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권역 | 크로아티아  / Croatia

크로아티아

 


 

 

발칸반도에 있는 크로아티아는 아름다운 나라이고 공기가 아주 맑은 곳이다. 한국은 물론 일본, 중국 등에서도 이 나라를 찾아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러 온다. 이 나라의 종교는 가톨릭이 강하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 성경의 진리인데 가톨릭은 예수를 믿는 믿음에다가 사람의 선행을 더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고 마리아를 숭배하는 이단 중에서도 아주 세력이 큰 이단이다. 아울러 이 나라 개신교는 2%도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훌륭한 자연환경을 가진 나라이기에 많은 관광객이 오는 나라이지만 복음이 필요한 나라이고 한국인 선교사 수도 많지 않다.

 

필자의 선교지 연구를 보고 많은 사람이 도전받고 이 나라 선교를 위해 헌신해 주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쓴다.

 

크로아티아의 국기는 위로부터 가로로 빨강, 하양, 파랑 3색이 균등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한가운데에 크로아티아 문장이 들어가 있다. 빨강, 하양, 파랑의 3색은 크로아티아인들의 영토적 단합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184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당시 크로아티아의 제후로 책봉된 요시프 옐라치치(Josip Jelačić) 제복의 주요 세 가지 색상에서 유래했다.
국기 중앙의 문양은 방패 모양으로 윗부분은 5개의 작은 방패(좌로부터 가장 오랜 크로아티아 문장, 두브로브니크 공화국, 달마티아, 이스트라, 슬라보니아의 각 문장 순서)로 되어 있고, 아랫부분은 빨강, 하양의 25개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로아티아의 국기는 구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시절 빨강, 하양, 파랑의 3색으로 구성된 가로줄 무늬 바탕 한가운데에 붉은색 별이 그려진 국기를 쓰다가 1990년 이후 독립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1)
 


캡처.JPG

크로아티아 지도
크로아티아는 위쪽으로는 슬로베니아와 헝가리가 가깝고 옆 나라로는 세르비아 등이 있다. 지도는 코트라 국가 정보에서 참고하였다.2)

 

 

 

크로아티아 개관

크로아티아 개관은 다음과 같다.3)

국명: 크로아티아공화국(Republic of Croatia(영어), Republika Hrvatska(크로아티아어))

위치: 중남부 유럽, 이탈리아 반도 동쪽 아드리아 해 건너편에 위치함.발칸 반도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음

면적: 56,594㎢(한반도의 1/4), 해안선 6,176km(본토 1,778Km)

민족: 크로아티아인(89.6%), 세르비아인(4.5%) (2001년 기준)

언어: 크로아티아어(라틴문자 사용)

문자: 라틴문자

기후: 지중해성(아드리아해 연안), 대륙성 기후(북동부 지역)

인구: 4,490천 명(2012년 기준)

수도: 자그레브(Zagreb)

국가형태: 공화국

정부형태: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의 혼합

종교: 가톨릭(88%), 세르비아 정교(4%), 이슬람교도(1%) 등

교육: 의무교육 8년

GDP: 459억 유로

화폐단위: 쿠나(Kuna). 2010년 8월 기준 1달러=약 5.5쿠나

독립일: 1991.6.25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

 

크로아티아의 지리

유럽 동남부, 발칸반도 중서부에 위치한 크로아티아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수도 자그레브(Zagreb)를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를 따라 남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어 국토의 모양이 마치 부메랑이나 초승달처럼 보인다. 아드리아 해를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를 마주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헝가리, 동쪽으로 세르비아, 남동쪽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국경을 접한다. 면적은 5만 6,594㎢로 한반도의 4분의 1 크기이며, 달마티아 해안평야, 디나르알프스 산지, 도나우 평원 등 세 지역으로 구분된다.

