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권역 | 우즈베키스탄  / Uzbekistan

우즈베키스탄 공화국(Republic of Uzbekistan)

정리: 최00 선교사

 


 

 

우즈베키스탄의 국기는 위로부터 파랑•하양•초록의 3색 사이에 빨간색의 가는 선을 넣은 직사각형 국기이며 비율은 1:2이다. 특징으로 첫째 단 좌측에 초승달과 12개의 별이 있다. 파란색은 생명의 원천인 하늘과 물을, 흰색은 평화와 행운을, 녹색은 자연과 풍년을 상징한다. 3단의 바탕색 사이에 두 개의 얇은 빨간색 줄무늬는 생명의 힘을 상징한다. 새로 독립한 국가를 나타내는 초승달은 이슬람 국가를 표현하기도 한다. 초승달 옆에 자리하고 있는 12개의 별은 12개의 주를 표현하는데 티무르 국가의 역사를 지닌 지역 문화의 고대 뿌리와 충성에 대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열망 또한 담고 있다.

 

I. 국가개요

국명: 우즈베키스탄 공화국(Republic of Uzbekistan)
인구: 34,282,700명(2020년 9월)
수도: 타슈켄트(Tashkent)
면적: 447,400 sq. Km(한반도의 약 2배)
민족: 우즈벡 80%, 러시아인 5.5%, 타직인 5%, 카자크인 3%, 카라칼팍인 2.5%, 고려인 0.6%
기후: 고온 건조한 대륙성 기후로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의 온도 차가 큰 것이 특징으로 하절기(06~09월) : 평균온도는 섭씨 15~36℃이며, 평균 강수확률은 약 3%로 건조한 기후, 동절기(11~02월) : 평균온도는 0~9℃이며, 평균 강수확률은 20%로 다습한 기후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20~200mm로 강수량이 적어 농업에는 부족해 관개의 의존성이 높다.
언어: 우즈벡어(공식 언어), 러시아어(통용어)
종교: 이슬람교 88%(수니파 70%), 러시아 정교(9%) 기타 3%
위치: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심에 위치한 우즈베키스탄은 동쪽으로 키르키즈스탄, 타지키스탄 남쪽은 아프가니스탄, 남서쪽은 투르크메니스탄, 북쪽과 북서쪽은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접한다. 북서 일부는 아랄해를 접하고 있다. 리히텐슈타인과 함께 세계에서 둘밖에 없는 이중 내륙국 가운데 하나이다.

 

II. 우즈베키스탄의 역사

우즈베키스탄은 구석기 시대부터 문명이 존재하였으며, B.C 6세기에는 페르시아가, B.C 4세기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바 있다. 6세기 중엽에는 돌궐 제국 성립 후 돌궐족이 본격적으로 지배하던 곳이다. 이후 751년 사라센 제국과 당나라 간 탈라스 전투에서 사라센군이 승리함으로써 이슬람권에 편입되었다.


13세기에는 몽골의 지배를 받았으며, 14세기 몽골계 유목민과 튀르크계 민족을 주류로 이란계 민족과 혼혈로 ‘우즈벡 민족’을 구성하고 중앙아시아 일대에 봉건 제국을 형성하였다. 우즈벡은 15세기 말 칭기즈칸의 후손인 튀르크계 장군 압알 하일칸이 킵차크(Kipchak) 초원에 유목 국가를 건설하고 하일칸의 일족과 하일칸을 따르는 집단을 ‘우즈벡(Uzbek)’이라고 부른 데서 시작되었다. ‘우즈’는 ‘자기 자신, 핵, 중심’을 의미하고, ‘벡’는 ‘부족장’을 의미한다.


16세기 러시아의 이반 4세는 아스트라한 국을 정복한 이후 본격적으로 중앙아시아에 진출하였다. 우즈베키스탄은 19세기 제정 러시아에 병합(1865~1876년) 되었으며, 러시아 알렉산드르 2세는 코칸트(1875년), 부하라(1873년), 히바(1873년) 등을 정복하였다. 1877년에는 제정 러시아 통치에 반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1897년 제정 러시아는 철도 부설, 면화 수탈 등의 식민지 정책으로 우즈베키스탄 농민의 몰락과 빈민화를 초래하였다.


