인간은 생활양식의 반복을 통해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 속에는 인간 속성의 어떠함이 절절히 묻어난다. 하나님은 자연(Nature)을 만들고 사람은 문화(Culture)를 만들어 낸다. 자연은 창조주의 반영이고 문화는 인간의 궤적(軌迹)이다. 흥미로운 것은 자연의 형태는 곡선으로 표현되고, 사람의 문화적 진화는 끊임없이 직선을 만들어 간다. 인간의 문화는 사람의 편리(便利)를 쫓아 끊임없는 수정과 반복을 거쳐 진보한다.

 

곡선은 멀리 볼 수 없어, 그날그날을 누리며 과정(過程)을 산다. 직선은 앞이 뚫려, 앞날을 예측하며 목표지향적이다. 곡선에서는 내일 일을 알 수 없다. 한 날의 영광과 괴로움은 그 날로 충분하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서스펜스보다는 오늘 보이는 삶의 과정을 즐긴다. 시골길이나 들길을 보라, 농지개량이나 인간의 편리를 위한 계획도로가 있기 전, 모두 꼬불꼬불한 곡선이었다. 그 곡선의 길을 걸으며 땅도 밟고, 꽃도 즐기고, 식물도 익히고, 야생동물들과도 눈길을 교감하였다. 그 곡선의 길을 따라 사람들을 만나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웃이 되었다. 지금은 그 옛길이 없어지고 빠른 자동차 길만 휑하게 놓여있다. 누가 이웃인지 알 수도 없고, 다만 일정을 따라 목적지에 도착하여, 일(Target)만 수행하면 된다. 삶의 과정에서 만남과 서사 즉, 삶의 스토리가 사라졌다.
서울을 갈 때도 고속버스나 KTX를 타고 씽~ 하고 목적지인 서울에 도착한다. 옛날과 비교하면 얼마나 빠르고 편하게 되었는지! 한편, 한양을 가기 위해 괴나리봇짐 지고 산과 골짜기인 곡선의 길을 걸어간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그 곡선의 길이 가정이지만, 우리네 조상들은 그게 현실이었다. 몇 날 며칠이 걸려 목적지인 한양에 도착했다. 그러나 가려는 목표가 한양이었지만, 그 곡선을 따라 걷는 과정에서 만난 자연, 풍습, 인습, 자연의 변화, 지리적 변형, 심지어 계절의 변화까지 다양한 경험적 각고(刻苦)를 통해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그 과정은 생산적 삶의 여유를 지닌 공유로 이웃과 엮어졌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픽션일 수가 없다.

 

강은 산천을 따라 굽이굽이 흐른다. 강줄기는 물의 유속(流速)을 스스로 조절한다.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천연적 강의 지형은 자정과 조절능력이 있다. 인간이 만들어 놓지 않아도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강줄기다. 그 강물에 각종 어류와 동식물이 어우러져 산다. 생태계의 젖줄이 된다. 인류문명도 그런 강줄기를 따라 동거해 왔다. 그런 곡선의 강줄기를 곧게 펴서 물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려는 아이디어(직선)는, 다분히 경제적인 논리였다. 그 결과 강의 생명력은 서서히 둔화하여 죽음의 강으로 변했다. 자연의 곡선을 인위적 직선으로 바꾸어,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단선적인 꾀는 실패로 귀결되었다. 곡선(자연)을 직선(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결과다.

 

오늘 직선의 삶은 신속과 편리를 가져오고, 물리적 거리를 현저하게 좁혀 놓았지만, 인간의 피로감은 더 심화하고 있다. 결코, 편리하고 빠른 것이 인간에게 안식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증험(證驗)이다. 이것이 현대 인류가 만든 이기(利器)의 어두운 면이다. 하나님이 만든 것은 쉼과 평온을 주지만, 사람이 만든 것은 그럴싸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피폐(疲弊)라는 아우라가 둘러있다. 이것이 최첨단 문명의 이기 속에 사는 현대인들이 피곤으로 시달리는 이유다. 곡선의 느리고 불편함 속에는, 여유와 치유를 통한 행객(行客)의 과정을 만들어 낸다. 반면 직선의 길은 신속하고 편리하지만, 쫓기는 긴박감으로 노곤하다. 산업사회 이전에 과로사(過勞死)는 없었다고 한다. 옛적의 경제의 주된 요소는 농사였다. 농사철이 지나면 한겨울을 맞게 되고, 동한기에는 노동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 시대는 무한 이윤을 달성하기 위해 폭주하는 직선적 경제 작동방식이 과로사를 만들어낸다.

 

농장은 곡선이고 공장은 직선으로 유비할 수 있다. 농사는 하루아침에 제조되는 것이 아니다. 늦은 비와 이른 비를 기다려서 성장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생산품이 농산물이다. 그 과정이 곡선이다. 한편, 공산품은 생산라인이라는 직선을 통해 노동자가 부품화되어 생산된다. 자동화되면 될수록 빠르고 쉽다. 그러나 생산설비의 부속품에 불과한 노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피곤을 가져다준다. 농산물은 곡선의 과정을 통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나누어지고 그 시간적 역할이 다르다. 느리지만 변화가 있고 시간 자체가 과정이다. 그러나 공산품은 생산의 목표가 설정되어 있고, 그 목표를 채우기 위한 온 힘을 쏟아야 한다. 과정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목표지향적이다. 이렇게 곡선과 직선의 삶은 다르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관계는 직선 위에 놓여있었다. 아브라함과 하갈이라는 만남을 통해, 생산 가능성을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남녀 둘 다 생산능력을 갖췄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다. 그러나 약속의 후사가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곡선이기 때문이다. 사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연령과 생리를 고려해 볼 때 약속의 후사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누가 봐도 그것은 현실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눈에 보이고 충분히 예측 가능한 수단을 동원한 게 직선적인 방법이었다. 그것이 생산능력이 있는 젊은 하갈을 취한 일이였다. 그녀를 취하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은 들어맞았다. 이스마엘을 얻었다. 그러나 돌고 돌아, 굽이굽이 흐르다가, 전혀 불가능한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게 된 것은 곡선적 성취다.
직선과 곡선의 만남은 인간을 혼돈 가운데 빠지게 한다는 교훈을, 이삭과 이스마엘 관계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곡선과 직선이라는 명제가 우리의 선교 생활에도 실제적인 적용이 될 수 있다. 선교사는 씨(그리스도)를 토양(선교지)에 심는 농부와 같다. 공장식 직선의 방법이 아니라, 농장식 곡선의 원리로 씨앗을 뿌릴 때 진정한 의미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믿는다. 생명의 번식과정을 우리의 신속하고 편리한 직선의 방식이 아닌, 인내로 기다리며 자연의 꾸며진 지형을 따라 과정을 밟아 갈 때만이 열매를 거둘 수 있다. 하루아침에 급조된 열매는 대량생산은 가능할지 몰라도, 늦은 비와 이른 비를 맞고 자란 뿌리 깊은 나무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선교지에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기초를 밟아가며, 현지에 뿌리를 내리고 때를 기다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비로소, 선교사는 잠재력을 수반한 생명력 있는 선교적 돌파구(Missiological breakthrough)를 찾아 그 사회 전반을 변혁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단선적이고 직선의 선교에서, 다중문화적이고 과정 중심의 곡선적 선교 패러다임은 당연히 가는 사람 위주의 패권적 선교 패러다임과는 거리가 멀다.

 

국제본부장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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