석탄, 석유, 보크사이트 따위의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공업이 발달했으며, 남부 해안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로 관광산업이 발달했다. 달마티아 해안 지역에는 1,000여 개의 섬이 열도를 이루고 있으며, 아드리아 해의 긴 해안선이 연안 교통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를 포함한 천혜의 자연환경과 다양한 문화유산을 소유하고 있어 매년 1,000만 명 이상의 여행객들이 남동부 유럽의 관광 대국 크로아티아를 찾는다.4)

우리 가족은 자그레브에서 살고 있는데 시내에 가끔 나가보면 한국인들을 볼 수 있다. 많은 한국인이 이곳을 찾고 있다. 지난 2013년만 해도 7만5천 명이던 한국 관광객은 지난해 3배 이상인 24만 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크로아티아 관광부는 추산한다.

 

크로아티아 자다르
noname02.png

한국인 관광객 급증(자다르<크로아티아>=연합뉴스) 양태삼 특파원 = 크로아티아가 물밀 듯이 밀려드는 한국 관광객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13년만 해도 7만5천 명이던 한국 관광객은 지난해 3배 이상인 24만 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크로아티아 관광부는 추산한다. 그 이유로는 TV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꽃보다 누나'(이하 꽃누나)가 크로아티아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꽃누나에 나오지 않았던 아드리아 해 중심 도시인 자다르에도 한국인 관광객이 물밀듯 몰려들고 있다. <사진은 자다르 교회 종탑> 2015.1.25 tsyang@yna.co.kr
다르코 로렌신 크로아티아 관광부 장관에게 짐짓 모른 척 그 이유를 묻자 그는 "크로아티아 자연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운을 떼고 나서 "한국 TV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꽃보다 누나'(이하 꽃누나)가 크로아티아를 배경으로 삼은 덕분"이라고 정확히 설명했다.5) 크로아티아는 아름다운 바다를 가지고 있다. 이곳 날씨는 겨울에는 한국보다는 덜 춥고 여름은 한국 보다는 덜 더운 것으로 느껴진다. 수도 자그레브의 야룬이라는 호수에 여름에 가면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포레치

noname03.png포레치는 크로아티아에서도 문화 관광 스포츠와 레저를 대표하는 도시로 역사의 색채와 향기가 짙게 묻어나는 곳이다. 포레치의 격자거리와 모자이크 양식으로 꾸며진 건물은 관광객으로 하여금 로마제국으로 돌아간 기분을 느끼게 한다. 6세기에 지어진 유프라시안 대성당(Euphrasian Basilica)은 포레치의 대표적인 볼거리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명소이다. 로마 시대의 건축 양식, 중세시대 그린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다.6)

하나님의 은혜로 이 나라의 자연환경은 정말로 아름답다. 더군다나 지방은 물론 수도인 자그레브 역시 깨끗한 공기를 가지고 있다. 이 아름다운 나라에 가톨릭이 아주 강하고 많은 사람에게 복음이 필요하다.

 

크로아티아의 역사

한 나라를 알려면 역사를 알아야 하기에 크로아티아의 역사를 대략 살펴보고자 한다.

 

크로아티아의 토착민은 일리리아(Illyria)족이다. 기원전 3세기 해안 지방에서는 로마와, 내륙 지방에서는 켈트족과 교류하던 일리리아족은 로마 제국에게 영토를 잃었다. 4세기 초에 고트족, 5세기에 훈족의 침입을 받았고 7세기경에는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슬라브계가 대대적으로 유입되었다. 이로써 슬라브족 다민족 국가의 원형이 형성됐다. 7~9세기에는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다가 925년에 토미슬라브(Tomislav) 공이 통일된 크로아티아 왕국을 최초로 수립했다.

