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권역 | 모로코  / Morocco

모로코(Morocco)

정리 및 보고: 조00, 김00 선교사

(모로코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빨간색 바탕 가운데 술레이만(솔로몬)의 별이라고 부르는 초록색 오각별이 그려져 있다. 빨간색은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자손을 의미하며, 초록색은 이슬람교를 상징하는 색이다. 오각별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의미한다. 1666년에 빨간색 한 색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국기가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1915년에 초록색 오각별 디자인이 추가되었다. 모로코의 국기는 1956년 3월 2일에 제정되었다.

 

 

1. 국가개요

 

국명 : 모로코 왕국(The Kingdom of Morocco)

인구 : 약3,280만 명 (2012)

수도 : 라바트(Rabat)

최대도시 : 카사블랑카(Casablanca)

면적 : 710,850㎢(한반도의 3.2배)

민족 : 아랍인(60%), 베르베르인(36%), 기타(4%)

기후 : 전 국토가 북위 23。~36。에 있어 온대기후에 속함. 북부는 지중해성 기후, 중부는 대륙성기후, 남부는 사막기후

언어 : 아랍어, 베르베르어, 불어(상용)

종교 : 이슬람교(수니파, 98.7%), 기독교(1.1%)

위치 :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단으로 남쪽으로는 모리타니아, 동쪽으로는 알제리, 북쪽은 지브롤터(Gibraltar)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페인의 남쪽에 위치

독립 : 1956년 프랑스에서 독립

 

2. 모로코의 역사

기원전 11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이 모로코의 해안 지대로 이주하여 내륙 지방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족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한편, 튀니지 일대를 지배하던 카르타고인들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선을 따라 모로코의 탕헤르(Tager), 라바트(Rabat) 등지에 식민 항구도시를 건설하였다. 기원전 196년 카르타고가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뒤 카르타고 난민들이 이들 식민 항구도시로 들어왔다. 그리고 25년경 베르베르족이 세운 모리타니아 왕국이 출현했으나, 로마제국의 황제 칼리굴라(Caligula)에 의해 지배당했다.

 

253년 베르베르족의 저항으로 로마제국은 모리타니아 왕국의 식민화를 포기하였고 로마제국 군대의 철수로 모로코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 5세기 초 반달족이 지중해로 가는 해상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Spain) 남부와 탕헤르, 세우타(Ceuta) 등 모로코 북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533년경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이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Ⅰ) 황제 시기에 반달족을 격퇴하였다.

 

이슬람교도들은 680년 세우타(Ceuta) 점령을 시발로 모로코를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711년경에 무어인은 모로코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732년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베르족을 중심으로 모로코의 이슬람화가 전개되었다.

 

모로코의 이드리스 (Idriss, 8세기~11세기) 왕조는 모로코 최초의 통일 왕조이다. 787년 이슬람교가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된 뒤 시아파 일부가 수니파의 박해를 피하고자 물레이 이드리스(Moulay Idriss)의 인솔 아래 모로코로 피난해 788년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물레이 이드리스 2세(Moulay Idriss II) 시대에 건설된 도시 페스(Fes)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북부를 잇는 중요한 교역지로 발달하였다.

 

모로코의 모라비드 왕조(Al Moravids, 1062년~1145년)는 베르베르족이 세운 왕조이다. 이슬람 수니파가 세운 이드리스(Idriss) 왕조가 유목민의 침입으로 멸망한 공백기를 틈타 모로코 남부 지방에 거주하던 베르베르족이 모라비드 왕조를 세우고 마라케시(Marrakech)를 수도로 삼았다. 모라비드 왕조는 기독교도로부터 발렌시아(Valencia) 등 스페인 남부 지역을 재탈환하고 세네갈, 알제리, 모리타니, 튀니지, 리비아를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 당시의 영토는 1950년대 말 모로코 민족주의자들의 ‘대(大)모로코’ 건설의 기본 개념이 되었다. 모라비드 왕조는 종교·사회 개혁 운동을 통해 모로코 이슬람을 수니파화하였다.

