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권역 | 카메룬  / Cameroon
카메룬

 


 

 

1. 카메룬의 일반 사항
카메룬은 아프리카 대륙의 서중부에 위치하며, 기니만과 대서양인근과 접한다. 서쪽으로 나이지리아, 동쪽으로 차드 및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남쪽으로는 콩고·가봉·적도기니의 3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10개주(province)로 되어 있다. 카메룬은 북위 2~13°에 걸쳐 있어 다양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 서부 국경을 따라 남단에는 카메룬산(4,070m)이 있으며,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낮은 산지가 전개된다. 카메룬산은 서(西)아프리카에서 제일 높은 산이며 아프리카 전역에서는 6번째로 높다. 해안평야와 해안선의 중앙에서 북동쪽으로 영토를 가로지르는 사나가강(江) 유역의 평야, 북부 베누에강 유역의 평야, 북단부의 차드분지 등의 평지가 있다. 카메룬은 아프리카의 미니어쳐라고 묘사되는데, 모든 주요 기후와 식물군이 카메룬 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전세계의 모든 주요 기후를 갖춘 아르헨티나와 비슷하다. 해안, 사막, 산악, 우림, 사바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아프리카의 지리적, 기후적 특질을 카메룬에서 경험할 수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토의 남동부는 콩고분지에 속하며, 콩고분지와 사나가강 유역 사이에 야운데고원, 사나가강 유역과 베누에강 유역 사이에는 응가운데레고원이 넓게 펼쳐져 있다. 카메룬산의 서쪽에는 연강수량 1만mm 이상에 달하는 지역이 있으며, 차드 호안(湖岸)은 연강수량 380mm이 불과하여 반사막지대를 이룬다. 두알라 부근의 연강수량은 4,000mm 정도이다. 북부에서는 11∼4월이 선선한 북동풍의 모래바람이 부는 건기(乾期)이며, 나머지 기간은 대서양의 습기를 동반한 남서풍이 부는 우기인데 남쪽으로 내려가면 우기가 길어진다. 기온은 북단부에서는 연평균 32℃, 남쪽의 해안에서는 24~27℃, 남쪽의 내륙지방은 21℃ 이하의 사바나지대이다. 북위 6° 이남의 평야지대는 열대우림으로 뒤덮여 있으며, 그보다 북쪽은 사바나의 경관을 이루어 북쪽으로 갈수록 수목은 적어진다. 전체 면적은 457,123 ㎢이며 세계에서 53번째로 큰 나라이다. 남한의 2.2배이며, 인구는 2천 3백만 명 정도이다.
카메룬 국기는 초록·빨강·노랑의 3색기이며, 3색은 에티오피아와 가나에서 최초로 사용한 범아프리카색이다. 초록은 남부의 삼림지대 또는 희망을, 빨강은 중부의 경작지대 또는 통일을, 노랑은 북부의 사바나 또는 태양을 나타낸다.