1102년에는 동로마 제국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헝가리 왕을 통치자로 하는 헝가리-크로아티아 국가를 성립하였다. 크로아티아는 1918년까지 헝가리와 합병해 있었지만, 법적으로는 독립 왕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1526년 헝가리가 오스만 제국에 패배하면서 1699년까지 크로아티아 대부분 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86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워진 후에는 헝가리의 자치주로 편입되었다.

noname04.png

 

1) 1929년 당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영토. 현재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코소보, 마케도니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출처: (CC) NordWest @ wikimedia commons>noname05.png

2)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전 대통령 요시프 티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이 결성됐다. 1929년에는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왕국(Kingdom of Yugoslavia)’으로 바꾸었다. ‘유고(Yugo)’는 슬라브 어로 남쪽을 뜻하므로 ‘유고슬라비아’는 ‘남슬라브 민족의 땅’이란 의미를 지닌다.
크로아티아인 아버지와 슬로베니아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요시프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가 1944년 소련의 붉은 군대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점령하였고 이듬해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공화국(약칭 유고 연방)’을 세웠다. 1980년 티토 대통령이 사망하자 동유럽에 자유화 운동이 전개되어 1991년 연방에 속해 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가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두 국가의 연방 이탈을 원치 않던 세르비아는 세르비아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슬로베니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인구의 80% 이상이 슬로베니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은 10일간의 전투 끝에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사실상 인정하고 철수하였다.

 

noname06.png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당시 전투로 인한 파편이 거리에 널브러져 있다. <출처: (CC) Peter Denton @ wikimedia commons>

 

 

 

noname07.png

1992년 독립 선포로 내전이 일어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정부 청사가 불타고 있다.<출처: (CC) Mikhail Evstafiev @ wikimedia commons>

 

 

 

 

 

크로아티아에서는 국내의 세르비아인들과 정부군 간에 내전이 발발했다. 이에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수습을 명분으로 내전에 개입하였으나 1995년 국제연합(UN)의 중재로 내전이 종식되었고 크로아티아는 신유고연방과 관계 정상화 협정을 맺었다. 두 나라의 독립에 자극을 받은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도 1992년 국민 투표를 해 독립을 선포하고 수차례의 내전을 거쳐 독립 국가를 수립했다. 민족·언어·종교에서 큰 차이가 없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유고 연방에 그대로 남아 신유고연방인 세르비아-몬테네그로를 결성해 구유고 연방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6년 각각 독립하였다. 구유고 연방은 오늘날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등 여섯 나라로 나누어져 있다. 발칸 반도는 서로 다른 언어와 종교가 뒤섞여 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의 화약고’로 불린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아 가톨릭 문화권에 속한다. 세르비아는 그리스 정교회 문화권에 속하고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에는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가 섞여 있다. 알바니아는 이슬람 문화권에 속한다. 어떤 목적을 위해 지리적 환경의 산물에 불과한 종교를 인간 앞에 둘 때 늘 비극은 싹텄다. 종교는 그러지 말라 하는데, 인간은 부질없음에 매달린다. ‘폴란드’라는 이름을 들으면 음악이, ‘오스트리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비엔나 롤이 떠오른다.
‘헝가리’라는 이름을 들으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이 생각나고, ‘루마니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집시가 생각나며, ‘불가리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요구르트가 생각난다.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사기와 유리가 떠오른다. 그런데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 하지만 다양한 언어와 종교를 지녔던 유고슬라비아는 ‘슬라브 족의 모자이크’라고 불렸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그중 숱한 신의 시험을 거친 크로아티아는 ‘신의 정원’이라고 불릴 만하다.7) 

 