1917년 10월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을 틈타 타슈켄트에 자치 정부를 수립한 후, 1918년 2월 ‘투르키스탄 자치 공화국’을 수립했으나 볼셰비키 혁명 정부에 의해 해체되었다. 1924년 소련이 중앙아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민족 단위 국가로 재편하여 소련에 편입시키면서 우즈베키스탄공화국이 설립되었다. 이때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공화국이 동시에 설립되었다. 1936년에는 카라칼파크(Karakalpak) 자치 공화국이 통합되었고, 우즈베키스탄은 1991년 8월 31일 구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1991년 9월 1일 독립기념일)한 이후, 1991년 12월 25일 소련이 붕괴하자 1991년 12월 29일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를 대통령으로 직선 선출하였다.


우즈베키스탄 역사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한민족인 재러 고려인(독립 후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의 역사이다. 1937년 8월 스탈린의 연해주 지역 고려인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결정에 따라 시작되었다. 1937년 가을부터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시르다리야, 페르가나, 사마르칸트, 호레즘, 안디잔, 부하라, 카라칼파크 자치 공화국 등 우즈베키스탄 전역에 7만 명이 넘는 고려인이 배치되었다. 우즈베키스탄에 이주한 고려인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로 집단 농장 단위로 이주했다. 따라서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빠른 시간 안에 집단 농장을 조성하고 1938년부터 벼를 비롯한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1938년 이후 고려인들은 벼농사에 좋은 토지를 찾거나 강제 이주 과정에서 헤어진 가족과 친척을 찾아 카자흐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재이주하면서 그 수는 더 증가했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은 초기에 타슈켄트의 치르치크, 칼리닌, 페르가나, 코간트 등지에 고려인 콜호즈(집단농장) 50여 개를 새로 만들었으며, 기존에 우즈베키스탄 사람들로 구성된 콜호즈에도 합류했다. 대표적인 콜호즈는 폴랴르나야 즈베즈다, 스탈린, 블류헤르, 아방가르드, 볼셰비크, 달리 보스토크 등이다.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고려인은 노동군으로 부역하거나 전쟁 무기 제작을 위한 성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1939년 이후 고려인 콜호즈는 벼와 류체른(마초), 완두콩, 목화, 수박, 참외, 밀, 보리 등의 작물을 심어 매우 높은 성과를 올렸다. 그래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의 200명이 넘는 고려인이 소련에서 최고 훈장인 사회주의 노동 영웅 훈장을 받았다. 이는 소련의 소수 민족 대비 가장 높은 비율이었다. 폴랴르나야 즈베즈다 콜호즈의 회장 김병화는 2회에 걸쳐 사회주의 노동 영웅 훈장을 받기도 했다. 고려인 콜호즈의 성과는 소련 전역은 물론 외국에도 알려졌고, 흐루시초프를 비롯한 역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나 외국의 국빈이 방문하기도 했다.


1991년 소련 해체와 독립 국가로 분열 과정에서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은 많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민족주의가 대두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베키스탄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여 러시아어만을 구사하는 고려인은 언어의 장애를 겪었다. 또한 소수 민족으로서 차별도 더 심해졌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은 콜호즈가 해체되면서 또 다른 이산을 경험하고 있다. 주로 농촌에 거주하던 고려인은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등 도시로 이주하거나 러시아의 연해주와 캅카스 지역, 그리고 한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III. 우즈베키스탄 정치

2016년 12월에 새로 취임한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임기 5년) 정부 출범 후 정치적 안정과 국가 발전 개혁 및 외교 관계 개선에 노력하고 있고 외국인 투자 유치 확대 및 WTO 가입을 염두에 둔 국제 표준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신정부 정책으로 7대 개혁 방향을 제시(국영기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 국가 통화 안정, 물가 안정과 농업 개혁, 사회적 필수재에 대한 자유경쟁 환경 조성, 취약층에 대한 사회보장 개선, 탄력적 수입관세 적용, 27개 지방 도시 발전을 위한 투자 프로젝트 추진) 등으로 개혁 개방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과거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정치를 하고 있어 국민들의 신임을 얻고 있다.