2. 카메룬 역사
카메룬은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다. 풀라니족과 하우사족, 팡족, 카누리족 등 여러 부족들이 침략과 이주를 반복하였으며, 몇 개의 제국이 세워지고 명멸했다. 1472년 포르투갈의 항해자 페르난도 포가 해안의 강어귀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의 작은 섬 부근에서 새우(포르투갈어로 Camares)가 서식하는 것을 보고 그 강을 카마롱이스강(江)이라고 부른 것이 카메룬의 어원이다. 당시까지는 원주민의 역사가 분명하지 않았다. 17세기에 유럽인의 무역기지가 건설되었으나 연안의 두알라족과 기타 다른 부족은 백인이 내륙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륙에서 모아온 상아·고무·노예 등과 물물교환을 하였다. 서아프리카의 대서양에 접한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그후 400년동안 남부 카메룬의 역사는 노예무역과 관련을 맺게 된다. 그와 대조적으로 북부 카메룬은 여러 왕국간의 전쟁터였으며 그 중에서도 챠드의 카넴-보르누왕국의 전쟁터였다. 1800년까지 연안은 영국의 세력 하에 들어갔으며, 1837년 빔비아왕은 두알라 하구 주변을 영국에 할양하였다. 1845년 영국인이 침례교 선교기지를 획득하였으며, 1858년 빅토리아라고 불리는 해방노예의 이민지를 건설하였다. 1868년 독일인이 연안에 최초의 무역기지를 설치한 후 영국과의 쟁탈경쟁이 전개되었다. 1882년 두알라족의 추장들은 영국의 지배를 요구했으나 영국이 응답을 늦추는 동안 독일의 침략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1884년 7월 15일 독일은 조약을 체결하고 식민지를 획득하였다. 영국이 5일 늦게, 프랑스가 11일 늦게 영토를 얻기 위해 내항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독일이 영유하는 것이 인정되었다. 이에 독일은 카메룬(Kamerun)이라고 명명하였다. 독일은 학교, 철도, 농장 등을 건설하는 적극적인 식민지 개척자였다. 그러나 독일의 지배는 가혹한 것이었으며 한 농장에서 1/5의 노동자가 과다한 노동으로 1년만에 죽기도 한다. 그 후 콩고분지조약(1885)에 의해 실질적인 식민지 점령이 필요해지자 영국·프랑스도 끼여든 차드호(湖) 점령 경쟁이 격화되었다. 독일은 아다마우와 보르누의 풀라니족 국가 일부를 점령하여 차드호에 이르는 독일식민지 카메룬을 1902년에 결정지었다. 1911년 독일은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 대가로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에서 28만 ㎢에 이르는 영토를 획득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카메룬에 침입하여 1916년 현지 독일군이 항복하였다. 베르사유조약으로 성립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방식이 적용되어 1922년 카메룬 영토의 80% 이상이 프랑스 위임통치하의 카메룬(Cameroun)과 남서부의 고지대(남부 카메룬)와 북부(북부 카메룬, 지금은 나이지리아의 일부)를 영국위임통치하의 카메룬스(Cameroons)가 성립되었다. 결과적으로 단일국가는 두 나라의 식민세력이 지배하는 세 지역으로 분할되고 이러한 상황은 이후의 통일에 거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게 된다. 더 나쁜 것으로는 영국이 자신의 영토를 소홀히 하고 그 대신 나이지리아에 있는 영국의 행정수도에만 지나친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몇 년 후에 영국은 카메룬의 위임통치지역을 독일에 되팔게 되고,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본국으로 돌아가고 연합국이 독일영토를 점령하게 됨에 따라 오랜 기간 통치하지는 않게 된다. 이와 반대로, 프랑스는 철도를 개선하고(강제로 노동을 이용하고, 프랑스의 위임통치로 금지됨), 코코아와 야자기름, 플랜테이션, 수출 목재를 개발하고 세계전쟁에서 카메룬의 프랑스 위임통치 지역에서 무역가치를 5배로 증대시키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후에 위임통치령은 UN의 신탁통치령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정당이 프랑스령 카메룬에서 형성되고 독립에 대한 압력을 가하게 된다. 독립운동은 1944년 영국 통치하의 카메룬에서부터 일어났으며, 프랑스 통치하의 카메룬에서는 1947년부터 활발해졌다. 1954년 나이지리아가 연방제를 실시할 때 영국 통치하 카메룬의 남반부는 주(州)로써 자치 정치체제를 시행하였으나, 북반부는 북나이지리아주의 일부로 유지되었다. 1959년 11월 카메룬 북반부에서 UN 감시하의 주민투표가 이루어졌고 1960년 나이지리아연방이 독립한 뒤 1961년 2월 다시 주민투표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남반부는 신생 카메룬공화국과 연방관계를 맺게 되었고, 북반부는 나이지리아연방의 북부 나이지리아주로 통합되면서 카메룬연방공화국이 되었다. 프랑스 통치하의 카메룬은 1958년 12월 말에 완전한 내정자치가 승인되어 1960년 1월 1일 카메룬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북부에 근거를 둔 당인 카메룬 연합은 남부사람들의 분개를 더욱 부채질하면서 국민의회를 통제하게 된다. 1960년에 독립에 뒤이어 불길한 기운은 8개월 동안 5개 대대의 프랑스군과 전투기 비행중대를 패배시키는 전면적인 폭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결과 수천 명이 무자비하게 죽고 20년 동안 지속된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기에 이른다. 카메룬 연합은 권력과지도자를 장악하고 북부인이며 열렬한 회교도인 아마두 아히죠(Ahmadou Ahidjo)가 초대대통령에 취임하면서 UN에 가입한다.