크로아티아는 유럽 남동부에 위치한 작은 나라로,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역사적 유산을 가진 나라이다. 슬로베니아, 헝가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그리고 해안을 통한 이탈리아, 6개국과 인접한 지리적 상황은 다문화 성격 및 역사적 관계를 가진다. 크로아티아의 역사는 6세기 말 또는 7세기 초로 그 흔적을 거슬러 올라간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자국 영토에 대한 유구한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국가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도 논쟁이 없진 않다. 그럼에도 거의 모두에게 이견이 없이 받아 드려지는 것은 국가 기원 초기부터 크로아티아는 로마 가톨릭에 의해 기독교화되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게니투스의 De Administrando Imperio에 의하면 크로아티안들은 자신들의 영토에 정착한 후 얼마지 않아 로마 가톨릭 사제에 의해서 세례를 받고 개종했다고 전해진다.
비록 크로아티아가 동유럽에 있고 지정학적으로 인접한 세르비아가 비잔티 영향력에 더 친근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로아티아가 로마나 서부 유럽과의 지속적 친밀한 관계를 가진 사실을 꼭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로마의 영향을 받았지만, 예전 시 라틴어를 쓰지 않고 당시 자국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매우 강한 민족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이다. 이는 초기부터 나타나는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적 성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민족주의 경향성은 당시 한편에서는 크로아티아의 이권을 또 한편에서는 로마로부터의 이권을 가졌지만, 지금은 그것을 동일한 모서리에 두고 로마 가톨릭과 크로아티아 전통 사이의 종속적 유대관계로 남아 있다. 크로아티아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역사적 기록은 기원후 879년 6월 7일, 교황 요한 8세가 브리니미르 공작에게 dux Croatorum라는 직함을 수여한 것에 기인한다.
 16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유럽 영토에 유입될 때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기대어 원조와 보호를 받는데 이는 크로아티아는 항상 아시아보다 유럽에 더 강한 친근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기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터키, 그리고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공국에 의해 약해져 작은 영토(Central Croatia)만 차지할 정도로 약화되고 만다. 이는 이후 주변 국가와의 영토 분쟁의 요인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특정 민족주의 자들의 마음속에는 공식적이지 않지만 여전히 이 이슈는 남아 있다. 크로아티아 내의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에 따른 문화적 영향력도 보스니아와 비교해 본다면 그리 괄목하지 못했다. 17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영향력은 끝이 나고 크로아티아는 서유럽의 통치로 회귀한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 제국 기간 동안의 터어키, 세르비아, 보스니아 그리고 크로아티아인들의 통합 방어 통치는 이후에도 여전히 혼합된 양태로 남게 된다.
또 다른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종교개혁 기간에 일어난 것으로, 크로아티아 내에서의 종교개혁은 실패로만 끝나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부 유럽에 속한 지정학적 위치로 크로아티아는 종교개혁 초기부터 이와 접촉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가톨릭이 대세인 크로아티아 내에선 이단 종파의 하나로 인식되었고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현재도 중부 크로아티아와 이스트라 지역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시기에 크로아티아 프로테스탄트는 종교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는데 이는 종교개혁의 문헌, 서적, 소책자, 그리고 찬송가 등을 출판 및 배포했다는 것이다. 비록 괄목할 정도의 성과는 없었지만, 여전히 작금에도 충분한 크로아티아 역사적 기록을 통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고 유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세기 초에 발현한 강한 민족주의는 헝가리로부터 크로아티아를 독립을 끌어내는 유고 슬라빅 지역의 연합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는 현시대 역사에서 보여주듯 좋게 끝나지 않았다. 그 결과 세르비아를 제외한 유고 슬라빅 지역 국가들의 자주독립 전쟁은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일어났다는 것이 반증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지도자 요셉 브로즈 티토에 의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6개국은 사회주의 체제 하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를 탄생하게 된다. 비록 유고슬라비아는 한편으론 안정적인 국가를 형성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결코 평화롭진 못했다. 그리하여 티토 사후 유고슬라비아도 붕괴되었다. 그의 죽음은 이 지역 내의 공산주의 체제의 종말을 고했고, 동시에 종종 조국애와 충성이라는 미명하에 숨겨져 꿈틀거리던 강한 민족주의적 경향성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런 민족주의적 경향은 현시대 역사에까지 우리를 이끌었는데,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이 그러하다. 1991년에 시작되어 1995년까지 독립 전쟁은 지속되었고, 크로아티아는 침략자인 세르비아에 대항하여 자국을 방어했다. 전 국토의 54%가 전쟁의 상흔을 입었는데 이는 크로아티아 국민 38%가 주거하던 영토였다. 26%의 국토가 포위 또는 공격받았으며, 이 기간에 13,583명의 사람이 실종되거나 희생되었고, 37,180명의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에서 쫓겨나거나 피난을 해야만 했다. 1991년에 550,000명의 크로아티아 난민이 발생하고 150,000명이 나라를 떠났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1995년 수많은 난민과 이주민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고슬라비아 영토 안에서 발생한 전쟁을 설명할 수 있는 수많은 요인들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 논쟁, 신화와 신화적 추억, 민족주의, 정치,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 등이며 이런 요소들이 불필요한(생겨서는 안 될) 비극을 초래하는 역할을 했다. 이 모든 것이 집약된 상황 속에 현재의 크로아티아가 존재한다. 오랜 전쟁에 시달린 갈등과 다양한 이데올로기 체제 속의 불안정한 크로아티아는 부패와 전쟁의 부당이익의 문을 연, 권력 갈망주의 개인들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다.(2014년 크로아티아 침례교 협회 자료 김경근 선교사 번역)