구소련 연방 해체 이후 우즈베크 SSR 제1서기를 역임한 이슬롬 카리모프(Islom Karimov, 1938년 1월 30일~2016년 9월 2일)로 위시되는 권위주의 독재정권이 유지됐었다. 경찰이 교도소나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을 고문하거나 학대하는가 하면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며 억류 기간을 자기 멋대로 연장시켰으며, 또한 경찰은 사람들을 임의적으로 체포하거나 구금하는 데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됐었고, 심지어 이렇게 잡힌 사람들에 대한 재판은 공정하게 치러지지 않았다. 거기에 표현의 자유나 언론,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되며, 시민 사회 활동에 대한 정부 통제가 계속되었다. 또한 이슬롬 카리코프 시절에는 소수 종교 단체 회원들에 대한 온갖 종교적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되고, 이주하는 것 또한 강제로 제한하고 있었다. 정부의 강요에 따른 목화 추수 강제 노동 등과 같은 심각한 인권탄압이 이슬롬 카리모프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매우 심각하였다.

 

2005년 안디잔에서 민중 시위가 벌어지자 무차별 사격을 명령하면서 최저 5백에서 최대 2,500명이 학살당했다. 미국은 당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당시 미국에 요긴했던 우즈베키스탄 내 미 공군 기지를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인디잔 사태 이전까지만 해도 카리모프 대통령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적극적인 친미 정책을 취했지만, 미국이 국내외의 여론 압박에 민주화를 지지하자 정권의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 다시 친러로 돌아섰다.


향년 78세의 나이로 이슬롬 카리모프가 사망하고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Shavkat Mirziyoyev, 1957년 7월 24일)가 당선되어 경제발전을 중요시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하였으며 민주주의 체제에 돌입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미르지요예프 정권의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경찰국가체제를 약화시키고 자유시장 경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조치가 이뤄지고 있다. 또한 한국을 포함한 7개국에 무비자 입국을 시행하였다. 예전에 사진을 찍지 못하던 관광지들도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하였으며, 많은 외국기업의 투자를 권유하고 자유 개방시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성장률 7%를 찍는 등 많은 정치·경제적 선진화가 진행되고 있다.


IV. 우즈베키스탄 경제

우즈베키스탄은 광범위한 천연자원, 매력적인 관광 명소 및 교통망을 갖춘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로 경제 성장과 더불어 주변국의 안정을 위한 정치, 외교, 경제 및 군사력에도 잠재력을 갖춘 나라이다. 지리적으로 아프가니스탄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4개국 모두와 접해있는 지형으로 경제와 안보에 중추적인 환경에 있다. 인구 3,400만 명의 중앙아시아 최대시장으로 노동 가능 인구인 15∼64세 계층이 전체 인구 중 70%를 차지하며 중간연령은 29세로 젊은 편이다. 우즈베키스탄은 야심 찬 시장 지향 경제 개혁을 시행하고 있고, 투자 급증과 소비 증가로 2019년 GDP 성장률이 5.6%로 증가했다. 산업 시설, 인프라(가스, 수력 발전, 도로 및 주택)에 대한 공공 투자와 가계 소비(GDP의 50% 이상) 또한 꾸준한 성장을 하고 있다. 풍부하고 다양한 천연자원, 낮은 공공 부채, 탄탄한 외환 보유, 공격적인 투자 프로그램, 증가하는 노동력, 중국과 유럽 간의 전략적 지리적 위치는 우즈베키스탄의 경제 발전에 한층 더 긍정적인 조건을 제공한다. 2020년 4월 14일 업데이트 된 IMF 예측에 따르면 COVID-19 발발로 인해 GDP 성장률은 2020년 1.8%로 둔화되지만 2021년에는 7%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시장 개혁의 결과는 수출 주도 성장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고 여러 규제와 제약이 해결될 것으로 전망한다. 최근 수년간 거시경제 성과는 경제 개방정책, 건설 인프라 투자 및 자국 산업 생산육성 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은행시스템의 개선, 무역 및 대외결제 시스템의 자유화, 유연한 환율정책 등 IMF의 지속적 요구에 부응하고 있어 보다 많은 분야에서 발전할 것이다.


과거 우즈베키스탄의 경제는 풍부한 부존자원을 바탕으로 원면, 금, 에너지 등 천연자원을 이용한 일차 산업 위주로 발달했다. 중앙아시아 3위 규모의 천연가스(확인 매장량 1조 5억 8,000만㎥, 세계 확인 매장량의 0.9%), 상당량의 원유(확인 매장량 6억 배럴) 및 금 등의 풍부한 부존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제 원자재 가격의 변화에는 다소 취약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 아래에서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고 있어 주로 일차 산업의 수출 비중이 높은 취약한 산업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산업 다각화 및 현대화 추진 중이다.