 

모로코의 모하드 왕조(Al Mohads,1145년~1248년)는 아틀라스(Atlas) 지방의 베르베르족이 모라비드 왕조(Al Moravids)를 멸망시키고 라바트(Rabat)를 수도로 수립한다. 모하드 왕조는 1212년 스페인의 톨로사(Tolosa)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라나다를 제외한 스페인 영토 대부분을 기독교도들에게 잃었다. 1492년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이던 그라나다는 스페인에 의해 무혈 함락되었다.

 

모로코의 메레니드 왕조와 와타시드 왕조(1248년~1554년) 시대에 모로코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 중 하나인 메린족은 모하드 왕조 쇠퇴에 따른 혼란기에 페스(Fes)를 수도로 삼고 메레니드 왕조(Merenids)를 수립하였다. 1465년 왓타시드 족이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찬탈함으로서 와타시드(Wattasids)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혼란으로 중앙정부의 권위가 미치는 지역이 매우 제한되었다. 한편 포르투갈이 테투안(Tetuan), 세우타(Ceuta), 탕헤르(Tanger), 아가디르(Agadir) 등 북부와 대서양 연안의 주요 항구를 합병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모로코의 사아드 왕조와 내전(1554년~1665년)으로 모로코 지역에 혼란이 계속되는 중에 사아드 왕조(Saadians)가 수립되고 포르투갈로부터 대서양 연안의 일부 항구도시를 탈환하였다. 사아드 왕조는 이드리스(Idriss) 왕조(8세기~11세기) 이래 모로코의 두 번째 아랍 왕조이다. 사아드 왕조의 아흐마드 엘-만수르(Ahmed El-Mansour) 왕은 그 이전의 모로코 통치자들과는 달리 유럽 북부의 신교도들과 연합하여 스페인의 구교도들을 정치, 군사적으로 압박하고 네덜란드 및 영국과의 통상을 장려하였다. 엘-만수르가 사망한 뒤 세 왕자 간에 내전이 발발하여 왕국은 마라케시(Marrakech), 메크네스(Meknes), 라바트(Rabat) 등 3개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그중 라바트 지역의 세력은 스페인 상선을 상대로 한 해적 행위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였다.

 

모로코 알라위트 왕조 성립과 열강의 침공(1665년~1912년) 시기가 시작되었다. 알라위트(Alaouite) 왕조는 사아드 왕조(Saadians)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지도력 확립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물레이 이스마일(Moulay Ismail, 재위 1672년~1727년) 국왕은 메크네스(Meknes)로 천도하고 남부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강력한 친위대를 중심으로 왕국을 재통일하여 철권통치를 하였다. 시디 무함마드(Sidi Mohamed, 재위 1757년~1790년) 국왕은 포르투갈로부터 엘 자디다(El Jadida) 항구를 되찾고 국제정치 무대에 복귀하였으며 유럽과의 교역을 장려하였다. 1787년에는 당시 왕국으로서는 최초로 독립을 승인했다.

 