1961년 북부 카메룬은 나이지리아의 일부가 되기 위한 선거를 실시하고 프랑스령 카메룬과의 연방을 선택한 남부는 11년후에 단일 공화국을 형성하게 된다. 그 후 1972년 '연방제'를 중지하고 국명을 카메룬연합공화국으로 바꾸는 등의 변화를 거쳐 중앙집권제 정부가 수립되었다. 아히죠는 1975년 반대없이 대통령으로 재선되고 수많은 정치범을 투옥시키고 언론검열을 하면서 극도로 잔악하고 독재적인 통치를 계속하게 된다. 아히죠가 긍정적으로 기여한 부분은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드는 전시사업을 도입하여 세우려는 유혹을 참으면서 농업, 의료체계, 도로에 폭넓게 투자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학교 등록자수가 70%에 이르게 되고 농업은 자급자족하고 다양한 범위의 상품을 수출할 정도로 충분히 생산하게 된다. 아히죠는 권력과 성공의 절정에서 1982년 뜻밖에도 사임을 발표하게 된다. 그가 지정한 계승자는 '호족'으로 알려진 아히죠의 북부 친구들을 즉시 제거하기 시작했던 남부인이자 기독교도인 수상 폴 비야(Paul Biya)였다. 1984년까지 호족들은 충분히 많이 모이게 되며 놀랍게도 거의 성공한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1984년 1월 폴 비야는 국명을 카메룬공화국으로 바꾸고 재빨리 정권을 다시 장악하게 되고 1988년 반대없이 다시 대통령에 재선되는데 카메룬은 카메룬인민민주운동이 다스리는 일당제 국가였다.

3. 카메룬 정치(23년 그리고 31년, 독재로 얼룩진 카메룬)
아프리카에는 수십년 간 독재 중이거나 독재체제 아래 있던 국가들이 많이 있다. 카메룬도 이에 속하는 국가인데, 카메룬은 1960년 독립 이후 54년간 단 두명의 대통령만을 배출하였다. 초대 국가원수는 1960년 독립 후 취임한 아마두 아히조(Ahmadou Ahidjo)다. 그는 1982년까지 23년간 카메룬을 통치했다. 거의 일당지배체제 위에 군림했기 때문에 여러 폭동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카메룬의 번영을 이룩하였다. 이어 1982년 아마두 아히조가 건강상의 이유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당시 국무총리인 폴 비야(Paul Biya)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이 결정을 두고, 아히조가 자신과 같은 북부 이슬람 출신이 아닌, 남부 크리스트교 출신의 폴 비야를 후계자로 택한 것에 대해 사람들의 큰 놀라움을 샀다. 하지만 1983년부터 폴 비야와 당대표로 남아있던 아히조는 극심한 정치적 갈등을 겪었고, 결국 아히조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어 폴 비야는 남아있는 아히조의 측근들을 요직에서 제하고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부터 폴 비야는 지금까지 무려 30년 이상 독재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1984년 국명을 카메룬공화국으로 변경하고 대통령에 재취임되었고, 1988년 다시 재선되는 동안 카메룬은 카메룬인민민주운동(RDPC)당이 통치하는 일당제 국가였다. 1990년 국민들의 저항으로 1992년 다당제를 도입, 처음으로 다당제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역시 폴 비야가 다시 재선에 성공했다. 이어 폴 비야는 1997년 국민의 요구로 대통령 7년 중임제를 도입하였고 재당선 되었다. 하지만 2008년 헌법을 재개정, 연임 제한을 철폐하고 2011년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폴 비야는 RDPC를 기반으로 국가의 대부분 지역인 불어권 지역을 장악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연임에 성공해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폴 비야 정부의 완전한 정권장악으로 인해 야당은 야당의 구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국민들에게 큰 지탄을 받고 있으며, 대다수의 국민들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고, 국민들 사이에는 정치무관심 행태가 팽배해진 상황이다.

