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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by Paul posted Apr 2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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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1. 위치
유럽의 배꼽으로 알려진 헝가리는 카르파티아 분지에 위치하고 있는 내륙국으로, 크게 동북쪽의 카르파티아 산맥, 서쪽의 알프스 산맥, 동쪽의 디나르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국토 대부분이 분지로 이루어져 있는 헝가리는 해발 고도 400~1,000m 정도의 산악 지대가 국토 면적의 약 5%에 불과할 정도로 국토의 대부분이 해발 고도가 낮은 평야 지대이다. 헝가리의 대표적 하천인 도나우 강과 티서 강이 국토의 중앙부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이 강들의 유역에 헝가리 대평원이 펼쳐져 있다. 중부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헝가리에는 약 1,200개의 호수가 있는데, 중부 유럽에서 가장 큰 벌러톤 호를 비롯하여 두난뚤의 베렌체호, 남부 국경에 있는 훼르토호 등의 천연 호수가 있다. 헝가리는 주변 7개 나라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2. 기후
유럽의 중앙에 있는 헝가리는 대륙성 기후뿐만 아니라 서안 해양성 기후, 지중해성 기후가 교차하는 곳으로, 기후의 특성이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처럼 4계절이 나타나는 헝가리는 카르파티아 산맥, 알프스 산맥, 디나르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대체로 여름과 겨울의 온도 차가 큰 대륙성 기후가 나타난다.

3. 인구
2007년 헝가리 인구는 995만 명으로 2001년만 해도 1,000만 명이 넘었으나 인구가 점차 감소하는 추세이다.
인구 구성을 보면, 헝가리인이 전체인구의 92.3%를 차지하며 그 외 루마니아계 1.9%, 독일계, 슬로바키아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2001). 한때 헝가리 국내에는 독일인?유대인이 꽤 많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이주 등으로 말미암아 그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헝가리인은 오래전부터 북아메리카?남아메리카?오스트리아 등지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다. 그 밖의 민족으로는 로마인(집시)과 화교인이 있다. 헝가리 과학 아카데미의 추계로는 인구 약 1천만 명 중에서 약 60만 명이 집시이다.

4. 역사
1) 헝가리역사(20세기 전)
헝가리인(마자르족)은 우랄산맥 남서쪽 볼가 강 유역 부근에 정착하고 있었다. 5세기경 훈족의 침입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하던 중 비잔틴 황제 레오 6세와 결탁하여 불가리아인을 공격하였지만, 정착에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895년 다시 페체네그인의 공격을 받아 카르파티아산맥을 넘게 되었고 이듬해 896년 추장 아르파트의 지도 아래 현재의 헝가리 지역(당시의 판노니아 지방)에 정착하게 되었다. 최초의 대공(大公) 아르파트 때에 동프랑크왕 아르눌프와 동맹하여 모라비아국을 멸망시키면서(902∼907) 정주하기 시작하였다. 오랜 시대에 걸친 민족 대이동 속에서도 강인하게 살아남은 마자르인은 아르파트가(家)의 게저(재위 972∼997) 시대에 이르러 봉건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게저의 아들 이슈트반 1세(재위 997∼1038)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행정조직을 정비하여 거의 완전한 국가적 통일을 실현, 평화로운 정주 생활의 터전을 닦았다. 1241∼42년에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해졌으나, 15세기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왕(재위 1458∼1490) 때에는 중부 유럽 제일의 강국이 되었고, 문화적으로도 궁정을 중심으로 르네상스 문화가 개화하였다. 그러나 1526년의 모하치전투에서 오스만투르크에 패한 후 약 2세기에 걸쳐 국토의 대부분이 이민족에 의하여 점령당했다. 서부와 북부 지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세력권에 들어갔으며 동부의 트란실바니아 지방만이 투르크의 보호 아래 반독립 공국이 되었다. 공국의 전성기는 베틀렌(재위 1613∼1629)의 시대로 수도 줄로페헤르바르(현 알바이울리아:현재 루마니아의도시)는 30년 전쟁 당시 프로테스탄트 문화의 중심지였다. 17세기 말 오스만투르크 대신 헝가리 전역의 지배자가 된 합스부르크가는 헝가리인에 대하여 경제적?종교적 압박을 가하였고, 그 결과 트란실바니아의 라코치 페렌츠 2세를 중심으로 대규모 민족반란(1703∼1711)이 일어났다. 반란이 실패한 뒤 오스트리아의 헝가리 지배체제는 일단 확립되었으나 19세기에 들어와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어 1848∼1849년 독립전쟁 시기에 정점에 이르렀다.
L.코슈트를 지도자로 하는 헝가리 측은 국민군을 조직하여 오스트리아군에 항전하였으나 러시아군의 개입으로 항복하였고 코슈트는 국외로 망명하였다. 독립전쟁 후 헝가리는 한때 오스트리아의 군정에 시달렸으나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화약(和約:아우구스라이히)이 성립됨으로써 이중제국의 일원이 되어 정치적 안정을 획득하였다. 그 후 헝가리인의 경제적?문화적 수준은 두드러지게 높아졌다.
1988년 5월 32년 만에 카다르가 제2선으로 물러나고 서기장 카를리그로스가 취임하면서 정치개혁이 급진전하였다. 1989년 10월 23일 국가원수 대행인 국회의장 마티야스 수로슈는 40년간의 일당 독재 국가사회주의의 마감을 선언하고 다당제와 대통령제 도입, 국호변경 등을 골자로 하는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1990년 3월에 복수정당제가 도입되었고, 자유시장 경제를 토대로 한 외자 유치와 대외개방정책을 채택하여 오늘에 이른다. 1991년 구소련이 해체되자 헝가리는 서유럽국가들과 관계를 더욱 밀접히 하여 1999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2004년에는 유럽연합(EU)에 가입하였다.