유럽의 나폴레옹 전쟁 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 교두보로서 모로코를 침공하였다. 물레이 슬리마네(Moulay Slimane, 재위 1792년~1822년) 국왕은 국내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열강의 침공에 맞서 유럽과의 통상을 금지하고 유럽 영사관을 북부 항구도시 탕헤르(Tanger)로 추방하는 등 고립정책으로 대응하였는데, 이는 왕국의 쇠락을 재촉하였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하고 스페인은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 항구 시디 이프니(Sidi Ifni)를 점령하였다. 모로코의 물레이 하산(Moulay Hassan) 국왕은 1880년 소집된 마드리드회의에서 이를 논의코자 하였으나 오히려 탕헤르에 ‘국제 행정부(International Administration)’를 설립하는 결과만 초래하였다. 스페인은 영국, 이탈리아, 독일과의 협정 아래 1907년부터 모로코를 분할, 강점하였다. 프랑스는 페스(Fes) 협정을 통해 모로코의 국방, 외교, 국내 치안권을 장악하였다. 또 그와 유사한 협정을 통해 스페인은 모로코 북부 해안 지방과 남부 지역 일부를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별도의 협정을 통해 사하라사막에 대한 식민 통치권을 확보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 시기(1912년~1956년)에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 정책에 따라 모로코 아틀라스(Atlas) 산악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확고해졌다. 또한 프랑스인들이 대규모로 이민하고 프랑스 식민 정부가 유화정책을 펼침에 따라 모로코에 프랑스 문화가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스페인은 북부 리프(Rif) 산맥 지역에서 광물 탐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남부 지역에서는 단순한 지배자로 주둔하였을 뿐 식민지 개발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1930년 라바트(Rabat)와 페스(Fes)에 거주하고 프랑스 교육을 받은 모로코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슬람을 배경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하였다. 이에 모로코는 프랑스가 식민지 분할통치 방식으로 산악 지대의 베르베르족에게 기독교를 포교하여 도시 지역의 이슬람교 아랍인들과의 반목을 조장하였다고 주장한다. 1927년 즉위한 무함마드 5세(Mohamed V) 국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모로코의 독립을 추구하다가 1953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강제로 망명하였다.

 

모로코의 무함마드 5세(Mohamed V) 국왕은 모로코의 독립을 추구하다가 1953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강제로 망명길에 올랐다. 무함마드 5세 국왕이 1955년 11월 18일 해외 망명지에서 모로코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였고 1956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모로코는 1956년 4월 22일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에 가입하였다.

 

1961년 3월 3일 물레이 하산 2세(Moulay Hassan II)가 모로코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행정 수도인 라바트(Rabat)와 상업 중심지인 카사블랑카(Casablanca)를 중심으로 국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전통적인 통치자로서의 국왕이 지니는 절대 권력은 계속 유지하였다.

 

1975년 11월 16일 모로코는 35만 명이 서사하라를 행진하는 녹색대행진을 벌였고 이는 스페인령으로 남아 있던 서사하라의 모로코 병합을 촉진하였다. 1979년 8월 5일 모리타니는 폴리사리오(POLISARIO)를 지원하는 알제리 등과 협정을 체결하여 서사하라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고 모로코가 서사하라 전역을 장악하였다.

 

1992년 9월 14일 모로코는 새 헌법을 채택하고 1996년 9월 13일에는 제4차 헌법 개정으로 상, 하 양원을 구성하였다. 1999년 7월 23일 하산 2세 국왕이 서거하고 그해 7월 30일 시디 모하메드 6세(Sidi Mohamed Ⅵ)가 국왕에 즉위하여 2013년 현재에 이른다.

 

3. 모로코의 정치

 

모로코의 정치권력은 여타 이슬람 국가들과는 달리 군부의 힘보다는 종교적인 권위에 보다 기반을 두고 있다. 현 집권세력인 알라위(Alawite) 왕조는 종교적인 합법성 위에 안정적인 권한을 구축해오고 있는데 이 왕족은 자신들이 이슬람 선지자인 모하메드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신의 축복(바라카)에 의해 왕권을 부여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으로 인해 모로코내의 민주주의 발전은 다소 늦은 편이나, 아랍 국가들 중에서는 이웃한 유럽의 영향으로 인하여 가장 개방적인 정치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의 민주주의 평가기관인 프리덤 하우스는 모로코를 “일부 자유주의” 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모로코는 헌법적 왕정 국가로 최초 헌법은 1962에 제정되었으며, 헌법에 따른 국회의원 선거는 이듬해에 이루어졌다. 모로코 헌법은 이후, 수회에 걸쳐 개정되었으며, 최근 2011년 아랍의 봄 시위에 대응하여 현 국왕 모하메드 6세에 의해 이루어진 모로코 헌법은 아랍 국가 중 가장 선진적인 형태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수의 외국 혹은 모로코 학자들은 헌법의 규정된 내용과 실질적인 정치적인 행태에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여전히 권한이 국왕에 집중되어 견제와 균형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알 아카와인 대학의 드리스 마그라위(Driss Maghrawi) 교수는 이를 “겉치레에 불과한 민주주의(Cosmetic Democracy)”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왕은 행정부의 수반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헌법은 국왕을 “시민과 사회단체 지역공동체의 수호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수상은 행정부 전반과 장관들을 지휘하며, 부처 사이의 문제를 조율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왕에 의해서 임명된다.