4. 카메룬 경제
카메룬은 농업에 유리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고 있고, 각종 광물, 석유?가스, 산림 등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카메룬 경제는 농산물 및 천연자원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이러한 1차 수출품의 국제가격 등락은 카메룬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카메룬의 경제개발은 정부의 관리 미숙, 부패의 만연 등과 같이 비우호적 기업환경으로 인해 부진한 상태이다. 카메룬은 세계은행의 연례 국별 기업환경 여건조사 등에서 세계 최하위 국가군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그 주요한 이유 중 하나로 정부의 부패 문제가 늘 지적되고 있다.
최근 카메룬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산유량 증가 및 국제 고유가로 인해 2013, 2014년 모두 4% 이상의 수준을 보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러나 2015년도에는 2014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국제유가의 하락으로 인해 당초 예상 성장률 5.2%에 못 미칠 것으로 보이고 있다. 이는 잠재성장률인 7%와는 차이가 커서 2035년도에 신흥성장국으로 부상한다는‘VISION 2035'의 목표 달성에 차질이 발생할 전망이다.
카메룬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에디오피아, 세네갈 등 여타 아프리카 국가보다 높은 편이나, 교육, 보건 등 주요 사회?경제지표에 있어서는 이들 나라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다. 인프라 수준은 최저 수준이면서 부패지수는 최하위 수준을 보이고 있다. 카메룬은 독립 후 25년여간 아프리카에서 가장 풍요로운 국가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카메룬의 주요 수출품인 원유, 코코아, 커피, 면화 등의 국제가격 폭락, 통화가치의 과대평가 문제, 경제관리 실패 등의 제 요인이 겹쳐 10년 이상의 장기 불황을 경험했다. 1986년부터 1994년까지의 기간 중 실질 GDP가 무려 60% 이상 감소하였으며, 반면 경상수지 적자, 재정 적자 및 대외 부채는 크게 증가했다. 이에 따라, 카메룬은 1980년대 후반부터 IMF와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련의 경제개혁 조치를 시행해야 했다. 이러한 조치로 1994.1월에는 카메룬을 중심으로 한 CEMAC 국가들이 사용하는 세파프랑화(XAF) 가치가 50% 절하되었으며, 1995년에는 공무원 봉급이 65% 삭감되는 일까지 있었다.
공식 통계상 인플레는 잡혀가고 있으나 카메룬 국민들은 곡가, 유가 등 생활물가 앙등에 좌절하였으며, 이러한 국민들의 불만이 2008.2월 두알라, 야운데 등 대도시에서 일어났던 유혈폭동?소요사태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2008.3월 카메룬 정부는 기초 생활용품 물가인하를 위해 식품류에 대한 수입관세 인하 등의 조치를 취했다. 정부가 추진해 온 국영기업의 민영화 역시 부진한 상태이다. 종래 국영수도회사(SNEC)는 2개의 사업체로 분리되어, 수도 인프라를 관장하는 CAMWATER는 아직 정부 소유로 남아 있으며, 동 부문을 제외한 SNEC는 현재 모로코수도회사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이 소유하고 있다.
카메룬의 대외교역에 있어서 프랑스 등 유럽연합국가들이 전체수입의 36.6%와 수출의 66.1%를 차지하고 있다. 여타 지역 주요 무역상대국으로는 중국, 나이지리아, 미국 등이 있으며, 특히 미국은 카메룬의 주요 투자국으로서 차드-카메룬 송유관과 등 에너지 분야 및 플랜테이션 농작물 재배(Del Monte)에 진출해 있다. 중국은 최근 카메룬 중?저가 공산품 시장을 석권해 나가고 있으며, 또한 카메룬산 목재를 대량 수입해 감으로써 카메룬의 신흥 교역 상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카메룬은 천혜의 농업환경 및 풍부한 천연자원으로 인해 아프리카에서 자연조건이 가장 유리한 국가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카메룬 정부는 선진국의 외채 탕감 또는 상환기간 연장, 민영화 정책 지속 추진, 부패방지 등의 노력을 전개하고 있으나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장기간 누적되어 온 경제난을 극복하는 데에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외국인 투자유치의 걸림돌이 되어 온 정부의 비능률적인 경제관리, 관료주의와 부패, 대외부채의 증가 등을 향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여부가 카메룬 경제?사회 발전의 관건이다. ‘VISION 2035’ 달성을 위해 인프라 구축에 가장 많은 노력을 투입하고 있으며, EU, 프랑스, 중국 및 세계은행 등으로부터 자금 조달을 통해 전력, 도로 분야에 집중 투자를 진행하고 있으나 이러한 인프라 구축 노력이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향후 5년 이상의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카메룬은 중앙아프리카 지역 6개국(카메룬, 차드, 콩고공화국, 중앙아프리카, 적도 기니, 가봉)이 속한 중앙아프리카 경제통화연합(CEMAC) 총 GDP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며 해당 지역 내 경제주도권을 지니고 있으나, CEMAC을 통한 지역경제 통합에는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또한 물가 상승에 따른 상대적인 소득감소 및 수출가격 경쟁력의 악화에 따른 경제 상황 악화 등으로 인해 소요사태의 발생 가능성은 한결 높아진 상태이다. 최근 교역 추이를 보면 한-카메룬의 교역 규모는 2011년까지 대체적인 성장세를 유지하였으나 2012년 이후 유럽 및 세계경기의 침체 영향으로 감소세로 전환되고 있는 추세이다.

