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권역 | 남수단  / Republic of South Sudan

남수단

The Republic of South udan

임선화 선교사(정리 및 보고 : 남수단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1. 일반정보
국명  남수단 공화국(The Republic of South Sudan)
독립  2011년 7월 9일 수단으로부터 독립
정치 형태  대통령제(현-살바 키르(딩카부족)
행정 구역  10개주 86개구
면적  644㎢(한반도의 2.9배)
인구  약 1000만(2015)
공용어  영어, 아랍어
수도  주바(Juba),인구 약 40만
1인당 국민소득  1,139$(2016)
기후  고온다습한 적도 기후
종교  카톨릭, 기독교(성공회), 토착기독교(32.9), 이슬람(6.2) 등
종족  딩카족(15%), 누에르족(12%) 등(약 200여 부족, 언어 구분 50개 부족으로 구성)
주요 자원  농업(유목), 석유(원유 의존도 98%)
대한 관계  2013년 3월부터 UN 남수단 임무단(United Nations Mission in South Sudan; UNMISS)의 일원으로 한빛부대가 남수단 재건지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병되어 임무수행중.

 

2. 민족, 종교
 대부분의 아프리카가 그러하듯이 남수단 또한 그들의 부족과 정치와 종교와 외교관계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 등을 따로 분류하여 나누기가 어렵다. 남수단 보고에 있어서 다소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에 대하여 양해를 부탁드린다.
 인종으로는 닐로틱, 수단 및 반투니그로족과 같은 흑인이 절대다수다. 2015년 기준 인구수는 약 1천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2013년, 2015년에 내전으로 이웃 나라로 이동한 난민이 계속 늘고 있고 많은 생명을 잃어 실제 인구는 천만에 이르지 못한다. 남수단에는 200개가 넘는 부족들이 있는데, 크게 나일제족(Nilotic), 나일-함족(Nilo-Hamitic), 남서수단족(South-Western Sudanic)으로 나눌 수 있다. 남수단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일제족에는 딩카족(Dinka, 15%), 누에르족(Nuer, 12%), 마디족(Mardi), 아촐리족(Acholi), 랑고족(Lango), 오투호족(Otuho)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크게 사용하는 언어를 기준으로 부족은 50개 부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남수단에 거주하는 다수의 종족은 15~19세기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남수단인들은 토착 종교(정령신앙)를 신봉하는 아프리카 문화가 우세하고, 가톨릭이 강하며 기독교인이 많다. 이슬람교도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수단과는 달리 남수단의 이슬람교도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남수단의 토착종교는 제국주의에 반대해서 나온 것으로 이들의 세계관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영혼의 힘’을 신봉하는 부족들도 많아서 점쟁이, 기우사(祈雨師), 주술사가 많은 영향력을 갖고 있다.

 

3. 정치
 국가 형태는 공화국이고, 정부 형태는 대통령제이다. 입법기관인 의회는 이원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국회의원 의석은 170석, 임기는 4년이다.
 남수단 정치 세력의 근간은 SPLM(수단인민해방운동)1)이다. SPLM은 1983년 수단 정부의 아프리카계 차별정책과 군정, 지나친 이슬람화 정책에 반기를 들고 결성되어 2005년까지 정부군과 2차 내전을 이끌었다. 2005년 1월 체결된 평화협정으로 남수단의 자치권이 인정되었을 때, SPLM의 창설자이자 지도자로 내전을 이끌었던 존가랑(John Garang)이 자치 정부의 대통령을 맡았다. 남수단 분리 독립의 기틀을 만듦으로써 남수단의 국부로 평가받는 존 가랑이 2005년 7월 의문의 헬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자, 당시 부통령을 맡았던 살파 키르 마야르디트(Salva Kiir Mayardit)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결국, 2011년 7월 9일 남수단이 수단으로부터 분리 독립하고, 살바 키르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현재 남수단 내각이 2015년 대통령 선거 일정을 연기하면서 살바 키르 현 대통령 임기를 2년 연장하여 2017년 7월 9일로 늦추기로 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반정부 세력을 이끄는 리크 마차르 전 부통령의 협상이 이렇다 할 진척을 보이지 못하는 가운데 이뤄졌다. 이후 2016년 7월 9일 독립기념일을 기점으로 수도 주바와 아래 지역으로 전쟁이 일어나고 계속 긴장상태에 있다. (카이로-연합뉴스)