 

모로코의 입법부는 상원(270명의 의원)과 하원(325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로코의 주요정당은 사회민주운동 당(Social Democratic Movement), 이스티끌랄(Istiqlal, 독립)당, 사회민중연합당(USFP) 등이 있으며 현재는 온건주의 이슬람 당인 정의 발전(PJD, the Justice and Development Party) 당이 다수당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모로코의 사법부는 대법원(a Supreme Court), 지방법원(Communal and District Courts), 행정법원(Admistrative tribunals), 항소법원(Appellate Courts)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2013년10월 10일 시디 모하메드 6세(Sidi Mohamed Ⅵ) 국왕은 벤키란(Benkirane) 정부 수반이 이끌 제2기 내각의 각료들을 임명했다.

 

4. 모로코의 경제와 사회

 

모로코는 2012년 기준 5,400$의 GDP를 기록하고 있으며 최근 4% 내외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수치상으로는 양호한 경제성과를 이루고 있다. 다만, 모로코는 현재 상위 5%의 인구가 80%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국민 약 56% 이상의 문맹률과 높은 실업률을 기록한다.

 

올해의 경우 취업난에 시달리는 대학 졸업자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5월에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세계 은행에 따르면 15세~29세 모로코인 가운데 약 30%가 미 취업 상태이고 일을 할 수 있는 연령대의 44%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요인들은 빈부 격차를 더욱 극대화 한다. 하지만 최근 서서히 중산층이 늘고 있다. 수백만 명의 모로코인들은 프랑스, 스페인, 네델란드, 미국 등지에서 일하면서 그 수입원을 모로코로 보내고 있다.

 

농업이 전체 경제활동 비중 중 20%를 차지할 정도로 농업은 모로코 경제의 제일 큰 몫을 차지한다. 모로코 북부 지역에는 대마(cannabis)가 다량 생산되며 주로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수출되며 모로코 지역의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모로코의 제조활동 역시도 농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수출 주요 품목인 섬유산업도 동, 식물을 원료로 하고 있어 농업생산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관광산업은 모로코의 두 번째 산업으로서 전체 GNP 생산량의 8%를 차지하고 있으며, 최근 6년간 모로코는 향후 관광사업의 비중을 20%로 증가시킬 계획이다. 한편 인광석은 매장량이 578억t으로 세계 3위이나 사하라 지역에 새로운 인광석이 발견되면서 세계 최대의 매장 생산 수출국의 전망이 보인다.

 

모로코는 EU와의 교역비중이 수출, 수입 모두 50%를 상회하고 있어 지역적인 편중성을 보이고 있으나 현재는 중국, 일본, 우리나라와의 교역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2년 기준 수출, 수입 모두 13위의 교역대상 국가이다. 모로코는 모든 FTA체결국가(미국, 유럽, 터키 등)들과의 교역에서 적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적자폭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1962년 공식수교 후 지난 50년간 긴밀한 우호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다양한 정부 차원의 양국간 협력 사업도 적극 추진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들(가전, 휴대폰-삼성전자, LG전자 / 자동차-현대, 기아자동차 / 인프라분야-대우건설 / 의료기 / 섬유분야)이 모로코에 진출하여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대우건설의 경우 모로코에 진출한지 4년도 안되어 유럽 대기업들을 제치고 3개의 대형 공사를 수주했다. 그 중 첫 번째가 Jorf Lasfar 발전소 2기 건설과 Safi의 발전소 건설이다. 한편 독일, 프랑스산 차만을 고집했던 모로코인들이 친환경 자동차나 소형차에서는 한국산 자동차를 선호하고 있다.

