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권역 | 부르키나파소  / Burkina Faso
부르키나파소(BURKINAFASO)

 


 

 

소란스런 쿠데타와 반대 쿠데타가 연속적으로 발생하던 1970년대를 보면서 누가 부르키나파소가 서아프리카의 문화적인 예인이 될 거로 생각했겠는가? 문화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선댄스 영화제와 맞먹는 ‘페스파고’ 영화제를 2년 주기로 개최하고 있는 부르키나파소는 ‘서아프리카의 유타’가 되어가고 있다. 영화제가 열리지 않는 해에는 또 다른 문화 축제로 바쁘게 움직인다. 부르키나인들은 식민지주의와 노예제도로 인한 시민들의 냉대로 고생하던 당당한 제국의 오랜 후손들로 더 강해지고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오고 있다. 부르키나파소는 돼지, 귀로, 비단, 안감을 생산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지만 근면, 성실한 민족성과 타 문화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국가이지만 나라를 아름답게 만들려는 갈망과 문화적인 다양성을 간직한 나라다.

 

1. 위치

부르키나파소(구, 상 볼타; Upper Volta)는 용접용 안경 모양으로 서아프리카의 사하라사막 주변의 사바나에 위치한,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로 부르키나파소 남동쪽에 베냉(Benin), 토고(Togo), 가나와 남쪽에 코트디부아르, 서쪽에 말리, 동북쪽의 니제르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2. 기후

한반도보다 조금 큰 면적을 가진 서아프리카의 작은 국가에 속하지만,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기후 분포는 같지 않고 불완전하며 북부지역 대부분이 사막화되어 황폐해져 있고 남부와 중부지역만 얇은 초목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국토는 평지로 불모지이거나 수목의 발육이 불량한 지역이다. 북부로 가면서 목초지는 얇아져서 사하라의 모래언덕과 연결된다. 반대로 남부는 우림과 사탕수수 농장지대이며 동부는 연속적인 고원과 녹색의 산림지대다. 사하라 사막의 끝자락에서 시작되는 부르키나파소는 남부의 비옥한 토지로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 국민이 농부이고 수수, 옥수수, 쌀, 면, 땅콩, 참깨 등을 재배하고 있다. 수만 명의 농업 노동자들이 매년 코트디부아르와 가나로 이주하고 있다. 부르키나파소의 주요한 강은 마훈(Mahoun, 흑 볼타), 나지논(Nazinon, 적 볼타), 나칸베(Nakanbe, 백 볼타)로 중앙 고원에서 남부와 동부 방향으로 흐른다. 강들은 가뭄으로 파괴된 대지에 물을 제공하고 있다. 벌목과 사막화는 가뭄과 급속한 인구 증가, 과다한 목초지 소모, 경기 침체와 더불어 부르키나파소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이 결과로 수도인 와가두구 주변 60km가 완전히 나무가 없는 지역으로 변했다. 목재를 가장 중요한 에너지로 사용하는 주민들로 인해 국토는 마른 뼈처럼 앙상해지고 있다. 일부 공원과 서식지만 인간의 지나친 욕심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으며, 주요 국립공원에서 그나마 코끼리, 하마, 버팔로, 영양, 악어를 볼 수 있다. 부르키나파소의 기온은 세네갈과 비슷한 두 계절로 구분된다. 11월에서 5월이 건기이며 6월부터 10월이 우기다. 일 년 중 가장 더운 시기는 5~6월이며 먼지를 동반한 하마탄 바람이 12월에서 2월 사이 지속해서 불어와 사람들을 예민하게 만든다.