 

이전에 힘들었던 교육기관. 특히 외국대학과의 협력 교류를 하며 많은 대학을 유치해 나가고 있는데 한국 동국대학교(경주), 가천대, 여주대, 아주대,인하대 등이 이미 들어와 학생들을 모집하고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곳에 있던 많은 선생님이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로 컴퓨터 강사로 함께 일하고 있다. 여전히 한국에 대한 인식이 있어서 많은 학생이 몰리고 있다. 특히나 정권이 바뀌고 눈에 띄는 일들 중의 하나는 부정 입학이 당연시돼 있던 이곳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91년을 시작으로 많은 선교사가 들어와 연합하여 세운 연합신학교에서 졸업생들이 배출되고 또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지도자들이 모여 교회연합회를 만들어 이끌어나가고 있다. 갑작스러운 선교사들의 추방과 준비되어 있지 않은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잘 버티고 지켜나간 지도자들이 나름의 연합회를 조직하여 연합해 나가고 있다.  물론 그 안에서 파생된 부정적인 요소들도 많이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심을 본다. 


지금 나갔던 선교사들, 새로 들어오는 선교사님들이 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곳은 일할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가야 할 곳이 많다. 돌아보아야 할 곳도 아직은 많기 때문이다.


급변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을 보며 어쩌면 우리에게 허락하신 또 한 번의 기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기도 제목

1. 우즈베키스탄의 정치, 사회, 경제, 종교 등 전반에 대하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자.

독립 이후에도 공산주의 시대의 산물인 부정부패가 지속되고 있으며, 정부의 철권통치로 인하여 변화와 개혁은 거의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주술적인 성향이 뒤섞인 민속 이슬람을 믿는 대다수와 소수의 강력한 급진적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은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우즈벡 신자들은 엄청난 핍박과 반대, 감시 속에서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영적 기상도가 변화되도록 기도하자.

2. 우즈벡인 가정교회가 민족과 열방을 섬기는 교회 되도록 기도하자.

정부는 소수민족들의 교회와 신자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용이 있지만, 우즈벡 신자들에 대해서는 냉혹하게 박해한다.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서적과 성경을 태우고, 기독교인 직원을 해고하고, 매우 조잡한 이유를 들어 체포하며(구타와 고문이 뒤따르는), 막대한 벌금을 부과하는(1년 월급의 50배까지) 식으로 박해와 위협을 가한다. 공식적인 교회 등록이 불가능한 상태이지만 가정교회 풀뿌리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다양한 여러 지역의 가정교회들의 연합체인 “우즈벡 가정교회 연합”은 서로에 대해 지원과 안정을 도모하며, 서로를 도우며 한마음으로 협력하며 나아가고 있다. 동료 기독교인을 배반하도록 정부로부터 압박받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하자. 또한, 수감되어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동행하심, 믿음과 담대함을 주시도록 기도하자.

3. 우즈베키스탄 내의 미전도 종족을 위해 기도하자.

많은 무슬림들 가운데 복음을 듣고 믿을 기회를 얻은 사람은 극히 일부이다. 거의 모든 무슬림 집단에서 기독교인은 0.1% 미만이다. 특별히 다음 종족을 위해 기도하자.
(1) 카라칼팍족: 아랄해 남부지역에 거주하며 자치공화국을 이루고 있지만, 우즈벡인들에게서조차 핍박받고 소외당하는 대표적인 민족이다. 거주 및 생활환경도 매우 열악하며 환경적으로도 어려운 지역이고 산업이 거의 발달하지 못한 상황이다. 수도 누쿠스는 박해가 심한 지역이지만 가정교회가 있으며 부흥하고 있다.
(2) 타직족: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 다수를 이루며 살고 있다. 신자 수는 극히 적으며 이란계 메디아인으로 정부와 사회에서 차별당하고 있다. 이들의 고통과 차별이 예수님께 돌아오게 하는 수단이 되도록 기도하자.

4. 우즈벡어 기독 문서와 소수 미전도 종족 문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사실상 정부에서는 종교 서적 출판, 제작 및 배포, 수입 등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가정에서는 종교 서적을 1권 이상 소유할 수도 없다. 기독 문서를 통한 전도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