 

모로코는 식민지 역사에도 불구하고 식민통치를 하였던 국가 특히 프랑스, 스페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1777년, 미국 국가 수립 후 최초로 미국을 정당한 국가로 승인한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여타 아랍 국가들과 달리 모로코는 서방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아랍 이스라엘 분쟁과 관련하여 아랍세계를 대표하여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미국, 유럽은 모로코 국왕의 안정적이고 친서방적인 통치형태를 높이 평가하면서, 상당액수의 경제원조를 매년 해오고 있다.

 

모로코의 외교정책 중 최우선 순위는 서사하라(모로코정부는 ‘모로코 사하라’라고 칭함) 독립문제이며, 서사하라와 관련된 국제적 협조를 얻기 위해 서구열강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UN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서사하라 독립 투표를 1990년대에 추진하려 하였으나 모로코 거부로 이행되지 않았음에도 UN에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사실이 있는데 이는 모로코와 서방세계와의 원만한 관계에 의한 것으로 분석된다.

 

5. 모로코의 종교

 

헌법상 이슬람은 모로코의 공식종교로 규정되어 있으며, 국왕은 “신앙의 지도자 (Commander of Faithful)”로 지정되어, 이슬람에 대한 존경심을 확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른 민주국가의 헌법들과 같이, 종교의 자유는 조문상으로 주어져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모로코인들에게는 이슬람교만 허용되고, 기독교(Christianity)와 유대교(Judaism)는 외국인에 한해 허용되고 있다. 세계 2차 대전 이전 모로코에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거주하였으나, 이스라엘 건국 이후 대부분 이주 하였으며, 현재 이스라엘 내에 50만 명에 이르는 모로코 출신의 유대인들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다.

 

모로코 국민의 99%는 수니(Sunni) 무슬림(말리키 파)이며, 기독교도(카톨릭, 개신교 포함)는 1%, 유대교는 약 6,0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또한 소수의 시아(Shia)파 추종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수니(Sunni)와 시아(Shiite)로서 나뉘는 무슬림 종파는 그들의 선지자인 모하메드 사후 누구를 정당한 계승자로 보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수니파는 모하메드의 동료들이었던 4인의 칼리파(통치자)를 정당한 후계자로 보며, 시아파는 모하메드의 사위였던 알리만을 유일한 승계자로 본다. 아랍세계의 다수는 수니파로서 약 80%를 상회하고, 수니는 10-15 %로 알려졌다. 시아파는 주로 이란, 바레인, 이라크 등에서 거주한다.

 

여타 아랍국가들과 같이 모로코 정부 부처 중에 이슬람부(The Ministry of Islamic Affairs)가 존재한다. 이슬람부처는 매주 금요일에 개최되는 금요 집회에서의 설교내용과 모로코 내 코란학교에서 인정되는 합법적인 수니파 교리를 설파하는 지를 감독하며, 시아파, 극단주의 이슬람(알 카에다, 무슬림 형제당, 정의와 자선당 등), 수피즘(이슬람의 신비주의)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제한을 가하고 있다.

 

모로코 사법 기관들은 금요 집회 이후의 반 정권적인 정치활동을 금하기 위해서 모스크 부근에 관련 기관을 두거나 감시 인력을 파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정부는 새로운 모스크의 건축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모스크는 정부기관 외 개인이나 단체의 자금으로 건축되고 있다.

 

모로코 정부는 공립학교에서 이슬람 교과목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고 있으며, 이슬람 교육과 관련된 일관된 교육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실용주의 학자들(알 아카와인의 부지디 교수 등)은 공립학교의 커리큘럼 중에 이슬람 종교 관련 과목들이 많이 할애된 것과, 코란 암송 등 이슬람 교육의 영향으로 인한 암기위주의 교육방식이 국가 경쟁력을 저해하는 큰 요소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부유층 자제들은 외국어, IT 경쟁률을 높일 수 있는 커리큘럼을 갖추고 있는 외국계 학교(프랑스, 미국)나 모로코 사립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다. 소수의 사립학교 출신과 공립학교 출신들의 능력격차가 심각하여 재학 중인 학교에 따라 신분차별의 결과가 초래되는 경향이 강하다.