 

3. 면적: 274, 200 km2

 

4. 수도: 와가두구(Ouagadougou, 인구 - 190만 명 거주)

 

5. 인구:18, 365, 123명(2014)

 

6. 민족(종족), 인종: 모시족 40% 이상, 기타 약 60%(includes Gurunsi, Senufo, Lobi, Bobo, Mande, and Fulani)

 

7. 언어:프랑스어(공식 언어), 인구의 90%가 수다닉 계열의 종족언어를 사용함

 

8. 문맹률: 성인 문해율 23. 6%, 학교 2, 936개, 대학 9개, 학교 입학률 남 31%, 여 19%

 

9. 역사
대다수의 부르키나파소 사람들은 15세기에 가나 주변을 질주하던 기수들로 모시 제국의 후손들이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달리 사회계층이 존재하지 않던 마을 구조를 운영했으며 법, 행정기구, 정부조직이 발달해 있었고 기병대가 영토를 방어했다. 후에 이슬람 국가와 인접하고 호의적인 부르키나파소가 어째서 서아프리카에서 모슬렘이 가장 적은 국가 중의 하나가 됐는지 의문시되고 있다.
상 볼타는 프랑스가 지배하기 시작한 1897년까지 안정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맨하튼의 작은 블록보다 더 작게 세분하려는 정책에 반대해 인접국가로 이동해 작은 제국을 유지했다. 상 볼타의 일부는 말리, 니제르, 코트디부아르로 편입됐고 남아있던 상 볼타는 이웃국가인 코트디부아르의 프랑스인 농장으로 원주민 노예로 붙잡혀 가기도 했다. 다음 60년 동안은 코트디부아르가 서아프리카의 여왕으로 남아있게 되었지만, 상 볼타는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 나라로 전락하게 되었다. 20세기 중반에 식민정책이 약화되면서 상 볼타는 독립을 원하는 국가 대열에 합류한다. 1960년 모시족인 모리스 야메오고(Maurice Yame’ogo)가 최초의 대통령에 당선된다. 불행히도 야메오고의 선거를 통한 승리는 실정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졌고 경제정책의 실패와 부패에 대해 자유로운 성향은 일반 민중에 의한 폭동과 시위를 일으켰다. 1966년에는 군이 주도한 쿠데타가 발생하고 야메오고는 정권에서 축출된 후 공공기금에 의해 생활하게 되었다. 야메오고의 부재로 인한 권력의 공백은 연속적인 쿠데타 끝에 1980년대에 젊은 사회주의자인 27세의 토마스 상카라(Thomas Sankara) 대위가 통제권을 장악하면서 부르키나는 급진적인 개혁을 맞게 된다. 이때, 상카라는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김일성 생일 때면 전용 비행기를 타고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했다고 한다. 수도 와가두구에는 김일성 통치 시절에 세워진 붉은 광장이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다. 상카라는 대내외적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면서 많은 적을 만들었다.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직위를 해제하거나 심한 반대를 하는 사람들은 숙청했는데, 이때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가 동조하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킬 수가 없는 구조이다. 