5. 카메룬 사회와 문화
언어로는 식민시대 당시 도입된 프랑스어, 영어 등 유럽 언어가 북서지방 및 남서지방에서 사용되고 있다.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영어 사용권과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프랑스어 사용권으로 지역이 나뉘어져 있으며, 이것이 언어적 분열을 초래하였다. 1996년 1월 18일자 헌법 1조 3항에 "공용어는 영어와 프랑스어다. 두 언어는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10개 주 가운데 2개 주는 과거 영국의 식민지여서 영어를 공용하고, 8개주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여서 프랑스어를 공용하고 있다. 즉, 법적으로 동등하다고 명문화했다는 것이 실제에서는 역설적으로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 밖에 팡어, 풀라니어 등이 사용되고 있다. 카메룬은 영연방과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사회보장제도는 보장 범위와 지원 수준에 관한 규정이 미미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혀 있다. 국민 건강상태는 대체로 불량하여 평균기대수명이 약 55세이고 유아사망률이 높다. 보건시설이 대도시에 밀집되어 있어 시골 주민은 현대적인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영양결핍으로 인한 병들이 어린이들 사이에서 만연되어 있다. 성인인구의 약 55%가 글을 읽고 쓸 수 있어 서아프리카에서는 문자해득률이 비교적 높다. 교육시설과 취학자수가 늘어남에 따라 탈문맹률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공립학교에서의 교육은 무료이나 교육의 질이나 학습환경이 좋지 않은 형편이다. 또한 상급학교 진출시 시험에서 떨어졌을 경우, 뒷돈을 주면 받아주는 학교가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교육열이 높은 부모들은 무리를 해서 현지 사립학교나 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시키기도 한다. 고등교육은 카메룬대학교에서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캠퍼스 시설이나 교수진들이 열악하고, 많은 학생들이 졸업장을 따기 위한 목표로 학업에 전념하지 않는 편이다. 이수 학점을 받기 위해 교수들에게 돈을 주면 얼마든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졸업 후에도 구직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카메룬사람들은 대체로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낙천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관공서, 은행, 식당, 상점 등에서의 일상적인 서비스는 현저하게 더디므로, 인내심을 가지고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음. 카메룬 정부는 민원부서 관리, 경찰을 비롯한 관료집단의 부패 척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카메룬에서 부패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이다. 정부 관리가 내외국인을 불문하고 뒷돈을 요구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카메룬에서는 야운데, 두알라 등 대도시에서도 의료체계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 않다. 병원 방문 시에는 주사기와 거즈를 스스로 준비해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카메룬에는‘꺄도문화’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서양의 팁 문화가 카메룬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다소 변질된 형태로 자리잡은 듯 하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팁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길거리에서 잠깐 물건을 들어주었다던지, 고장난 차를 밀어 주었다던 지 하면 의례 동전 몇백 원이라도 받는 것은 당연시되어 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카메룬에 깊숙이 파고들은 이 까도 문화가 경찰과 세무공무원, 각종 관공서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거리의 교통경찰은 검문을 빌미로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고, 행정관서에서는 싸인을 하는 책임자마다 얼마씩의 돈을 요구하는 일은 이곳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반면 시장 상인들은 물건을 살 때 알아서 꺄도라고 하면서 한국식의 덤을 줄 때도 있고, 꺄도로 달라고 말하면 서슴없이 집어 주기도 한다.