 

프랑스의 식민지 시기(1912-1956) 이후, 소수의 기독교 공동체가 설립되어 교회, 고아원, 병원 그리고 학교를 개설하였다. 지금까지도 이들 프랑스 카톨릭계 기독교도들은 일부 활동 중에 있지만, 외국인 교회는 여전히 정부의 억압 가운데 있다. 또한 모로코 현지인 교회는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이다.

 

지난 2010년 시작된 사역자들의 대대적인 추방으로 인해 240여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강제 추방 되면서 현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확산 되었다. 당시 16명의 구호활동가들은 ‘소망의 마을’이라는 고아원을 10년 이상 운영해 왔다. 그런데 지난 2010년 3월 정부가 이 고아원을 조사한 후 그들에게 며칠 기한을 주고 떠나도록 명령했다.

 

자발적인 개종에 대한 직접적인 제한 규정은 모로코 종교법상(Sharia, Islamic Law) 위법사항으로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 일반 시민들은 시민법과 종교법을 구분하지 않고 있고, 종교법도 모로코인에 대한 영향력이 시민법과 다름이 없으므로, 법규상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 법과 전통은 여타 종교로의 개종을 엄격히 금지하며, 2013년 4월 “모로코인이 타종교로 개종 시 사형에 처한다”는 파트와(Fatwa, 이슬람 법에 따른 명령)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또한 현재 무슬림을 타종교로 개종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모로코 사법기관에서는 실무적으로 형법(Penal Code) 220조를 적용하고 있다. 동 조항은 “한 명 혹은 여러 명의 종교행위를 멈추려 하거나, 종교집회의 참석을 방해하는 자는 3개월에서 6개월의 구류나 95디르함에서 475디르함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은 주로 모로코 내 무슬림의 외국의 종교(주로 기독교)로 개종하려는 시도에 대한 처벌시에 이용되고 있으며, 모로코 정부가 외국 선교사를 추방할 때에도 이 규정에 대한 위반을 근거로 강제조치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모로코가 개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며 전도활동을 금지하는 것은 이슬람 신자의 개종을 막고, 이슬람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모로코 정부는 프랑스, 영어, 스페인어로 쓴 성경의 전시나 판매는 일부 허용하고 있으나, 아랍어로 된 성경에 대해서는 관련규정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사법기관에서 공권력을 이용하여 몰수하거나 세관에서 수입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모로코 기도제목

1.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모를 떠나 노동과 매춘에 시달리며 지쳐있는 어린이들을 보호해 주시고 이 아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참 소망을 깨닫게 하는 교육의 기회를 활짝 열어 주소서.

 

2. 사회적 불평등, 부패, 가난과 중독, 비대해진 공무원 조직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는 자살과 불평이 그치고, 성령님의 새 바람이 불어와 초대 교회의 뜨거운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게 하소서.

 

3.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선교의 피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 강하고 담대하게 일어나, 머무는 곳곳에 복음의 증인으로 서게 하소서.

 

4. 해가 지는 곳이란 뜻의 마그렙(Maghreb) 지역이 주님의 의의 빛으로 떠올라, 만민이 주님을 높이며 예배하는 토착 교회가 서게 하소서 (현지인 교회/외국인 디아스포라 교회)

 

5. 서사하라를 거쳐 아프리카 남서부에서 모로코로 이주한 국제 난민들과 청년들이 말씀으로 온전히 양육되게 하소서.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여호와의 증인들의 헛된 교리에 속지 않도록)

 

6. 지역 교회가 연합하여 영적인 권세와 사단의 세력들을 물리치며, 인내로 경주하는 참된 주님의 중보자들을 일으키소서.

 

7. 인터넷이나 위성방송, 라디오, 비디오 등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발견하고 주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게 하소서.

 

8. 한 손에는 말씀을 쥐고, 세속과 구별된 건강한 한류문화를 통해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교두보 역할을 잘 감당하는 조국 교회 청년들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