그런데 상카라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뒤에서 프랑스가 방조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상카라는 철저하게 부정부패를 뿌리 뽑는 데에 힘썼다. 공무원들을 5호 담당제식으로 묶어서 감시하게 했으며, 공무원들 책상에 공문서가 3일 이상 있지 못하도록 일 처리에 대해서 즉각적인 시행을 명령했다. 그리고 모든 공무원은 해외에서 수입하는 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 국내에서 자체 생산하는 제품의 옷을 입게 했다. 이때, 부르키나가 서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앞서는 면 제조업 국가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상주의적 사회주의를 일으키는 것은 좋았는데 상카라는 독불장군식으로 변해갔다. 공공 부분의 발전과 함께 국호를 부르키나파소(‘정직한 사람들의 땅’ 또는 ‘청렴한 사람들의 땅’이란 뜻)로 개정하고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실행했다. 집중공격 방식으로 모든 아동에게 홍역과 황열병에 대한 예방접종을 시행하고 모든 마을 자체에서 의사를 교육했으며, 350여 개의 학교를 신설하고 장관의 특권을 약화했으며, 니제르 국경까지 새로운 철로를 건설했고, 와가두구를 비(非) 마르크스 색채로 채색했다. 현재 와가두구 시내에는 예전에 북한이 세워준 붉은 광장이 여전히 있는데 다만 명칭만 달리 부르고 있다. 급진적으로 진행된 사회주의 정책은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얻었으나 당시의 엘리트 그룹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장관들의 임금을 25% 삭감으로 착실히 진행되는 정책이 호응을 얻었으나 상카라의 회의에 대한 습관은 종족 지도자들의 전통적인 양식에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서양국가들은 정책에는 인상을 쓰지 않았으나 서양 제국주의를 공공연히 비난하던 카다피(Gaddfi)와 상카라의 친분 관계를 문제시 여겼다. 예상대로 당원과 조언자들을 없앤 상카라 정권은 오래가지 못하고 브레이스 콩파오레가 쿠데타로 재집권하게 되었다. 쿠데타는 상카라를 와가두구 외곽으로 끌고 가 저격함으로써 성공하게 된다. 콩파오레는 권좌를 회복하고 정부인사의 임금을 상카라 이전 수준으로 회복시켰으며 식품 공급을 감소시켰다. 불만스러운 시민들은 상카라를 그리워하고 있으며, 리비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부르키나파소 정부에 대해 미국은 발끈하고 있다. 상카라는 혜성처럼 나타나서 혜성처럼 지나가 버린 인물이었지만 부르키나파소의 국민들은 그들의 가슴에 상카라에 대한 그리움과 그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있다. 상카라, 그는 지난 과거를 알고 있는 부르키나파소 국민들의 마음속에 지금도 살아 있다.