 

주민
주민은 크로아티아인이 90.4%로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그 밖에 세르비아인이 4.5%, 보스니아인이 0.5%, 기타 민족(우크라이나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헝가리인, 롬인, 루신인 등) 순이다.
크로아티아 전쟁과 보스니아 전쟁 이후 크로아티아인의 비율은 높아졌지만 세르비아인의 비율은 낮아졌는데, 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보스니아 전쟁을 피해 다수 유입하고 크로아티아에 거주했던 세르비아인들이 세르비아와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언어
크로아티아어가 공용어며 폭넓게 사용(96%)되고 있다. 그 밖에 세르비아어, 보스니아어, 헝가리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러시아어, 영어 등이 일부 쓰인다. 크로아티아는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의 참관국이다.

 

종교
종교는 대부분이 가톨릭교다.(87.8%) 나머지는 세르비아 정교회가 4.4%, 이슬람교가 1.3%, 개신교와 기타가 0.3% 등이다.(크로아티아 위키백과)

 

이 나라 대학생들에게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가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답은 모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 대학생에게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는 말씀을 전하였다. 가톨릭이 강한 나라인데 가톨릭은 바른 복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심각한 상황에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인구의 87%가 넘는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이라고는 하나, 성당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비율은 그중 15% 정도다. 이곳 가톨릭은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며, 실제로 말씀을 손에 들고 읽어본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성상, 성물, 성화, 마리아 천사 숭배 등 미신적이고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많다. 개신교인 비율은 인구 약 450만 명 중 0.04%로 추정하고 있다. 집시들의 인구는 정확히 얼마인지 알지 못하지만 집시가 모여 사는 마을들이 군데군데 있다.
유럽연합 가입국 중에서 약소국으로 꼽히는 크로아티아는 다른 무엇보다 영적으로 더욱 열악한 상황임을 0.04% 미만이라는 개신교인 수가 잘 보여주고 있다. 국민의 대다수(87.7%)가 가톨릭 신자라고 말을 하지만 이 나라의 가톨릭은 의식만의 종교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손에 들고 읽어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크로아티아는 복음의 황무지가 아닐 수 없다.
중부의 어느 내륙지역에는 천 년 동안 복음이 들어간 적이 전혀 없는 곳도 존재한다고 하니 이만큼 선교가 시급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출처 김두희 크로아티아 선교사님 답신 내용 중에서)

 