 

4. 경제
 남수단의 경제 1인당 GDP는 2016년 기준 명목 1,139$로 국민의 90%는 하루 1$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남수단의 모든 경제는 70% 이상의 중앙정부 지원에 의존하며 국가 재원은 석유 수출 수입에 98% 이상 의존한다. 남수단의 경제는 1년 사이에 인플레가 1,000%가 올라 2015년 7월 100$=900파운드 하던 것이 2016년 7월 100$=9,000파운드가 되었다. 그야말로 남수단 화폐가 쓰레기가 된 셈이다. 물가 또한 1,000% 올라 남수단의 시장경제는 거의 마비되어 기능을 상실한 상태로 부정과 부패, 강도, 절도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남수단의 산업과 인프라는 매우 열악한 상태이다. 경제는 심하게 농업에 치중되어 있는데, 대부분 국민은 자급자족 농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재산권은 한시적이며, 시장이 제대로 조직되어 있지 않아 가격 변동을 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단 정부의 차별정책으로 인해 남수단 지역은 거의 개발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로 인해 자본과 공산품, 서비스 분야 등 많은 부분을 수단에 의존해왔다. 내전을 통해 그나마 있던 설탕·직물·시멘트 공장 등도 거의 파괴된 상태이다.
 남수단에는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가장 대표적인 자원은 석유로, 분리 이전 수단 석유생산량의 3/4에 해당하는 연간 50만 배럴에 달하는 석유를 생산하고 있다. 남수단 정부 예산의 98%가 석유로부터 들어올 정도로 석유 의존율이 높지만, 송유관과 수출항은 모두 수단에 몰려 있는 상태이다. 이 때문에 남수단 경제는 한동안 수단과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남수단에 유전이 4개가 있지만 2개의 유전은 부족 간의 갈등으로 개발,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외교적 관계, 그리고 채무이행에 있어서 많은 자원이 남수단 만의 것으로 그들의 경제에 활력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남수단은 여전히 해마다 4억 달러의 해외원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원조의 많은 부분이 전쟁을 위한 무기 구입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 부족으로 구성된 독재, 정권 확립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도로망이나 산업시설에 있어서 중국이 개입되어 있으며 정치에도 미국과 중국의 국정개입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양측이 하나가 되기란 더욱 어려운 듯하다. 또한, 남수단 상업은 중국과 인디아 그리고 아랍권의 사람들이 대부분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남수단을 위한 남수단 국민의 경제 자립에 있어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고민해 볼 문제이다. 또한, 상업을 위해 남수단에 들어온 사람들이 미칠 종교적인 영향에 있어서도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 될 일이다.

 

5. 사회, 문화
 씨족 공동체 사회로, 가깝고 먼 친척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생활하고 있다. 마을은 족장이 다스린다. 그러나 현재, 전쟁으로 인해 부족 간에 많은 이동과 피난이 있었고, 마을이 사라졌다. 또한, 독립 이후 접경 국가로의 난민 캠프로의 이동이 있어왔다. 전통적으로 성별, 나이, 지위에 따라 노동 영역이 달라지는데, 남성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여성들은 집안일을 한다. 대부분 노동인구는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다.
 오랜 내전과 심각한 경제 상황으로 인해 사회 곳곳에 가난이 팽배해 있다.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하루 1달러 정도로 연명할 만큼 주민들의 생활 수준은 아주 열악하다. 전기는 대부분 값비싼 디젤 발전기에 의해 생산되며, 수도 시설도 거의 없는 상태이다. 열악한 의료 사정 때문에 5세 미만 유아의 사망률이 11%에 이르고, 산모 사망률 또한 세계에서 가장 높다. 성인 문맹률 또한 75%에 이른다. 대부분의 방송은 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남수단의 문화에는 다양한 언어, 부족, 종교, 음식, 전통이 어우러져 있다. 남수단을 구성하고 있는 종족 가운데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딩카족이 15%로 주를 이루고 있다. 딩카족 사회는 남성이 사회를 통치하는 남성중심의 문화이다. 실상 일부다처제와 여성의 사회 활동이 제한된 문화이지만, 최근에는 여성의 사회 활동이 증가하고 있는 편이다. 이들 문화는 딸을 더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아들은 지참금이 나가는 짐이지만 딸은 길러준 보호자가 신랑 집에서 지참금을 받는 돈이기 때문이다. 내전 상황에서 수많은 고아가 생겼을 때 여아들은 친척과 이웃이 서로 데려가려고 하지만, 남아들은 거의 고아원으로 보내진다고 한다.