 

10. 정치
독립일: 프랑스로부터 1960년 8월 5일 독립함

국가원수: President Blaise COMPAORE(since 15 October 1987)

주요정당: Ministers act as cabinet
1987년 10월 집권한 콩파오레 대통령은 대국민 유화 정치를 시행하고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하여 1991년 12월 대선에 당선되었다. 1992년 5월 총선, 1995년 2월 지방의회 선거 실시 등 점진적 민주화 추진으로 전 국민의 호응과 지지를 얻는데 힘입어 1998년 11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됨으로써 확고한 정치기반을 확립하였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2년 5월 총선에서 집권당이 승리한 데 이어 1997년 5월 총선에서도 총 의석수 111석 중 101석을 집권당이 차지함으로써 국회 내에서의 안정적 정치기반을 구축하였다.
현 콩파오레 대통령은 상기와 같이 안정된 정치기반을 토대로 경제성장과 사회안정을 이루는 데 비교적 성공한 것으로 평가를 받아왔으나 1998년 12월 언론인 피살사건 등을 계기로 반정부 움직임이 전개되고 2002년 5월 총선에서 다수 군소야당이 난립하는 정치구도 대두되었다. 그러나 2005년 11월에 시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분열 및 비조직화로 현 대통령 콩파오레 후보가 80% 정도의 절대 다수표를 획득하여 3선 연임에 성공한다.
1) 콩파오레 대통령의 장기 집권
2010년 11월 대선에서 80. 2%의 득표율로 재선됨으로써 콩파오레 대통령은 1987년 쿠데타 집권 이래 장기집권하고 있다. 여당(CDP)은 2000년 개정 헌법상 대통령 연임 제한 규정을 철폐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으나 야당, 시민단체, 국제 사회는 반대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2) 전국 각지 대규모 시위
2011년 2월 반정부 시위 도중 체포된 학생의 사망사건 이후 학생, 청년, 상인, 공무원 등 각계각층은 진상조사와 고위층 부정부패, 빈곤 타파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전국 각지에서 전개하였다. 4월, 수도 와가두구와 여타 도시에서 군인과 경찰들이 봉급, 수당 지급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면서 도심에서 총격을 가하고 상점을 약탈하는 소요사태가 발생하였다.
3) 4. 21 전면 개각
2011년 4월 21일 콩파오레 대통령은 전면 개각을 단행하고 군 수뇌부를 대거 교체하였다. 국무총리로 언론인, 홍보 전문가 출신인 Luc Adoulphe Tiao를 임명하고, 기존의 39개 장관직을 29개로 축소하였다. 또한, 군 장악 문제를 핵심 사안으로 보고 대통령이 국방장관을 겸임하는 등 조치를 했으나 반정부 시위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 부르키나파소의 지리적 여건상 아랍국가들의 재스민 혁명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프랑스를 비롯된 국제사회는 콩파오레 대통령이 연임 제한 조항 철폐 개헌을 포기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11. 경제
국내 총생산 GDP : US $ 76억
1인당 국민 총생산 GNP: US $ 768
경제 성장률:6. 5%/인플레이션: -0. 8%
주요 산업: 순면, 음료, 농업 생산, 비누, 담배, 모직, 금
주요 교역 대상국 : 프랑스, 중국, 코트디부아르, 대만, 이탈리아, 태국
1) 경제성장
2010년 실질 GDP 성장률은 농업과 광업 부문의 활발한 성과를 바탕으로 7. 9%의 높은 증가세를 보였다. 금 생산에 따른 반사 효과와 공공 부문의 활발한 투자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2011년 EIU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의 불안정한 정세의 영향으로 2011년엔 4. 4%로 성장이 둔화되고, 2012년에는 5. 8%로 회복세를 보였다.
2) 인플레이션
2010년 들어 부르키나파소의 소비자 물가 지수는 내림세로 돌아선 -0. 8%를 기록하였다. 2010년 농업 부문의 생산량 증가에 따른 농산물 공급량 증가로 2011년 전 세계적인 식량 가격 상승을 상쇄하였으나 높은 국제 상품 가격은 수입 상품의 가격 상승과 국내 물가 상승의 원인이 되었다.
3) 대외 부문
부르키나파소의 2대 신흥산업인 금과 면화의 국제 가격이 상승함으로써, 수출로 인한 소득이 증가 되었다. 2011년~2012년 평균적으로 총 수출이 19% 정도 증가하였으며, 특히 금 수출은 40% 성장하였다. 그러나 높은 국내 수요와 국제상품가격은 수입액 역시 증가시켜, 2010년에는 3억 2천7백만 달러에서 2012년 6억 7천5백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12. 종교
현지 고유의 종교가 50%, 이슬람교가 30%, 가톨릭 16%, 기독교 4%이다. 그러나 북쪽 도리 지역의 기독교는 0. 3%이며 대부분 수도 와가두구에 밀집되어 있다.

 