5.정치
헝가리 정부
헝가리는 1989년 10월 개정된 신헌법에 따라 의원내각제에 대통령제가 가미된 절충형태의 정치체제를 채택하였다. 즉 시민적 민주주의와 민주적인 사회주의를 근간으로 한 다당제에 기초한 자유선거를 하고 이를 통해 구성된 국회에서 국가수반(공화국 대통령)이 선출되며 의회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내각책임제가 운영되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의 수반이자, 국가의 통일을 상징하는 자로서 국가조직의 민주적 운영을 위하여 노력하는 자이며,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로 군 통수권을 가진다. 대통령은 의회에서 간접 투표로 선출되고 임기는 5년이며 1회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 대통령은 선출하지만 통치하지 않기 때문에 실권은 없으며, 행정권한은 대부분 총리가 행한다. 행정부의 최고기관은 각료회의로,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대통령의 추천을 받아 의회에서 선출된 장관들로 구성된다. 각료회의는 내각을 지도하고 법을 집행하며 경제계획을 이행한다. 각료회의 의장인 총리가 행정 수반이 된다.

6. 경제
1) 헝가리의 경제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전형적인 농업국이던 헝가리는 오늘날 상당한 수준의 공업국이 되었다. 1968년의 경제 개혁으로 인해 1974년의 공업생산은 전쟁 전의 10배를 초과하였으며, 1975년에는 공업 부문 종사자 수가 전체 노동력의 37%를 차지하게 되었고 동부 유럽 여러 국가 중에서 소비물자가 가장 풍부한 국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5차 5개년 계획(1976∼1980)의 전반까지는 경제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1980∼1983년에는 수입원료 및 연료 가격의 앙등(昻騰)과 무역수지의 악화 등으로 성장세가 둔화되기 시작하여 경제성장률이 1985년 1.0%, 1988년 0.5%로 계획을 밑돌았다. 대외채무는 1973년 10억 달러에서 국영기업의 채산성 저하 등으로 인하여 1993년 150억 달러로 늘어났다.
2004년 EU에 가입한 이후 실질경제성장률은 2004년 4.0%, 2005년 4.1%, 2006년 3.9%의 완만한 성장률을 보이고 실업률은 2004년 6.1%에서 2006년 7.6%로 약간 증가하였으나 이는 강력한 긴축재정 정책의 영향이다. 1인당 GDP는 유럽연합 25개국 평균소득의 3분의 2 수준인 17,300달러이며, 2006년 헝가리 전체 산업구조는 농림수산업 3.8%, 제조 22.7%, 건설 3.8%, 서비스 56.5%(무역 10.8%, 운송, 창고 6.7%, 금융 19.3%, 공공 15.8%, 기타 3.9%), 기타 13.2 % 순으로 산업구조가 상당히 고도화되었다.