 

6. 남수단 역사
1) 독립이전 - 수단에 또 다른 나라 남수단
 18세기 수단은 영국·이집트의 공동관리라는 명분 아래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11년이 지난 1956년 수단은 영국과 이집트로부터 독립했다. 하르툼을 수도로 두는 수단 중앙 정부가 직접 통치하고 아랍계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수단과는 달리 남수단은 기독교와 토착 종교를 믿고 흑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으로 독립 이후 줄곧 내전을 거듭해 왔었다.
남수단의 최대 부족인 딩카와 누에르족 등 나일제족들은 10세기 이전에 지금의 남수단 지역으로 들어왔고, 15~19세기에 부족 이동을 하며 바르 엘 가잘(Bahr el Ghazal)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남수단에 속했던 잔데족은 16세기에 남수단에 들어와 서에콰토리안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크고 작은 국가들이 비교적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었으나 무역품을 조달하고 시장을 개척하려는 유럽인들의 야욕으로 인해 평화가 깨지고 말았다. 당시 남수단 지역은 노예, 금, 상아, 목재 등의 조달처가 되어 수많은 사람과 자원을 약탈당했다.
 1870년대에 이집트는 현재의 남수단 지역에 에콰토리아주(州)를 세우고 이곳을 식민지로 삼았다. 1882년 영국이 수단을 침략하였고, 1885년 수단 북부에 수립된 이슬람 국가의 군대가 이 지역을 침범하였으나 1898년 영국군이 이 세력을 몰아냈다. 1899년 수단 전 지역에 영국-이집트 공동통치가 시작됐다. 당시 영국은 수단 북부와 남부를 분리하여 통치하였는데 이때부터 현대의 남수단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47년 영국과 북부 수단, 남부 수단 대표자는 주바회의(Juba Conference)를 통해 두 지역을 하나의 식민지로 통합할 것을 합의하였으나 남부 수단은 이를 반기지 않았다.
 1956년 수단은 독립을 이루어 남부와 북부는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수단 북부는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계 민족, 남부는 토착 신앙과 기독교를 믿는 아프리카계 흑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인종·문화적인 이질감이 심했다. 이로 인해 1955년 남북 내전이 발생했고, 내전이 수습되지 않은 채 수단은 하나의 국가로 독립되었으나 남부와 북부는 한 국가라는 틀에서 공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북부 아랍계 중앙정부는 정치적 경험과 교육적 토대, 경제적 인프라가 열악한 남부를 정치와 개발에서 철저히 소외시켰고, 이슬람식 이름을 사용하도록 강요했으며 이슬람적인 법률과 문화를 강제적으로 확대시키려 했다. 이에 남수단인들이 반발하여 일어난 1차 내전은 1955년부터 1972년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중앙정부가 남부 수단에 이슬람 샤리아법을 적용하려고 하는 등 다시 이슬람화 정책을 추진하자 남부 수단 반군세력인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은 수단인민해방군(SPLA)을 조직해 저항했다. 결국, 1983년 남북 분리를 요구하며 시작된 2차 내전은 2005년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39년에 걸쳐 치른 두 차례의 내전으로 남수단에서만 25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500만 명에 이르는 피난민이 생겼다. 마침내 2005년 1월 포괄적 평화 협정 2005년 포괄적 평화 협정(Comprehensive Peace Agreement/CPA)2)이 체결, 2011년 1월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 투표인의 98%가 분리 독립을 찬성하여 2011년 7월 9일 남수단은 주권국가로 독립하였다. 이로써 유엔의 193번째 국가로 탄생하게 되었다.