13. 사회/문화
1) 인종구성과 전통
부르키나파소에는 60개 이상의 부족이 살고 있고 각자의 사회와 문화적인 구분을 하고 있으며 가장 두드러진 인종은 부르키나베(Burkinab’e)족이다. 주요 그룹으론 보보 디울라소(Bobo Dioulassa)에 사는 보보복과 푸라니, 로비, 세푸노가 있으며 가장 인상적인 인종은 모시 족이다. 모시는 황제 모로-나바(Moro-Naba) 또는 왕실의 후손들로 사회적으로 높은 명성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모시 족의 일부는 모슬렘이지만 부르키나파소는 서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와 달리 이슬람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나라이다. 절반 이상의 인구가 전통적인 애니미즘 신앙을 갖고 있다. 각 인종은 고유한 예술 방식을 갖고 있으며 모시, 보보, 로비의 예술은 상당히 유명하다. 모시는 영양으로 만든 가면으로 유명한데 백색 또는 적색으로 칠해진 2m가 넘는 인상적인 가면이다. 보보는 다산을 기원하는 의식에서 여신인 도를 위해 사용하는 적, 백, 흑의 줄무늬가 들어간 나비 가면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보보 족은 동물원이 되고도 남을만한 다양한 동물 가면을 만드는데 나비 가면은 유일하게 수평으로 쓴다. 로비 족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보존된 전통을 갖고 있는데 젊은 소년들을 위한 통과의례 의식인 됴로(Dyoro)가 유명하다. 로비 예술품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치가 높은 목각 조각이 있다.
부르키나파소는 아프리카 예술과 문화의 부흥을 주도하고 있다. 2년마다 열리는 페스파코 영화제(FESPACO Film Festival)는 1969년에 최초로 개최됐으며 많은 발전을 거쳐 현재는 할리우드 독립영화의 아프리카 버전이 되고 있다. 영화제가 열리지 않는 해에 열리는 다른 문화행사는 음악, 무용, 극장공연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적인 작업이 이뤄진다. 부가적인 것으로 부르키나파소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기념품 시장을 갖고 있다. 독특한 음식을 위해 소스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구만드(Goumands) 덕에 부르키나파소의 모든 음식은 소스와 함께 나온다. 부르키나파소가 프랑스와 연관을 가졌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 이상하기도 하지만 riz souce(밥과 소스), riz gras(밥과 채소 소스), souce de poisson(생선 소스), boeuf souce aubergine(소고기와 가지 소스), mouton sauce tomatoe(양고기와 토마토 소스) 등 모든 음식을 소스와 함께 즐길 수 있다. 지방에선 숲에서 잡은 또또라고 하는 쥐고기(소스를 포함하거나 안 하거나 상관없이)가 고려해 볼 만한 별미인데 여자들은 먹지 않는다.
2) 축제 및 행사
만약 부르키나파소를 여행할 계획이라면 페스파코 영화제를 놓치지 마라. 와가두구는 큰 입술의 모양을 만들어 영화제 준비로 분주하며 서아프리카 영화 제작자들을 맞이하기 위한 전시장을 마련한다. 영화제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스필버그처럼 유명한 사람은 없지만 페스파코 영화제에 수상한 작품들은 칸느를 포함한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경우가 높다. 영화제는 2월의 마지막 주 일요일에 시작된다. 영화제가 열리는 같은 해에 부르키나파소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보보-디울라소(Bobo-Dioulasso)는 La Semaine Nationale de la Cluture를 개최한다. 전통적이고 현대적인 형태의 음악, 무용, 극장공연, 회의가 혼합된 문화적으로 화려한 행사로 일주일간 열린다. 4월의 마지막 주에 개최된다. 매주 금요일 오전에는 모로-바바는 화려한 주홍색 예복을 입고 자신의 왕궁에 나타나는데 시적인 프랑스어 표현으로 la c’eremonie du Nabayius Gou라고 부르며 영어로는 ‘황제의 잘못된 출발’ 정도로 번역된다.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말을 타고 가다 마음을 바꿔 말에서 내려 왕궁으로 재입성한 황제에 관한 이야기다. 매일 반복되는 불명예스런 행동에는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데 그것은 모시 왕조의 생존을 위한 상징으로 남아있다.

 

14. 선교 현황
1) 간략한 선교지 현황
종교의 자유(1-10) 5
전도 인구 63. 1%/미전도인구 4, 406, 314명(36. 9%)
기독교인의 안전도(1-100) 52/순교자 100명
연간 교회 성장률 15. 6%/연간 새 신자 증가율 4. 9%
선교현황(1-7) 2
성경 번역 현황 전체 6/신약 11/부분 10/진행 26
해외 선교 기관 54개 기타 선교 기관 30개
전임 기독교 사역자 7, 000명/현지인 기독교 사역자 6, 000명
현지인 해외선교사 40명/외국인 선교사 1, 000명
한인 선교사 16명(부부)
2) 부르키나파소의 미전도 종족
고우르만체바인(359, 000명), 나네리게인(65, 000명), 나티오로인(4, 000명), 남부 누나인(150, 000명), 남부 바르카인(55, 000명), 남부 투씨안인(19, 500명), 노우모우인(1, 500명), 닌카르세인(25, 100명), 다가바인(250, 000명), 도고베인(20, 000명), 도고와인(10, 000명), 도곤인(138, 000명), 드잔인(14, 100명), 드준구인(13, 000명), 라라 브와바인(55, 000명), 로비인(285, 500명), 르옐라인(250, 000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