2) 헝가리의 교통
헝가리는 동부 유럽의 중심지로서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및 우크라이나 등 7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생산 허브 및 물류 중심지로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헝가리는 유럽교통망과 연결된 6개 도로망(1,230㎞)이 있으나, 헝가리 내부 도로망과 연결된 부분은 41%에 불과하여 EU 경제체제와의 연결을 통한 경제발전 도모 및 낙후지역 개발 촉진을 위해 도로망 확충에 노력하고 있다. 이미 2006년까지 803km에 이르는 도로 구간을 확충하고, EU를 하나로 연결하는 팬유럽고속도(Pan-European Transportation Corridor)가 헝가리를 관통하면 4개의 EU 지정 물류 전용 고속도로(EU Defined Transport Corridor)와 연계시켜 사통팔달의 지리적 이점이 빛을 발하도록 할 예정이다. 수도 부다페스트는 서유럽에서 발칸 방면으로 달리는 육상 국제선의 통과지로, 최근에 관광에 역점을 두고 도로 정비에 힘쓰고 있다.

7. 사회
헝가리는 무료의료제도?연금?가족수당 등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있다. 의료 및 연금은 사회보험에 의해 처리되고 노동조합 전국평의회가 운영과 관리?감독을 맡고 있다. 연금의 종류에는 노령?장애?과부?고아 등의 각종 연금이 있으며 노령연금은 남자 60세, 여자 55세 이상의 사회보험 가입자가 받을 수 있다. 1998년 현재 연금 수령인구는 전체인구의 31.2%이다. 최근 연금수혜를 받는 노년인구 증가 등으로 인하여 재정적자가 증가하고 있어 이를 축소하기 위해 정부는 자구책을 찾고 있다.
노동시간은 공업 및 건설공업에서는 주 44시간 제이며 그 밖의 직종은 주 48시간 제가 보통이다. 또 최근에는 주 5일 근무제도 일반화되고 있다. 노동환경의 보전, 부인?소년의 노동보호는 비교적 잘 이루어져 있으며 종업원 100명 이상의 특정 기업에 근로자 문제를 심사하는 기관으로 사회재판소가 마련되어 있다. 한편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지고 있어 정부는 인구증가 정책과 함께 효율적인 노동력 배치 및 건강 증진 계획 수립에 애쓰고 있다

8. 언어
헝가리와 그 주변은, 독특함이 풍부한 문화를 가졌던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였던 것이 19세기 이래 잘 알려져 있다.
인구의 84.4%가(2000년)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헝가리인(마자르인)이다. 이름표기는 우리나라와 같은 방법으로 성이 이름의 앞에 놓인다. 지식인들은 러시아어, 영어, 독일어를 구사하며 대부분 사람은 독일어를 할 줄 안다.

9. 종교
1600년대에는 헝가리인의 90%가 개신교 신자였다. 이후 반종교개혁(16~17세기 가톨릭교회 내부의 자기 개혁운동)과 차별이 있던 시기에 상당수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공산주의자는 1948~1988년까지 차별, 협박, 침입 등을 통해 모든 기독교인을 엄격하게 탄압했다. 2000년에는 기독교 회심 1,000년을 기념했고, 1990년 이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2011년 기준으로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다.
전체 : 10,198,315명 (100%)
가톨릭교회 : 5,558,901명 (54.5%)
로마가톨릭교회 : 5,289,521명 (51.9%)
그리스 가톨릭교회 : 268,935명 (2.6%)
개신교회 : 1,985,576명 (19.5%)
동방정교회 : 15,298명 (0.1%)
기타 기독교 : 24,340명 (0.2%)
유대교 : 12,871명 (0.1%)
기타 종교 : 13,537명 (0.1%)
모든 종교 : 7,610,553명 (74.6%)
무교 : 1,483,369 (14.5%)
응답을 원치 않음 : 1,034,767명 (10.1%)
잘 알 수 없음 : 69,566명 (0.7%)

