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에는 약골이 없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취하려 하나이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왕상19장) 한때 탈진 상태에 놓여진 선지자 엘리야의 탄식이다. 황후 이세벨의 군대에 쫓겨 사형 협박까지 받은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절망은 잠시일 뿐 결코 그는 약자가 아님을 들어냈다. 바알의 선지자 450명을 기손 시내에서 목 잘라 처리했으며 3년6개월 닫혔던 하늘 문을 무릎기도로 활짝 열어 소낙비를 쏟아지게 하였다. 그가 받은하나님의 영감을 갑절이나 엘리사에게 물려주었고, 죽어 1년 지난 그의 몸에 다른 시체가 닿자마자 소생케 되는 (왕하13:21)기이한 이적도 있었다. 엘리야뿐만이 아니다. 삼손은 성 문짝을 뿌리 채 뽑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높은 산으로 유유히 올라가 적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으며, 나귀의 턱뼈를 손에 걸머쥐고 블레셋 군사 일천 명을 쳐서 두 무더기 시체로 만들기도 했다. 미가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 400명과 여유 있게 맞섰으며, 빌립 집사는 강퍅한 사마리아 도성을 예수 복음으로 희열의 성으로 바꾸었다. 바울은 천하를 요란케하여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들어가고자 했던 로마성에 기어코 복음 들고 입성했다. 성령에 사로잡혀 주님 손에 쓰여질 때 누구나 할 것 없이 한결같이 강력한 병사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갈대처럼 가냘프고 나약한 그리스도인으로 가득찬 것 같다. 박 넝쿨 하나로 웃고 울면서 하나님을 쉽게도 원망하는 요나의 후손들이 심히도 많다. 고비를 참지 못하고 10번이나 원망하고 거역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고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둔화가 분명히 자기 게으른 탓과 도덕적 타락이 그 원인임에도 경제성장과 자동차 문화 탓으로 돌리고 편한 마음을 쉽게 가진다. 선교지 사람들이 돈만 알고, 게으르고, 시간 안 지키고, 배신 잘하고 거짓말 잘한다는 푸념만 일삼고 자기의 선교 무능력과 사랑 없음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우리 민족도 하나도 빠짐없이 이 결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오래된 교회 전통 때문에 교회는 부흥되지 않는다고 전통을 성령보다 무서워하고, 쉽게도 교회 성장을 체념하는 약한 마음들, 도무지 솔직하지 않으려는 영악성, 기어코 자기 실수를 변명만 하고 회개치 않으려는 교활성, 이 모두는 약자의 특징들이다.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가 하는 것을 다음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병약자의 넉살이다. “남이 타협하면 양보, 남이 가난하면 게으른 탓, 내가 가난하면 사회구조의 모순 탓, 남이 한 우물을 파면 우물 안 개구리, 내가 한 우물을 파면 전문가, 남이 좀 검은 피부면 야만적, 내가 좀 검은 피부면 야성적, 남이 빗나간 사랑을 하면 스캔달, 내가 외도하면 로맨스, 남이 말하면 수다쟁이, 내가 말하면 다양한 화술, 남이 나서면 교만, 내가 나서면 개성…….” 우리는 솔직해야 한다. 그리고 혹시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실패를 거듭했더라도 실패의식은 빼버려야 한다. 예수님처럼 기어코 목적을 달성하자. 낙담은 하지 말자.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24:10)” 익숙한 사공은 풍랑도 헤쳐 간다. 원망과 변명과 실망은 나약한 존재임을 공포하는 일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개선장군 예수님의 모습을 되찾자. 성경에 숨어있는 모든 권세를 발굴하자. 그리고 영적 용사가 되자. 천하무적의 예수 제자가 되자. 할렐루야!
이동휘목사(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담임목사)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취하려 하나이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왕상19장) 한때 탈진 상태에 놓여진 선지자 엘리야의 탄식이다. 황후 이세벨의 군대에 쫓겨 사형 협박까지 받은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절망은 잠시일 뿐 결코 그는 약자가 아님을 들어냈다. 바알의 선지자 450명을 기손 시내에서 목 잘라 처리했으며 3년6개월 닫혔던 하늘 문을 무릎기도로 활짝 열어 소낙비를 쏟아지게 하였다. 그가 받은하나님의 영감을 갑절이나 엘리사에게 물려주었고, 죽어 1년 지난 그의 몸에 다른 시체가 닿자마자 소생케 되는 (왕하13:21)기이한 이적도 있었다. 엘리야뿐만이 아니다. 삼손은 성 문짝을 뿌리 채 뽑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높은 산으로 유유히 올라가 적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으며, 나귀의 턱뼈를 손에 걸머쥐고 블레셋 군사 일천 명을 쳐서 두 무더기 시체로 만들기도 했다. 미가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 400명과 여유 있게 맞섰으며, 빌립 집사는 강퍅한 사마리아 도성을 예수 복음으로 희열의 성으로 바꾸었다. 바울은 천하를 요란케하여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들어가고자 했던 로마성에 기어코 복음 들고 입성했다. 성령에 사로잡혀 주님 손에 쓰여질 때 누구나 할 것 없이 한결같이 강력한 병사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갈대처럼 가냘프고 나약한 그리스도인으로 가득찬 것 같다. 박 넝쿨 하나로 웃고 울면서 하나님을 쉽게도 원망하는 요나의 후손들이 심히도 많다. 고비를 참지 못하고 10번이나 원망하고 거역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고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둔화가 분명히 자기 게으른 탓과 도덕적 타락이 그 원인임에도 경제성장과 자동차 문화 탓으로 돌리고 편한 마음을 쉽게 가진다. 선교지 사람들이 돈만 알고, 게으르고, 시간 안 지키고, 배신 잘하고 거짓말 잘한다는 푸념만 일삼고 자기의 선교 무능력과 사랑 없음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우리 민족도 하나도 빠짐없이 이 결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오래된 교회 전통 때문에 교회는 부흥되지 않는다고 전통을 성령보다 무서워하고, 쉽게도 교회 성장을 체념하는 약한 마음들, 도무지 솔직하지 않으려는 영악성, 기어코 자기 실수를 변명만 하고 회개치 않으려는 교활성, 이 모두는 약자의 특징들이다.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가 하는 것을 다음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병약자의 넉살이다. “남이 타협하면 양보, 남이 가난하면 게으른 탓, 내가 가난하면 사회구조의 모순 탓, 남이 한 우물을 파면 우물 안 개구리, 내가 한 우물을 파면 전문가, 남이 좀 검은 피부면 야만적, 내가 좀 검은 피부면 야성적, 남이 빗나간 사랑을 하면 스캔달, 내가 외도하면 로맨스, 남이 말하면 수다쟁이, 내가 말하면 다양한 화술, 남이 나서면 교만, 내가 나서면 개성…….” 우리는 솔직해야 한다. 그리고 혹시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실패를 거듭했더라도 실패의식은 빼버려야 한다. 예수님처럼 기어코 목적을 달성하자. 낙담은 하지 말자.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24:10)” 익숙한 사공은 풍랑도 헤쳐 간다. 원망과 변명과 실망은 나약한 존재임을 공포하는 일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개선장군 예수님의 모습을 되찾자. 성경에 숨어있는 모든 권세를 발굴하자. 그리고 영적 용사가 되자. 천하무적의 예수 제자가 되자. 할렐루야!
이동휘목사(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담임목사)