요즘 핫이슈인 아프리카의 보코하람은 전도와 지하드를 위해 선지자의 가르침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2001년 결성된 나이지리아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이다. 서양식 교육은 죄악이라는 뜻인 이 단체는 나이지리아 북부의 완전한 이슬람 국가로서의 독립과 북부 각 주에 샤리아의 도입을 목표로 무장 테러를 전개하고 있는데, '나이지리아 탈레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카메룬은 북부 지역이 보코하람에 의한 수차례의 공격으로 교회 지도자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납치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2015년 1월에는 국경을 넘어 카메룬 북부의 마을을 공격해 가옥을 불태우고 부녀자와 10~15살의 남녀아이들 80명 정도를 납치해 갔다. 이처럼 카메룬에 대한 보코하람의 공격과 위협이 한층 거세지고 있는데, 전문가에 의하면 보코하람이 납치한 아이들을 소년병으로 만들거나 소녀들을 전투원과 강제로 결혼시키거나 성노예로 팔고 있다고 한다. 나이지리아, 베냉, 니제르, 차드, 카메룬까지 서아프리카 5개국이 보코하람 격퇴를 위해 연합군을 결성했다. 이 때문에 보코하람은 공격대상을 서아프리카 연합국의 국경마을로 확대하며 보복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카메룬 국경 인접지대는 계속해서 군인들이 대치하고 있으며 간헐적으로 접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6. 카메룬의 종족
주로 이슬람교도가 사는 북부 지역에는 풀라니종족이 더 오래 전부터 살아온 키르디족 및 다른 그룹과 함께 살고 있다. 카메룬 최북단에 사는 초아 아랍족은 여타 카메룬 사람들보다는 국경 너머 차드국민과 유사한 점이 더 많다. 서부 지역에서 압도적인 그룹은 바밀레케족으로서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퍼져 있는 종족이다. 바밀레케족은 어느 곳에 정착하든지 으레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성향이 있다. 이런 성향이 해당 지역 토착민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베티팡종족 그룹의 베티 및 불루 그룹은 남부에서 세력을 떨치는 종족으로서 폴 비야(Paul Biya) 대통령의 주요한 권력 기반이기도 하다. 카메룬에는 230~282개의 서로 다른 종족 및 언어 그룹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아다마와 고원이 이러한 그룹을 북부와 남부로 분할하고 있다.

7. 카메룬의 교통
항공시설은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 및 최대 경제도시인 두알라에 프랑스항공, 터키항공, 스위스항공, 브뤼셀항공, 모로코항공, 케냐항공, 에티오피아 항공 등이 취항 중이다. 철도시설은 총 1,009㎞에 불과하며, 승객보다는 화물 운송을 위주로 운행되고 있는 형편이다. 철도망 노선은 야운데-두알라, 야운데-은가운데레, 두알라-음방가-은콩삼바와 오텔레-음발마요 등이 있다. 카메룬 북부로 가는 가장 대중적인 교통노선은 철도로, 편도 약 16~20시간이 소요되는 긴 구간으로 주로 외국 여행객들은 침대칸을 이용한다.
대중교통으로는 버스 노선이 거의 정비되어 있지 않아 택시가 사실상의 유일한 대중교통 수단이다. 하지만 거의 예외없이 유럽에서 노후화된 중고차 상태에서 수입된 일본산 소형차로 냉방장치가 제대로 가동되는 차량이 없기 때문에 문을 열고 다녀야 하며, 심한 매연에 노출된다. 철도망이 충분히 정비되지 못한 카메룬에서 도로운송은 주요 육상운송수단일 수밖에 없다. 카메룬 도로망은 총연장 50,000㎞에 달하지만, 이 가운데 4,300㎞만이 포장되어 있고, 대도시 안의 포장도로의 경우에도 도로 유지ㆍ보수가 불량하여 갑작스러운 요철이나 패인 곳이 많다.