 

2) 독립 이후
 가. 수단으로부터 분리 독립(2011.7.9)
 2011년 7월 9일 남수단은 "남수단 공화국"(The Republic of South Sudan)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함과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여 193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수단이라는 나라에서 종교와 인종갈등으로 56년간이라는 긴 내전을 겪었던 남수단은 군부로 추앙받던 인민해방군(Sudan People`s Liberation Amy: SPLA)의 존 가랑(Jhon Garang) 장군이 2005년 의문의 사고로 불의의 헬기 추락으로 숨진 뒤, 그 수하였던 살바 키르(Salva Kiir)와 리엑 마차르(Riek Machar)가 독립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독립투쟁을 주도한 수단인민해방군(Sudan People's Liberation Army, SPLA)의 지도자들이었지만, 이들 사이에는 뿌리 깊은 갈등이 내재하고 있었다. 여전히 자치 독립은 곤란을 겪고 있다. 많은 나라는 남수단이 독립해서 자립할 수 없는 국가라는 것을 예견하기도 했었다. 그것은 남수단에 교육, 정치, 경제, 국민의식, 농업, 산업 등의 인프라가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나라의 정권 자체가 나라보다 한 부족의 독재를 위한 주변의 견해도 있다.

 나. 끝나지 않은 전쟁 그리고 또 전쟁
 독립은 했으나 하나가 되기는 이렇게도 어려운가 보다. 여전히 부족 간의 갈등, 군벌 갈등으로 남수단은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수단에서의 56년간의 전쟁을 청산하고 표면적으로는 독립하였으나, 이후, 갈등이 계속되었고, 또다시 독립한 남수단에서의 내전의 도화선은 당겨졌다. 분쟁의 결정적 도화선이 된 것은 2013년 12월 14일부터 수도 주바에서 개최된 SPLM 민족해방위원회(National Liberation Council) 회의였다. 2013년 12월 15일 회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대통령 경호원들 중 살바 키르(Salva Kiir) 대통령 추종세력과 마차르(Riek Machar) 부통령 추종세력 간의 충돌이 벌어졌고, 대통령궁 인근에서 고강도 교전이 벌어졌다. 이 교전은 순식간에 주바를 넘어서 5개 주로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10,000여 명이 숨지고 민간인 70만 명이 피난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이 권력 갈등으로 인한 충돌이 여러 주로 확산된 이유는, 키르와 마차르가 다른 종족에 속함에 따라 불가피하게 종족 분쟁으로 번지는 양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족 간의 충돌은 군사적 교전에 멈추지 않고 점차 서로 상대 종족 주민을 처형하고 성폭행하는 등 복수극의 양상으로 비화되었다. 더욱이 이들이 주로 충돌하고 있는 지역은 유전지대로 반군들은 이곳을 장악하기 위해, 그리고 정부군은 이를 지키기 위해 반격하는 과정에서 충돌은 보다 격화되었다. 유니티주 주도인 벤티우(Bentiu), 종글레이주 주도 보르(Bor), 그리고 어퍼나일주 주도 말라칼(Malakal)을 탈환하기 위하여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뺏고 뺏기는 쟁탈전이 연일 계속되었다. 남수단 내전의 종식을 위해 UN(유럽연합), AU(아프리카연합) 등이 중재로 나서 휴전 협정에 힘을 썼으나, 휴전협정을 체결한 이후에도 충돌은 중단되지 않고 내전과 유혈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이 가운데 미국은 반군의 리엑 마차르를, 중국은 정부군의 살바키르를 지지하는 외교관계의 개입이 되어있다. 남수단 사람들은 이 모든 전쟁과 강대국들의 개입이 남수단 안에 매장되어 있는 어마어마한 석유 때문이라고 말한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1) 끝없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남수단의 2016년 7월 9일 남수단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다시 수도 주바를 중심으로 인근 여러 지역에까지 정부군과 반군의 교전이 이어졌다. 정부군이 살바키르 현 대통령과 리크 마차르 전 부통령은 독립 당시 동조자였지만, 서로의 이념 실현과 권력 유지를 목적으로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아프리카는 나라의 개념 우위에 부족이 우선한다는 것을 깨닫는 대목이다. 주바 밑으로 우간다 국경까지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많은 지역은 황폐해졌으며, 마을 주민이 대부분 우간다 국경 난민캠프로 이동해 왔다. 부족 간 폭력, 강간, 신체 절단, 방화, 소년병 징집으로 인한 인권유린과 악행이 계속되고 있다. 이곳 우간다 아주마니 난민캠프로 피난을 나온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다시 남수단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 또한, 남수단 선교를 위해 그곳에 정착을 준비하고 학교를 설립했던 선교사님도 마을에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군인들이 그곳에 진을 치고 있어서 집과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우간다 국경으로 나와 있다. 남수단 사람들은 이 전쟁이 오래 계속 지속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문제는 정부군과 반군이 다른 부족 사이로 들어가 이 전쟁이 계속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2) 남수단을 향한 하나님의 살아있는 선교