10. 교육
헝가리의 현대 교육제도는 1961년의 교육체제 개선에 관한 교육법령이 기본이다. 공산주의 시절에는 모든 교육 시설이 국립이고 무상교육이 제공되었으나, 1990년 이후 사립교육이 부활된 후 국립대학은 1995년부터 소액의 수업료를 받고 있다. 초등학교 1년부터 16세까지의 교육은 의무교육이며 초등교육 과정은 4년, 6년, 8년제가 있고, 중등교육 과정은 문법학교와 직업학교 과정으로 나누어진다. 고등교육 과정은 3, 4년제의 전문대학과 5, 6년제의 정규대학 과정이 있다. 헝가리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은 부다페스트에 있는 에트베슈로란드대학(1635년 창설)이다.
교육문화국으로서의 자존심은 헝가리 도서관 수와 장서에 잘 나타나 있다. 전국적으로 대형도서관이 1,700개소, 중소형도서관이 10,000여 개소에 이르며, 1802년 개관한 국립도서관의 경우 5백만 권, 1826년 설립된 학술원 도서관은 160만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다. 2003년 현재 문맹률은 0.6%이다.

11. 헝가리 기독교(개혁교회)의 역사
아시아(Stephen Neil은 헝가리가 몽골에서 기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를 기원으로 한 머저르(Magyar)족의 언어와 습관은 핀란드(Finland) 사람들과 유사하게 9세기 말 무렵에 유럽에 출현했다. 이들 머저르(Magyar)족은 잔인하고 파괴적인 백성들로서 그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는 사제들의 시체와 교회의 모독만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방의 모든 나라가 두려워하였다고 전한다.
955년경에 그들은 아우구스부르그(Augusburg)에서 오토 1세(Otto I)로부터 결정적인 패배를 당함으로 인해 그들의 서쪽으로의(westward) 침략은 중지되었고, 서방은 이로써 머저르(Magyar)족을 서구의 그리스도교 세력권으로 묶어 놓을 수 있었다. 서방에서는 사제와 열심 있는 평신도들을 헝가리로 파견하였다. 이로 인해 개종자들은 급속히 증가하였다.
995년에 이슈트반(Istvan : 975-1038)은 바바리아(Bavaria)의 듀크헨리 2세(Duke Henry II)의 딸 기셀러(Gisela)와 결혼함으로 헝가리는 서방세계의 제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때문에 헝가리가 완전히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다.
이슈트반(Istvan) 사후(死後) 이교도들의 반란이 잇달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기독교는 살아남았고 11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기독교가 헝가리 국민의 국교로써 헝가리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바탕에서 시작된 헝가리였지만 헝가리의 영적 상황과 대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며, 16세기 서유럽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물결은 헝가리까지 흘러들었다.

1) 개혁의 시기(16세기)
당시 헝가리 종교개혁에 있어서 널러 퍼져 있었던 가장 큰 특징은 본질적으로 말씀에 기초로 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에 있었다. 설교자는 모든 지역을 순회하면서 일반 대중의 언어로 성경을 풀이하고 설명해 주었다. 목회자들은 책을 출판했으며 개혁의 이유와 필요성을 전파하는 데 또한 노력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예배와 설교는 라틴어로 진행됐으나 라틴어로 된 예배의 낭독 대신에 모국어인 헝가리어로 설교했다. 이것은 선례가 없었던 방식이었으며, 모든 이들에게 신앙과 삶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게 하였다. 16세기의 마지막 10년까지 볼 때, 전 인구의 80~90%(세 명 중에 두 명) 정도가 신교도들이었다. 그 숫자는 약 4백만 명이었다.
15세기의 헝가리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의 하나였으며, 왕의 권력은 교회보다 더 강력하였고 토지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왕의 아래에 놓여 있었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대부분은 농노나 가난한 사람들이었기에 신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잔혹하게 압박을 받았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그들(농노) 스스로가 벌인 농민 항쟁으로 인해 또다시 그 이전보다 더 잔인한 억압을 받아야만 했다. 1526년 터키 군대에 의한 모하치(Mohacsi) 전투의 패배와 이교도인 침입자들에 의해 땅의 절반 이상이 점령당하게 되어 나라 대부분이 황폐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중세 교회의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가운데 국민의 종교의식과 윤리의식은 종교개혁 지도자들의 설교 메시지를 통해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옥토가 되었다.
헝가리의 비숍(Bishop) 메리우스 유하스(Meliusz Juhasz)는 공중 질서와 사회적 삶, 교육, 법과 질서 그리고 주민의 육적, 영적 안녕에 있어서 스위스 종교개혁가들을 모방했으며, 교회의 일치와 질서에 책임을 지고 1567년 데브레첸 종교회의에서 스위스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데브레첸(Debrecen)은 국토의 동쪽에 위치한 교회의 본체로서 교회적 삶에 이정표를 세우는 중요한 것이었다.
헝가리 개혁교회는 헝가리 국민들에게 16세기에 가장 주목할 영적인 공로로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고 완벽하게 구약 성경이 번역되었다.