8. 카메룬의 보건 및 질병
말라리아는 모기가 옮기는 질병으로 백신접종에 의한 사전 예방이 불가능하다. 특히 카메룬 등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발생하는 열대성 말라리아는 발병시 약 복용 등 즉각적인 처치가 없을 경우 수일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무서운 질환이므로 매우 주의가 필요하다. 카메룬의 HIV 보균자율(AIDS 감염율)은 공식통계상 인구의 5% 가량이나 실제로는 이보다 더욱 높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적 접촉에 의한 감염 위험은 물론, 수혈이나 주사바늘에 의한 감염 위험도 있으므로, 건강관리에 각별히 유의하여야 한다. 2009년 하반기에 카메룬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콜레라가 발생하여 60여명 이상이 사망하였다고 보고되었으며, 장티푸스, 간염, 황열 등의 각종 전염병, 풍토병 등이 발생하고 있다. 카메룬의 의료시설 및 의료체계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열악하므로 다치지 않게 최대한 조심을 해야 한다. 최근 야운데에 오랜 기간 건축, 설비, 의료진 훈련 등을 거쳐 KOICA(한국국제협력단) 사업으로 카메룬 국립의료센터를 개원하였다. 24시간 응급환자들을 위한 의료시설로 현지의 뜨거운 반응속에 오픈되었다.

9. 카메룬의 기독교 상황
널리 퍼져 있는 명목주의와 자유주의적인 가르침은 기독교인들의 영적 기준을 낮추고, 기독교인 사이에 사교적 관습이 행해지고, 지도자들의 교만, 타협, 죄가 도전받지 못하고 있다. 깊은 회개, 계속되는 구원의 역사, 진정한 부흥, 성경읽기, 전도와 성결한 삶이 기독교인들 가운데 절실한 상황이다. 기독교가 중부과 남부에서 우세한데, 장로교, 침례교, 루터교 선교사들의 일세기에 걸친 노력의 결과이다. 아직도 교단과 언어의 장벽으로 교회지도자들의 영적교제를 개발하는 것과 공동목표의 달성이 방해받고 있다. 북부는 여전히 개척지로 기독교인이 상대적으로 적다. 수년 동안 회교도인 풀라니족이 이 지역의 무역과 정치를 지배해 왔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1982년 이후 퇴조해가고 있다. 미국과 노르웨이의 루터교 형제회 선교사들, SUM, 독일 침례교, 순복음 선교회(AoG)의 공헌은 매우 결정적이었으며 이 나라의 어떤 지역보다도 교회의 성장이 빨랐다.
카메룬의 275개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단지 30여개 이상의 언어로만 성경 또는 신약이 번역되었다. 위클리프성경번역선교회인 SIL과 국제성서공회(UBS)가 50개 언어로 번역을 하고 있다. 38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이 필요한 것으로 밝혀졌고 또다른 125개 언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이 필요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카메룬인과 외국인들이 소명을 받고 훈련되어 이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하다. 토착어 성경의 부족이 교회 내 영적 빈곤의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카메룬에서 2013년부터 수 천 명의 신자들이 갑자기 예배 장소가 사라져 혼란을 겪고 있다. 폴 비야 대통령이 전국 주요 도시의 약 100곳의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 대한 폐쇄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폐쇄령을 내린 이유는 교회 안에서 ‘범죄적인 의식과 예배’가 행해진다는 것이다. 폴 비야 대통령은 오순절교회의 활동이 카메룬의 안보를 해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데 아무런 역할과 기여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폐쇄조치의 이유를 밝혔다. 정부 관리 중 한 사람은 “오순절 계통의 목사들은 카메룬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오용하면서 엉터리 기적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잘못된 주장과 영향력을 전파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며 대통령의 조치를 옹호했다. 현재 카메룬에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가 약 500여곳 정도 있는데 그 가운데 50여곳 미만의 교회만 합법적인 교회이며, 나머지는 모두 불법이다.
교회들이 대거 폐쇄되자 교인들은 목사들의 지도 아래 거리로 나와 평화적인 시위와 기도회를 통해 정부에 항의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의 문을 봉인해 버린 경찰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들은 또 이러한 핍박이 오히려 교회를 강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부의 폐쇄 조치에 대한 법률적 절차적 문제도 지적하고 있다. 적어도 교회를 폐쇄하려면 먼저 교회의 입장도 충분히 듣고 신중하게 해야 하는데 그런 절차가 대폭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정부조치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덩달아 피해를 입었다. 카메룬은 헌법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카톨릭, 장로교, 침례교, 이슬람 등을 합법적 종교로 인정하고 있고, 다른 종파에 속한 교회나 종교기관에 대해서는 선별적으로 합법성을 부여하고 있다.

