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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칼럼]2017년 권역별 수련회에 거는 기대 -믿음, 공유, 연대, 실행- | 김태현 국제본부장
BY 관리자2017.04.26 18: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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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본부장 칼럼

2017년 권역별 수련회에 거는 기대 -믿음, 공유, 연대, 실행-

김태현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바울선교회는 '절대믿음'에 근간을 두고 지난 31년을 지내왔다. 어느 것 하나 확보해놓고 그 위에 우리의 믿음이 기반을 세우지 않았다. '절대믿음' 정신에 기초를 둔, 지난 바우리 역사를 통한 영적, 선교적 실증은 언제나 "하나님은 신실하셨습니다." 라는 고백을 끌어낸다. 매 2년 간격으로 치른 지난 15차례의 수련회는 매번 우리의 믿음선교를 실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 그때마다 우리의 불안과 초조는 어김없이 안도와 평안으로 이어지곤 했다. 끼니를 때워야 하는 수천의 장정(壯丁)을 앞에 놓고 산술적 계산과 신앙적 믿음 사이에서 경계를 넘나들었고, 난공불락 거구 골리앗을 앞에 두고 서로 눈치를 교환하며, 잔뜩 주눅이 든 병사들의 모습이었지만, 그때마다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넘치는 공급을 맛보았다.(엡 3:20) 이런 믿음의 경험들을 반복하면서 바우리는 믿음의 근육질을 키워왔다.

 

수련회는 함께 모여 공유의 장을 가진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상호교통은 우리 바우리를 그물(緣)로 엮어준다. 이 그물은 엮는 일이 오늘의 용어로 '네트워크'다. 수련회를 통해 우리의 관계망을 수선하고 보강하여 새 판을 짜보자. 각자는 단순한 수동적 소비자의 자세에서 정보를 공동 생산하는 집단적 일원(collective member)으로 자리매김을 해보자. 좀비(Zombie)처럼 '살아있는 시체'로 그냥 시간을 보내고 소비하는 자리가 아니라, 개인의 벙커에서 나와 '우리'라는 공론의 광장으로 나오는 시장(時場)되었으면 한다. 나아가 바우리 수련회가 상호 교감(ethos), 감정의 표현(pathos), 논리적 타당성(logos)이 넘친 풍성한 영적 먹거리로 충만하기를 기대한다. 행여나, 타성(惰性)에 젖은 마음가짐으로 수련회 참여에 마침표를 찍자. 바우리 역사 31년을 지나면서 '새롭고, 산길'에 걸맞은 질적인 수련회로 발돋움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 모두 한마당 잔치(수련회)에 참여하여 풍요롭고 기름진 음식에 취하며, 감사와 사랑으로 표현되는 수련회를 꿈꾸어 본다.

 

흔히 고립을 묘사할 때 '갈라파고스 증후군(Galapagos Syndrome)'이라고 한다. 이는 단순히 제조업과 시장과의 관계에서만 설명이 국한되지 않고, 우리의 전반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국제무대를 '주름잡고' 있는 선교사의 갈라파고스 현상은 더 두드러지고 있는 현상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마치 홍수 때에 마실 물이 없는 것과 유사하가. 군중 속에 고독과 풍요 속에 빈곤과도 같은 경험이다. 선교사의 만성화 된 각개약진 시스템이 연대의 발목을 잡는 경우다. 홀로서기는 속도감은 있으나 함께 지어져 가는 데는 약점이 많다. 외떨어진 선교는 '성장 엔진'의 소진과 함께, '연료'인 후원도 바닥나게 마련이다. 이것이 지난 30여 년간 우리가 누려온 '선교 보너스(Mission Bonus)'에 안착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시대에 뒤처진 행동은 '시대착오적'이라 불리고, 익숙한 과거에 젖어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은 '낙오자'가 된다. 낡고 익숙한 것에 대한 집착은 결국 수명을 다하고 세월을 따라 그 존재가 화석화되어 갈 뿐이다. 살아있는 생물체는 항상 변화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다.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 주위 변화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 고집대로 가는 마이웨이식 태도를 경계한다. 수련회를 통해 상호 만남과 교통은 이런 위험에서 바우리를 옮겨준다.

 

우리네는 판만 깔아놓으면 좌우대립으로 나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옳으니 너는 틀렸다는 식이다. 선거철만 되면 많은 사람이 이성을 잃는다.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는 항상 옳고, 똑똑하고, 구국의 영웅이다. 대들보 같은 흠결도 "세상에 안 그런 놈 어디 있느냐"고 하고, 티끌만 한 장점을 "세상에 이런 사람 또 있느냐"고 한다. 무조건적이다. 어디에도 공존과 화평은 찾아볼 수 없고, 대립과 반목만 난무한다. 이것이 세상이다. 우리 말의 겸손할 겸(謙)은 말씀 언(言)과 아우를 겸(兼)이 합쳐진 자가. 말할 때 상대를 배려해서 하면 자연 겸손해진다는 뜻이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삶의 모델을 체험하자.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 모든 위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자.(빌 2: 1-5) 각 대륙과 지역에서 모여든 정든 바우리 가족이 한 아버지 앞에 우리 자신을 동일시(형제, 자매)하며 서로서로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교제이다. 나의 옮음을 내놓고 뻐길 시간도 없고, 너의 틀림을 놓고 판단할 시간도 없다. 한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만으로도 모든 옮음과 다름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내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상대의 말을 들어주고 공감을 하면서 함께 예배하는 자로 엎드리는 시간을 가지자.

 

수련회 동안 다소 불편해도 감사하자. 원래 바우리 정신은 "불편하게 살자"와 깊이 연동되어 있다. 믿음선교도, 수도사적 선교사도 모두 이런 삶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는 것은 궁핍과 풍부함을 경험한 인격의 선언적 간증이다. 주님의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풍부 뿐 아니라 궁핍과 불편에서도 동일한 순응을 표현한다. 바우리 정신은 이론이 아니다. 관계 속에서 상호 결함을 통해 존재하는 유기적 생명체이다. 어느 하나만 떼어 "생명이 이것이다"고 주장하면 곧 그 생명력을 상실하고 만다. 부분이 연결되어 전체를 이룬다. 즉, 하나가 전체속에서, 전체가 하나 속에서, 그 속성을 드러내고, 기능할 때 비로소 우리의 몸을 이루는 것과 같다. 며칠 안 되는 기간에 좀 불편해도 감사함으로 우리를 표현하고, 다른 사람을 우리의 감사의 표현 속에 함께 섞을 때 우리 수련회는 더욱 빛날 것이다.

바우리 정신은 심비(心碑)에 쓰여야 한다. 돌비에 쓴 문자(文字)는 결코 나와 하나가 될 수 없다. 심비에 쓰인 것만이 나의 생명이 된다. 나의 생명이 된 것은 그 생명의 어떠함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율법을 우리 속에 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은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하늘의 보화와 우리의 믿음이 결합하여 조성해 내는 풍성한 영적 잔치가 수련회 동안 우리의 만남을 통해 넘치기를 축원한다.

 

국제본부장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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