2) 반 종교개혁과 저항의 시기(17~18세기)
17세기에는 헝가리 개혁교회의 생존에서 가혹한 시련과 박해를 가져왔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드 2세(King Ferdinand II of the House of Habsburg)와 예수회의 대주교 피테르 파즈머니(Peter Pazmany)가 대표적인 박해자였다. 합스부르크와 서로 결탁한 가톨릭에서는 개신교가 왕성히 꽃을 피우고 있는 헝가리 개혁교회를 좋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헝가리에 있어서 반종교개혁의 전략은 기독교 이단에 대항하여 전쟁하는 것이었고 그에 따른 전쟁에 참전하는 용사들에게 임금을 지급하였다. 이것은 정치적 문화적인 측면에서 동시에 핍박이 가해졌다. 왕의 도움으로 피테르 파즈머니(Peter Pazmany)는 곧 헝가리 30여 귀족층을 가톨릭으로 환원하는 데 곧 성공하였고 그의 제안은 곧 헝가리의 공법에 드러나지 않게, 보호자 없이 남겨진 개신교도들에 대항해 핍박이 무섭게 자행되었다. 반종교개혁의 목적은 가톨릭 신념을 전(全) 헝가리 개신교도들에게 개종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목사(개신교 성직자)들은 이전 1673년 포조니(Pozsony) 특별 법정에 소환된 것에 저항했다. 헝가리 북부에서는 32명의 루터파와 한 명의 개혁교회 목사가 가톨릭교회를 중상하고 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고발하였다. 왕의 선처로 한 명의 개신교 목사가 석방되고, 다른 목사들은 그들의 성직을 박탈당했다.
이 결과로 개신교 목사들과 지도자들은 왕국에 속한 전 영토로부터 소환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엄청난 협박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에로의 개종을 원치 않았으며, 심지어는 감옥으로 그리고 족쇄를 채워진 채 포조니(Pozsony)에서 트리에스테(Trieste-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는 항구도시)의 군함의 노예로 보내어졌다. 이를 접한 모든 기독교 세계는 그들의 희생에 감동했다.
유럽의 개신교 국가들은 헝가리 개신교들의 핍박과 어려운 실정을 알기 시작하였다. 군사적인 힘으로 가톨릭화 하려고 했던 계획에 따라 개혁교회는 변화를 위한 커다란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개신교는 그들에 대항하여 출판과 더 많은 수의 격렬한 행동을 표출하였다. 결국, 교회 건물들이 몰수당하고 신학교까지 문을 닫게 되었다.
1781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요셉(Jozsef. II)2세와 헝가리의 왕은 칙령을 발포했다. 이것은 가톨릭이 아닌 신자들의 실질적인 대중 종교집회를 통제하고 그것에 의해 수백 년 동안 탄압을 종식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개신교의 종교집회는 최소한 100명의 개신교가 모이는 집회에 한해서만 허락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사들에게만 목사의 권리를 주었으며, 교회 짓는 것을 허락했으나 교회에 어떠한 탑이나 첨탑을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칼뱅주의 헝가리 개신교의 동향이 있었다. 17세기에 루터파와 개혁교회가 헝가리 전역에 퍼져나갔으며, 1617년에는 헝가리의 서쪽 지역에 위치한 퍼퍼(Papa)에서 최초로 장로회 조직이 생겨났다.