10. 카메룬의 선교 역사 및 선교 현황
카메룬 북부에는 이슬람교 인구가 우세하며 중부와 남부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혼재되어 있다. 서부에는 기독교가 우세하며 또한 Bamoun 문화의 중심이 이곳에 존재하여 음악과 춤이 함께하는 축제가 자주 펼쳐지게 된다. 산 속과 우림에 거주하는 많은 부족들은 거의 대부분 정령 신앙을 신봉한다. 카메룬은 높은 수준의 종교적 자유와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종교 가운데 개신교와 카톨릭이 인구의 3분의 2로 대부분을 차지하며, 이슬람교 또한 인구의 약 5분의 1 정도로 어느 정도의 신자가 존재한다. 좀더 회교화된 북부에서는 기독교화를 통제하고 있다.
카메룬 선교는 한국성결교단이 독보적으로 사역을 펼쳐나가고 있다. 카메룬을 시작으로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성결복음이 전해진 지 2015년인 올해 24년이 되었다. 아프리카 선교는 1987년 성결교단 선교사가 교단 공식 선교사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부터지만 1991년 카메룬성결교회가 창립되면서 카메룬에 성결복음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카메룬선교는 공식적으로 1991년 3월을 카메룬성결교회가 정부인가를 받은 이후부터이다. 카메룬은 현재 아프리카선교의 중심지로 가봉, 차드, 부르키나파소, 코트디브아르 사역의 모델이자 전초기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카메룬은 현지 목회자 양성이 절실해졌고,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현지인 목회자들의 재교육도 필요해 카메룬복음신학교 사역을 시작했다. 1997년 카메룬복음주의신학대 인가를 받아 목회자 양성이 본격화되었고 이런 헌신의 결과, 카메룬신학대를 통해 수많은 목회자가 배출되었다. 현재 야운데 지역과 동부지역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져 있고 지금도 계속 교회개척이 진행 중이다.

기도제목
1) 카메룬내 회교가 우세한 지역이나 정령숭배를 하고 있는 미전도 부족들을 향해 주님의 일군들이 세워지고,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이 번역되도록
2) 카메룬에 있는 신학기관과 신학교가 교회 내에 오랫동안 박탈당했던 새생명과 성경적 기준을 가져올 수 있는 영적 혁명이 이루어지도록
3) 거칠고, 거짓, 속임, 도덕불감증과 죄를 죄인지 알지 못하는 카메룬 아이들과 어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진실되고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4) 카메룬 학생들이 질높은 교육과 환경 속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잘 자라고 카메룬의 올바른 리더들로 세워지도록
5) 명목주의, 자유주의, 기복신앙이 팽배한 카메룬 교회가 주님의 말씀 위에 바로 선 목회자와 성도로 채워지고, 아이들을 사랑과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는 주일학교 교사가 세워지도록
6) 카메룬 북부지역이 보코하람으로 인해 대치상태에 놓여 있는데, 국경 주변국과 잘 협력하고, 더 이상 사람들이 납치당하거나 피해입지 않도록

참조
외교통상부, 이슬람정보센터, 오픈도어선교회, KOTRA, www.kehcnews.co.k

정리및 보고 김수월 선교사
(카메룬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