성당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비율은 높지 않다. 그리고 가톨릭은 잘못된 신앙관이 있다. 천국과 지옥의 중간 지대인 연옥을 인정한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 가지만 불신자는 지옥에 간다고 한다. 연옥은 결코 없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천국 간다. 구원 얻는데 인간의 공로는 없다.
하지만 가톨릭은 예수를 믿는 믿음에다가 사람의 선행을 더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무서운 종교이다. 이 나라 한국 선교사님 가정은 수도에는 목사 선교사님 가정은 2가정이고 UBF선교사님 한 가정이 있고 지방에는 한국 선교사님 가정은 2가정이 있다. 그러니까 개신교 비율은 적은데 결코 많지 않은 한국 선교사님 가정이 있다. 바라기는 이 나라 곳곳에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기를, 이 나라 곳곳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기를, 교회를 위해 사역하는 주의 종들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1) 종교적 상황
크로아티아의 국가 종교적 윤곽은 그 자체 역사와 일치성을 보인다. 90%의 인구가 크로아티아인이며 동시에 86%의 인구가 로마 가톨릭이다. 이들은 크로아티아의 정체성을 종교적 정체성과 같이 나타내려 하는 경향을 가진다. 즉 크로아티아인이 된다는 말은 로마 가톨릭 교인이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유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크로아티아의 역사적 지배를 통해 문화뿐 아닌 국가 정체성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통해 다른 주변의 국가들과 별개로 이해될 수 있다. 정교회는 현재 4%이며 프로테스탄트는 0.3%이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 몇 해 동안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의 인구비율이 눈에 띄게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및 다른 크리스천(이단), 무신론과 불가지론자(인간은 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종교적 인식론) 그리고 동양 종교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는 크로아티아가 현재 서구 포스트모더니즘 가치를 선호하는 편파적 정부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요소로 보여지는 이유다. 예를 들면, 최근 몇 해에 공공장소에서 차별적 언어 사용이나 행동을 피하는 정치적 정당성(Political correctness)을 요구하는 사상이 큰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다. 각종 소수 집단(종교 포함)의 인권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고, 이런 혼합 감정들이 나라 안에서 쟁점화되어 신구 간의 내적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며, 유럽과 전 세계 안에서 자신들의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 분투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통적인 신앙가치는 크로아티아의 큰 유산이고 여전히 작금의 크로아티아인 사이에는 큰 부분이지만, 하지만 종교와 신앙이 한 사람의 영적 체험에 근거한 개인적 선택이 되기보다는 그저 전통에 관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2) 종교단체 사이의 협력
크고 작은 종교단체 사이의 대화 창구가 존재한다. 그러나 대화의 주도권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에큐메니칼이라는 모임 자체에만 만족하거나, 또는 모든 대화 참여자의 에큐메니칼적 필요에 대해서는 등한시 여기는) 다수를 차지한 종교단체에 의해 독점되어 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예로 1990년대 이후부터 오시엑(Osijek)과 리에카(Rijeka)의 크리스천 교회들에서 선출된 대표단에 의한 위원회를 통해 에큐메니칼 협력 운동이 존재한다. 에큐메니칼을 이루기 위한 대화는 모든 교회 생활 가운데 항상 존재하나 결정적으로 성취하는 바는 매우 드물다. 이런 에큐메니칼 사역을 위한 기관으로는, 개신교 복음협의회 (PEV-Protestant evangelical council) 또는 복음주의적 종교 교육, 또 전통적인 교회 안에서 매년 1월에 자그레브, 리에카, 오시엑, 슬라본스키 브로드 등지에서 개최되는 ‘크리스천 연합을 위한 주간 기도회’, 에큐메니칼 여성모임의 ‘세계 기도의 날’, 유럽 여성 크리스천 연합 토론회(EFECW)뿐 아니라 가톨릭 카리스마틱 단체에서 시작된 모임들도 있다. 그 외에도 유대인과 무슬림 대표들이 참석하는 정기적 모임이 있다. 이런 모든 수고 가운데도 연합을 위한 참 교제는 아직 현실적으로 소원하지만, 미래에 희망을 걸어본다.

 

3)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도전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유명론(추상적 명제는 명칭일 뿐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사상)과 세속화, 그리고 절망이다. 우리는 더 이상 전쟁이나 무신론적 공산주의하에서 시달리며 고통당하진 않는다. 또 자신의 신앙을 숨겨야 할 정치적 압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금의 요청은 과거 어떤 때보다 더욱 크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삶과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있을 수 없는 유명론과 형식적 신앙이라는 종교적 무관심과 맞서있다.
우리는 또한 종교를 구시대의 유물, 보수주의, 그리고 독선주의로 치부하는 잘 성장된 세속화에 맞서 있다. 종교는 서서히 대중사회 밖으로 밀려 나가고 있다. 유럽연합의 한 국가가 된 후 더욱 확연한 증거로 나타나며 또한 그에 따른 세속적 정책과 가치에 동조하고 있다.
또 하나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는 절망이다. 경제 위기는 지속적으로 증대하여 수많은 실업자들이 산출하며, 크로아티아를 떠나 더 나은 삶을 위해 유럽으로 떠나는 이민자들을 생산한다. 젊은이들은 더욱더 큰 영향을 받는데, 고학력층의 젊은 세대들이 더 이상 일할 곳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증대되는 좌절과 절망을 목격한다. 하지만 이가 어떻게 보면 이때가 크로아티아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큰 도전의 시기라고 생각한다.(2014년 크로아티아 침례교 협회 자료 김경근 선교사 번역)