 가. 지리적 측면 - ‘이 민족은 내가 지명하였나니’  
 남수단의 독립은 남수단을 이슬람교도 중심의 북수단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전쟁의 가장 큰 이유로 종교적 갈등이 있었다. 남수단의 지리적 위치로 볼 때 아랍어를 사용하던 목축업자가 침입하면서 수단에 이슬람교가 도입되고 이슬람 국가가 되었지만, 수단의 적도 남쪽 지역은 열대병과 넓은 습지가 아랍의 진행을 막아, 영국식민지 지배하에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토착 종교 형태로 남아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적 차별과 경제적 착취와 차별을 경험한 남쪽의 기독교인과 토착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크게 저항을 하였다. 기독교 역사적 측면이나 선교적 측면으로 볼 때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이 북쪽에 수단은 이슬람 국가로서 2012년 다른 종교 종사자들을 모두 추방하였다. 또한, 모든 북아프리카3)는 이슬람화되었고 거대한 무슬림 지역이 되었다. 남수단 중심으로 서부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이다. 점차 이슬람화되어가고 있으며 이슬람 국가로 선포가 증가하고 있다. 동쪽으로 케냐,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심지어 우간다 수도 캄팔라만 해도 많은 이단이 유입되고 히잡을 쓴 무슬림들이 해마다 늘어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남수단은 아직 예외이다. 물론 소수의 이슬람의 인구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기독교의 뿌리가 깊다. 중요한 것은 수단을 제외하면 다른 신앙 간에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형태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나타나는 고유한 특징이다. 곧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종교적으로 활력의 땅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빠르게 확장되어 갔으나, 애니미즘도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 새롭게 혼합된 형태의 종교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수단은 여전히 기독교를 존중한다. 반군과 정부군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들도 목사(Pastor)에 대하여는 존중하고 그들의 생명은 쉽게 해치지 않는다. 남수단은 오랜 전쟁이 이유가 아니길 바라지만, 이 땅에는 다른 종교가 뿌리내리기란 쉽지 않다. 또한, 독립 이후 종교적인 갈등으로 인한 내전이 아니다.
 더 멀리 접근하여 볼 때 지리적으로 수단 우위에 바로 이집트, 그 우위에 터키 위에 아랍권의 국가로서 남수단은 숫자적으로 작고 여전히 전쟁으로 인하여 어려움 가운데 있으나 이슬람의 남하를 막고 있는 성벽과 같다. 성벽은 성벽 자체로서 역할을 한다. 한 가지 이유를 더 하면 남수단 사람들은 영국과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다. 곧, 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영어와 아랍어를 구사할 수 있다. 특별히, 교회 지도자들은 그렇다. 이것은 남수단이 이슬람의 남하를 막는 성벽도 될 수 있지만 아라빅을 사용하는 다른 나라에까지 복음을 전하는 선교 중심지로서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멀리 볼 때 실크로드를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의 선교가 이루어졌듯이 남수단이 이 길로 연결이 되는 또 다른 시작의 기독교 성지의 시작이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남수단 민족은 오랜 전쟁과 핍박의 역사를 통해 기독교인이 받았던 핍박보다 더한 삶을 질기게도 이기며 살아왔다. 이들이 오랜 전쟁 끝에 독립을 얻은 것은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이유가 또한 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이 나라가 복음의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갈 길이 참으로 멀다.