3) 종교의 자유를 위한 시대(19세기)
오랫동안 종교의 동등을 요구했던 것이 마침내 이루어지고 노력이 진전되었다. 그럼에도 로마 가톨릭교회가 지배하고 있었기에 모든 행정적인 면에서 개신교도들의 생활은 더욱 힘든 상황으로 처하게 되었다. 1848년 10월 20일에 마침내 헝가리에서는 어떠한 지배적인 종교도 있을 수 없다는 선언과 함께 로마 가톨릭, 개혁교회, 루터파 교회 등 이미 기존하는 종파들은 서로 동등함과 협력해야 함이 선포되었다. 이는 국가에 의해 행정과 교육적 지출이 보조됐다. 그러나 1849년에 있었던 독립전쟁이 실패로 끝남으로 독립 전쟁 동안 개신교회들은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의 독립에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이유로 그 해(1849년) 9월, 개혁교회 구역에 황제인 프렌츠 조셉(Emperor Franz Joseph)에 의해 개신교회들은 큰 수모를 겪게 되었다. 왜냐하면, 반역의 무리에 개신교회가 관련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헝가리 개혁교회는 이에 대해 투쟁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헝가리의 합법적인 자유는 1867년 타협으로 되찾게 되었고 개혁교회는 점차 내적 자유를 회복하게 되었다.

4) 교회의 생동(20세기)
1910년 통계를 보면 헝가리 개혁교회의 숫자는 2,620,000이었다.(이 숫자는 1870년 이후 무려 5천만 이상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후 헝가리는 1920년 트리아농 조약(Treaty of Trianon)에 의해 자국 영토의 3분의 2를 상실하였다. 이를 통해 헝가리 개혁교회는 전 교세의 절반을 잃게 되었다. 헝가리 개혁교회는 트리아농 조약 (Treaty of Trianon)의 충격과 더불어 더욱더 악화하는 피난민들과 전쟁 후 초래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곳에 성경 보급과 더불어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헝가리 정부의 정책은 기독교 국가의 원리에 의한 지침을 내렸다. 아르파드(Arpad) 이후 시작된 국가적 종교 정책은 가톨릭을 국가종교로 하여 국가의 미덕과 영웅담과 상상을 넘는 영감과 생동감 등을 합하여 신중히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면서도 개혁교회를 또한 국가 지지세력으로 교묘히 이용하였다. 이미 국가는 민족주의의 유혹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헝가리 개혁교회의 역사는 국가와 민족의 우수한 문화에 강조를 두는 경향에는 강조하거나 뜻을 같이하지 않았다.

a. 2차 세계 대전 후의 교회
1948년 국가는 계약을 분리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교회와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투쟁적 무신론들, 반 성직주의자들과 주도권을 가지기 위한 항쟁들로 인해 이러한 관계의 정리는 심각한 방해를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교회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소련에 의존하는 헝가리 인민 공화국의 ‘자유 국가 안에서의 자유 교회’라는 강력한 원칙이 놓이게 되었다. 1당 체제로서 하나의 당으로 되어 가는 공산당이 결국에는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이들을 처형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에까지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종교교육은 강제된 이념 교육으로 대체 되었다. 그다음 단계는 학교의 숙청이었다. 종교와 비 종교의식으로 구분하여 종교 교육은 완전히 폐지당했다.
1956년 혁명 기간 헝가리 개혁교회는 단지 공산당에 대항하여 승리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벌어지는 잔학한 행위들을 시민들에게 명백히 드러내는 데에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법에 따라 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해 끔찍하게 대했다. 많은 이들은 공산당에 의해 저들의 지위와 직무를 박탈당했다. 이러한 상황은 지도자들과 교회 성도들 사이에 이간질과 불신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헝가리 개혁교회는 최초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후에는 국가 지도자들로서 정치적 체제하의 한 부분으로 군림하는 신세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b. 1956년 민중 혁명
1956년의 혁명은 자유를 위한 이 시대의 마지막 시도였다. 짧은 기간 동안 그들은 또한 자유를 위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혁명이 지난 후 몇 달 동안 다시 종교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러나 1년 동안의 짧은 기간 동안 혁명에 대한 앙갚음(보복)과 더불어 혁명에 가담한 교회의 성직자들은 호된 처벌을 감수해야만 했다.
헝가리 개혁교회 또한 많은 순교자를 낳게 되었다. 목사들과 신학생들은 그들의 목숨으로 혁명에 대한 그들의 희생을 지급했었다. 순교자들을 위한 기념행사가 금지당했고, 혁명에 희생된 그들의 이름은 단지 한정된 범위 안에서만 언급될 뿐이었다. 오늘날 라다이 신학교(Raday Kollegium)의 벽에는 그들을 기념하는 기념 판이 새겨져 있다.