 

크로아티아를 위한 기도제목
1) 크로아티아 곳곳에 바른 주의 복음이 전파되고 복음을 듣고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도록
2) 이 나라 곳곳에 주님의 교회와 주의 사역자들이 세워지도록
3) 이 나라에 있는 모든 교회가 더욱 부흥하고 이 나라 모든 주의 종들에게 성령의 충만함과 지혜 주시도록
4) 새 정부가 국민 편에서 좋은 정책을 가지고 일하도록 이 나라 지도자들에게 주 안에서 지혜 주시도록
5) 주안에서 이 나라 복지가 좋아지고 이 나라 국민을 사랑하는 봉사자들이 많이 일어나도록(먹을 것이 없어 휴지통에서 주워 먹는 사람이 사라지도록)
6) 이 나라 실업률이 점차 감소하고 경제가 더욱 성장하도록, 주안에서 유럽 난민 문제가 잘 해결되고 이 나라에 결코 테러가 일어나지 않도록( 관광수입이 엄청나게 많은 이 나라에 테러는 심각한 경제 타격을 주게 된다.)
7)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많아지도록, 또한 수많은 복음 사역자들이 이 나라에 들어오고 많은 단기 선교팀이 오도록

 

저희 가정을 위한 기도제목
1)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 안에서 영혼을 더욱 사랑하는 가정이 되도록, 끝까지 은혜로 선교사의 길을 가고 선교사의 삶을 살도록
2) NGO 즉, 협회(한국문화의 이해)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도록, 협회 일 년 치 월세와 관리비를 계속 후원해 주실 후원교회를 속히 주시도록, 협회와 저희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실 많은 교회와 많은 분을 붙여 주시도록
3) 앞으로 무료 한글 학교에 현지 많은 사람이 오도록(2016. 11. 3. 11시 오리엔테이션 때 많은 사람이 와서 등록하도록), 준비를 잘하여 한글학교를 잘 열고 한글학교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한글학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도록
4) 저희 가정을 위해 무엇보다 기도해 주실 교회와 후원자들을 더욱 붙여 주시도록, 온 가족 늘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건강하며 온 가족에게 한글, 영어, 크로아티아어에 지혜 주시도록, 온유 원형 탈모가 완치되고 더 잘 먹고 표준 체중, 표준키가 되도록, 온유와 화평이 건강하게 잘 자라나도록)
5) 기동력(자동차)을 주셔서 복음과 도움이 필요한 지역에도 가고 잘 사용하도록
6) 주안에서 물질의 복 주셔서 주고 섬기는 가정이 되도록, 또한 후원해 주시는 모든 교회와 모든 후원자님 늘 건강하고 더욱 복 주시도록
7) 현지에서 좋은 동역자들을 붙여주시고 좋은 분들을 만나도록 이 나라 한인 분들을 주안에서 잘 섬기도록

 

정리 및 보고

강정훈/한진희 선교사

(크로아티아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1) 출처 크로아티아 개황, 2010. 9., 외교부

2) 출처 kotra 국가정보 -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무역관, 2013. 6. 30.,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3) 출처 크로아티아 개황, 2010. 9., 외교부

4) 크로아티아의 자연 (크로아티아 개황, 2010. 9., 외교부)

5)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5/01/25 19:25 송고

6) [출처: 중앙일보] [Travel Gallery] 찬란한 유산, 크로아티아 중앙일보] 입력 2016.07.30 00:01

7) 출처 「세계 지리를 보다」 크로아티아 글 박 찬영, 그림 문 수민, 네이버 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