 

나. 역사적 측면 - ‘역사를 통해 증거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
 남수단의 역사는 이스라엘 역사와 사뭇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남수단을 선교지로 지원하면서부터 하나님께 계속하는 질문이 있다. 남수단의 오랜 전쟁의 역사를 보면서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가엾고 불쌍한 남수단의 현실을 보면서... 왜? 왜? 라는 질문을 몇 년째 계속해오고 있다. 남수단은 독립 이전과 이후로 거의 60년에 가까운 내전을 겪고 있다. 너무도 피를 많이 흘린 민족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 이 땅에 하나님을 아는 이들조차 피를 묻히고 죄에서 떠나질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보다 부족의 지도자와 부족의 명령이 우선한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내 부족이 우선한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 소견대로 하나님의 뜻은 제쳐 두고 싸우고 있다.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다. “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더욱 기도하라” 하였다. 그러나 각기 부족의 기질과 이기심은 깊은 내재된 세계관이 우선이 되어 복수의 칼을 먼저 든다. 그리고 용서를 모른다. 여전히 죄를 짓고 있다.
 이들의 60년의 내전의 역사가 어쩌면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 가운데로 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닮았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치스럽고 가슴 아픈 포로 된 역사가 70년!
 혹 남수단의 이 내전도 70년이 되어서야 끝나지 않을까? 아니 이후에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암흑기가 있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예비하는 그 시간만큼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 하나님의 섭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남수단 사람들의 기질을 사용하신다면, 그들의 오랜 고통과 고난의 역사를 들어 정금같이 단련하여 사용하신다면,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진리를 모른 채 그릇 가기도 하지만 그것은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함이니 혹 그들이 이 내전의 시간을 통하여 깨닫는다면 다시 다가올 그리스도인을 향한 핍박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낼 민족이 아닐까? 남하해오는 이슬람과 북상해오는 혼합종교와 각종 이단으로부터 버텨내고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스라엘의 포로 역사와 예수님이 오신 이후 기독교를 향한 핍박 속에 하나님은 잠잠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약속처럼 그 안에는 회복과 구원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을 그대로 이 땅에 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히 여전히 이 땅 가운데 임하고 있다. 그리하기에 눈물은 흘리고 아파는 하지만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

 

다. 영적 측면 - ‘남수단 난민은 이스라엘의 디아스포라’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를 빼앗기고, 왕을 빼앗기고 온갖 핍박과 수치를 당했지만, 그곳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살아 그들 안에 숨 쉬고 있었다. 그 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중에 십 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황폐화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4)

 

 그곳에 여전히 남겨진 그루터기는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회개와 자복, 그리고 회복, 이스라엘의 재건이 계획되고 있었다. 또한, 그 안에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온 인류의 구원이 이미 선포되고 준비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하루가 지날수록 하루가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준비! 준비이다. 어쩌면 남수단 또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황폐화가 있을지 모른다. 바로 거룩한 씨가 그 땅에 그루터기로 구분될 때까지...
 현재 남수단의 내전으로 인한 난민은 200만 명에 가깝다. 처지가 안타깝고 아픈 것은 난민이나 여전히 남수단에 살고 있는 국민이나 마찬가지이다. 아프리카에서 추위 때문에 죽었다면 믿겠는가? 인근에 난민캠프가 마련되어 있지만 날마다 늘어나는 난민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이다. 또한, 계속 구호물품이나 구제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여전히 어려운 실정에 처한 난민들이다.