c. 변화하는 정권하에서의 교회
1989년부터 정치적 변화가 일기 시작했으며, 소련의 몰락을 예감한 헝가리는 서방세계를 향해 국경을 열었다. 동독의 많은 망명자가 오스트리아 (Austria)의 국경을 통과하여 헝가리의 헤제쉬헐롬(Hegyeshalom)으로 넘어왔다. 헝가리는 이들을 받아들였고, 개혁 교회는 난민들을 위한 도움과 구호의 손길을 폈었다.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의 여러 나라와 교회들은 점차로 공산주의의 압박과 격리로부터 해방되었다.
공산당의 기구는 사라지고 1990년에 종교와 양심의 법령이 발포되었다. 이 법령 제1절에는 “양심과 종교의 자유는 헝가리 정부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인간의 기본 권리요 집회에 대해 방해받지 않고 보장받을 수 있다.” 고 기록하고 있다.

5) 오늘의 개혁교회
오늘날 현재 헝가리 개혁교회는 숫자상으로 볼 때, 전체 인구의 약 20%인 2백만 명의 성도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에 등록된 숫자는 2백만 명에 달하지만 주일 예배에 출석하는 숫자는 절반도 안된다. 이 숫자는 세례받을 때 기록된 세례 자의 숫자 통계로 작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명목상의 성도들까지 포함한 것이다. 수치상으로 드러난 교인 수도 그렇지만 현재 개혁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복잡하다. 그 실례로 교회의 운영은 교역자가 중심이 되어 움직여진다. 다시 말해 평신도가 예배 순서에 참여하는 것은 상당히 배제되고 있다. 그 이유는 공산당 시대에는 종교 청에 등록된 목사들만이 설교와 예배를 집례 할 권한을 줬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금도 그러한 관습이 지금도 이들의 삶 가운데 배어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성도들의 참여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목회자들은 체제 변화 이후 반환된 교회를 보수하고 증축해야 하는 문제와 더불어 교회 행정 등 가시적인 책임까지 완수해야 하는 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결과 설교와 말씀을 대할 시간과 영성 계발 등의 영적인 면에서는 당연히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밖으로 드러나는 일들에 더 많이 치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말씀과 기도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은 교회로부터 마음을 멀리하거나 교회를 떠나고 있다.

12. 마무리하며
헝가리는 많은 기독교인의 순교의 피와 땀이 묻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술과 약물과 매춘행위, 거리에는 노숙자들과 집시들이 휴지통을 뒤지며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도시 외곽에 있는 집시들은 폐허가 된 집에서 생활하다가 결국 국경 지역으로 이동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헝가리 사람들은 사회주의 체제에 서 있었던 영향이 아직 남아있어 책임을 지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들을 주변에서 많이 듣게 된다. 공산권에 있을 때 그들의 눈 밖에 나는 일이 있으면 책임자는 죽임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겪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자리가 없어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유럽으로 떠나는 현실과 교회들 또한 노인들만 앉아 있는 교회로 되어가고 있다. 과도기에 있는 이 땅이 말씀으로 회복되고 젊은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과 비전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가 필요하다. 또한, 헝가리 사회 속에 있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들이 헝가리 교회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함으로 이 땅이 변화되기 시작하리라 믿는다. 헝가리 교회의 헌신하는 노력이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그리고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중보가 필요하다. 자유의 물결이 요동치는 이 땅에 과거 순교자들의 헌신이 헛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기도제목
1. 헝가리 교회의 헌신하는 사역들 위에 성령의 역사가 있도록
2. 헝가리 교회와 성도들의 마음에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도록
3. 로마인(집시)들의 삶이 말씀으로 변화되도록
4. 각 교회마다 다음 세대를 이어갈 젊은이들이 넘쳐나도록

Ⅲ. 참고 문헌
1. 세계기도정보
2. 두산백과사전
3. 소련과 동유럽의 종교와 민족주의/임영상, 황영삼 공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4. 헝가리사/이상협/대한교과서주식회사
5. 헝가리 역사에 나타난 개혁교회의 선교와 전망/정채화 (장로회신학대학원)

정리 및 보고
최종관/김미진 선교사(헝가리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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