 

 남수단은 어떠한가? 먹을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12월부터 찾아온 건기의 무더위와 먼지와 굶주림 속에서 어찌 살아갈지 막막하다. 정부군과 반군의 서로 간에 고문, 여성 집단 강간, 방화, 신체 절단 등 끔찍한 만행들이 저질러지고 있다. 또한, 소년들은 공부 대신 정부군에 대한 증오를 세뇌받고 전선에 내보내져 반군의 총알받이가 되었고, 소녀들은 그들의 성 노리개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어떻게 여기에다 하나님의 뜻을 부여하여 위로를 구하고 또 위로하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이 죄악 된 세상에 선하신 분, 그리고 이 땅을 악으로부터 구하고 영원한 자유를 주실 분은 우리 주님 한 분이시기에 오직 그분을 찾고 간구하게 된다.
 하나님은 2013년 남수단에 일어난 아픔에 대하여 그 땅을 위해 기도를 모으셨다. 이후로 놀랍게도 남수단에 직접 들어가진 못했지만, 남수단을 지원하는 선교사가 늘어나고 있으며, 그만큼 기도가 많이 모아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16년 7월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고, 많은 난민이 발생하였다. 여기서 무언가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얻어야 했다. 그때 남수단 난민의 상황을 보며 ‘디아스포라(Diaspora)5)’를 떠올리게 되었다. 남수단은 현재 행정구역이 10개 주 86개 구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한 행정구역에 9만 정도가 거주하며 대부분 같은 부족끼리 모여 살며 땅이 넓어 지역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또한, 길이 만들어지지 않아 차가 찾아 들어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내전 중이라 외국인이 움직이기란 위험하고 쉽지 않은 환경이다. 그런데 우간다에 아주마니에는 18개의 캠프에 25만 정도의 남수단 난민이 들어와 살고 있다. 이곳에는 다양한 부족이 함께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난민들이 밀집되어 있다는 것이다. 찾아가고 찾아오기도 남수단에 비하면 훨씬 용이한 조건이다. 또한, 이들은 구제도 기다리기도 하지만 배움도 기다린다.
 남수단 여러 선교사가 아주마니에서 다양한 사역으로 접근하고 있다. 농업사역, 목회자와 리더 훈련,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와 청년 교육 등, 다양하게 접근하며 준비, 진행 중에 있다. 남수단에 아픔이 어쩌면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본다. 남수단에서는 도저히 가능치 않은 환경들이 열려지고 있다. 이 땅에서는 복음을 위한 기회로, 저들에게는 진리 위에 정착하고 자유를 얻고 구원의 기회로.
 난민들을 위해 많은 NGO와 선교사들이 모였다. 그들이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되고 이들이 돌아가 씨앗이 되어준다면, 그리고 저들 스스로 하나님을 가르치고 배우고 알아 살아간다면, 그 계획을 하나님의 살아있는 열심이 이루시지 않을까?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살아계셨던 하나님께서 여전히 살아 운행하고 계신다. 그 믿음 없이 이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남수단, 이 나라에서 주님의 증인들이 어찌 나아가겠는가?

 

8. 기도 제목
1) 모든 교회와 동역자와 가족 그리고 남수단이 진리와 말씀 위에 견고히 세워지도록
2) 하나님과 모든 사람을 겸손함으로 헤아리고 사랑으로 품을 수 있도록
3) 남수단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구원의 도구, 증인으로 준비될 수 있도록
4) 남수단 난민과 남수단 안에 백성들이 영적, 육적으로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게 영육을 채울 수 있는 기회와 협력, 가르침과 배움이 있도록
5) 난민사역을 위한 선교사와 현지인의 선한 협력,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 하심과 분별을 위해
6) 사람, 시간, 물질, 환경에 대하여 바르게 청지기 사명 충성 되게 감당토록
7) 사는 집에 전기가 속히 들어오고 영육의 건강과 안전, 특별히 오른쪽 발목과 눈의 건강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